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로봇을 왜 이야기 하는가?

 

  그것은 로봇이 미래에 차지하게 될 자리가 크리라는 예견 때문이리라.

 

  낯섦 때문일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소설들이다.

 

  소재, 기법, 주제 모두 낯설다.

 

  로봇이라는 소재도 결국은 인간을 더욱 잘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적'인 소설의 한 전범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속의 소설 역시 이 자장 속에서라면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

 

  갇혀 지내는 이들의 푸념이라면 소재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중국의 작가 위화가 자전적 글에서 가와바타의 소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위화는 마음의 줄기지음에 놀랐으리라.  

 

    川端康成 (1899-19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춤추는 상고마
장용규 지음 / 한길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아모스 투투올라라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가 있다. <야자열매술꾼Palm Wine Drinkard>이라는 재미난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내가 만나 본 첫 아프리카 문학이었다. 첫 대면으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한다는 게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기존의 내가 만나 본 문학과는 분명히 많은 부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내가 만나 본 소설들'은 분명 유럽 문학일텐데 여기에 내 부족함이 있다는 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언제나 내 사고의 기준점은 보통 서양(the West)이라 막무가내로 불려지는 유럽이다. 유럽적 사고와 다르면 낯설고, 불안하고, 미심쩍다. 뭔가 못마땅하다. 오리엔탈리즘이 내 몸과 마음 깊이 깊이 스며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원시, 미개, 야만......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슬픈 대륙 아프리카는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자신이 독자적으로 서 있지 못하다. 그들은 서양이라는 타자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동아시아의 우리 역시 햐얗고, 단정한 서양이라는 매개항을 통해 아프리카를 바라본다. 따라서 그들은 늘 까맣고, 지저분하다. 서양과 나머지 지역(the Rest)만이 있을 뿐이다. 나머지 지역에 속한 문명 혹은 국가는 그 자신이 존립을 결정하기가 힘들다. 일반적, 보편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보편적 기준(Global Standards)이란 게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이 기준이란 다름아닌 유럽적 가치, 미국적 가치이다.
  
      보편적 가치에도 이상이 온 걸까? 근래 유럽의 서점가에는 제3세계 문학이 홍수를 이룬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에도 제3세계 출신의 작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올해의 수상자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존 쿳시이다. 그런데 이들 제3세계 출신의 작가들이 그들의 고국을 제대로 작품 속에 담아내는지는 의문이다. 1986년에 수상한 나이지리아 출신의 월레 소잉카가 자신의 전통 문화를 등한히 여긴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아는 사실이다. 서인도 제도 출신의 2001년 수상자인 V. S. 나이폴은 인도 소설은 서양 소설의 모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춤추는 상고마>는 나머지 지역의 아시아와 아프리카간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던 인류학이다. 요사이 이에 대해 많은 비판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식민지 경험을 한 두 국가가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저자의 다음 말은 이 책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이미 화석화되었기 때문이다." 화석화된 시각은 종시 가치가 없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단단한 화석의 균열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그것은 대상 국가, 국민, 문명권을 바로 볼 만한 뚜렷한 이론이 저자에게는 아직 없지 않나하는 생각 때문이리라.
  
      나는 이 책을 통해 물신(物神)의 무서움을 또 한 번 느꼈다. 아프리카 사회의 전통을 가장 아낀다고 자부하는 상고마들조차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에는 기를 꺾는다. 정말 어울릴 것 같지 않는 기막힌 장면들이 여기에서 보인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아프리카가 왜 그리워지는 것일까? 그 곳에 무엇이 있길래 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살로 생을 마치기 전 유난히 아프리카 여행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의 유고작이 <여명의 진실True at First Light>인데 이 소설의 배경은 아프리카이다. 헤밍웨이를 무척 닮은 주인공은 모든 것을 내팽개쳐 두고 아프리카로 돌아온다. '돌아온다'. 아프리카에 대한 그리움, 사라지는 자연에 대한 아쉬움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다. 주인공에겐 아프리카가 심정적인 고향인 것이다. 고향을 이미 찾은 헤밍웨이에겐 이제 삶은 싱거운 것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살하기 전 친구에게 울먹이며 건넨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어"란 고백은 이미 그의 모든 것이 나와 버렸다는 말에 다름아닐 것이다. 난 그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나머지들의 만남'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우리들 안에 더욱 근원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는 데 나머지들이란 말은 이제 더 이상 온당치 않다. 그럼 이제 이름을 무엇이라 붙여야 할까? 고민만 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서즈 비니어드 섬 사람들은 수화로 말한다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10
노라 엘렌 그로스 지음, 박승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잠시 미셸 푸코를 읽어보자.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푸코는 사람들이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자신에게 낯설 때 적개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제 이 낯섦을 제쳐두고 타자를 동화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무리를 이룬다. 무리를 이루는 자들은 메이저리티가 되고, 차이를 지닌 자들은 마이너리티가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메이저리티는 권력을 갖게 된다. 차이를 지닌 마이너리티는 이제 함께 있기가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마이너리티는 광인 혹은 병인으로 불린다. 연장하여 푸꼬는 실정성(實定性)에 대해서도 논한다. 실정성이란 어떤 담론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합의되는 조작의 전제이다. 그는 이를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라고 부른다. 실정성에서 도출되는 담론은 예컨대 학교 교육 등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사실로 각인되어간다. 곧 담론=권력이 되는 것이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미국 보스턴 남쪽에 있는 섬)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그들이 우리는 정말 낯설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청각 장애인을 대하는 섬 사람들의 언행이 나는 너무나 신기했다. 노라 엘렌 그로스도 이 연구를 하는 내내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다.
  
     난 섬 사람들이 차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건청인들은 수화를 배운다. 수화를 익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테고, 실제 청각 장애인을 대할 때는 갑갑할 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화를 익히는 것이 당연하다. 수화란 그들에게 외국어 하나를 익히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청각 장애인들의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외국어 하나를 더 익힌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차별을 조성하지 않으려면 건청인들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앞서 인용한 푸코에서 사람들은 차이를 대할 때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로 가르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더 이상 소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는 차별만 난무할 뿐이다. 
  
     차별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있나?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바로 그런 곳이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차별은 없다. 수화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수화로 말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의 삶의 체계에는 분명히 자리잡혀 있다. 함께 살고자 함이다. 더불어 살고자 함이다. 이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Nora Ellen Groce(19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과 지성인
에드워드W.사이드 지음 / 창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비평가란 어디까지나 작품과 작가를 좇는 존재일 뿐인가?

 

  사이드 자신이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지성인들에게서 나는 자꾸 방어의 힘씀을 본다.

 

  비평가란 주도와는 먼 직업인가?

 

  결국은 자기 이론이다.

 

  이론가가 되지 않으면 늘 좇는 피곤한 삶이다.

 

  근대적 학문의 너머도 바라봐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