독일이 단치히 출신의 그라스를 자국의 작가로 둔 건 늘 감사해야 할 일이다.
양철북 소리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모든 이가 화들짝 놀라듯 독일은 그라스의 일성에 늘 놀라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디아스포라의 한 역할을 발견한다.
Günter Grass(1927-)
여성성이 과도하게 드러나는 시보다는 이야기시나 음악으로서의 시에 방점을 찍는 시가 낫다.
미리 늙어버린 시인의 그저 알고들 있는 이야기건만 입과 귀를 즐겁게 하는 시어는 발랄함마저 놓치고 있지 않다.
두고 두고 볼 일이다.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시의 궤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최초의 시인이 아닐까 싶다.
그 궤적 어느 곳에도 감정의 발랄함과 소리를 내면 내 입이 신기할 시어들을 놓치고 있지 않다.
어느 곳엔가 꽁꽁 숨어 얼어있던 마음자리가 그를 만나 다시 주인임을 알고 기뻐하고 있다.
정지용(1902-1950)
고전 선정에 있어서 불균형은 여전하다.
서울대 편제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일문학에 손을 뻗친 것처럼 아프리카와 중동에도 손을 뻗어야 한다.
과학기술 고전의 저자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이가 적지 않다.
역동성은 인문, 사회과학에도 있다.
<시경>의 자유분방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시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핍진하게 녹아 있다.
언젠가는 맞닥뜨릴 삶의 괴로움을 미리 만나 가슴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당시는 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