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미쓰의 생애를 잘 알지 못하나 가늠할 수 있다.
제국주의 정치하에서 그가 무엇을 했나 의문을 갖는다.
소설은 꽤 재미있다.
인물도 성격이 도드라져 있다.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橫光利一(1898~1947)
삶에 대한 새뜻한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시심일 것이다.
김광규는 나이 들어가며 외려 더욱 새로이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처음' 보듯, '처음' 만나듯, '처음' 말을 건네듯 살려는 우리 시인이여.
이에 양심이 또한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아라화의 아버지가 불분명하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화해와 공존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가 마술사임은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던져준다.
근대 안에만 갇혀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흐푸즈를 기억해야 한다.
아드함, 자발, 리화와, 까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발라위를 기억해야 함은 물론이다.
Naguib Mahfouz(1911-2006)
서구에 거주한다지만 각색의 사람들의 이야기라 난삽하긴 하다.
가톨릭을 포함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제한함은 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독자인 나는 대화에 동참하니 좋다.
이들도 실제로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봄은 어떨까?
두 사람이 남긴 위대한 글들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흥분하는 것을 보면 우정이란 서로가 아끼는 것을 더욱 소중히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두 사람의 사랑은 두고 두고 아낌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