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고통을 목격하고 상상할 수 있는 통로를 원천봉쇄하는 세계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화면이 몇 개인가?
그러나 그 어느 화면을 통해서도 우린 타인의 고통을 보고 있지 않다.
이 세계를 이겨내야 한다.
져서는 안 된다.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자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심상찮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자면 어느새 죽음의 그림자를 나도 모르게 보고 만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겐 당신 가족의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분하다.
이탈리아에서 끌려간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빵 한 조각의 참혹함을 이야기할 때 나는 이탈리아식의 부드러운 빵을 먹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하는 그 빵과 부드러움이라는 부가가치마저 보장한다는 이 빵 사이의 거리란 비단 60년만이 아니다.
그 때 나는 3층에 있는 내 침대에서 쿤 노인이 머리에 모자를 쓰고 상체를 거칠게 흔들며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그 소리를 듣는다. 쿤은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하고 있다. 그 어떤 위로의 기도로도, 그 어떤 용서로도, 죄인들의 그 어떤 속죄로도, 간단히 말해 인간의 능력안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절대 씻을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일이 오늘 벌어졌다는 것을 쿤은 모른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면 쿤의 기도를 땅에 내동댕이 쳤을 것이다.('1944년 10월', 198-199면)
선진국은 초국적 기업과 국제기구를 각기 전후방에 배치하여 선진화를 열망하는 국가들에게 폭격을 가하고 있다.
유격전과 진지전을 번갈아 가며 정신없이 배를 불리고 있다.
우리가 그 폭격의 대열에 서는 걸 목격하는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근대의 가장 강력한 기제는 국민주의일 것이다.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근대의 종언이란 있을 수 없다.
사까이 나오끼는 일본과 아시아, 미국의 국민주의를 깨뜨리려 한다.
푸코를 닮아서일까?
뚜렷한 지향점이 없다.
그가 힘써 공부해야 할 것은 일본만이 아닌, 아시아의 과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