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미셸 푸코를 읽어보자.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푸코는 사람들이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어떤 존재가 자신에게 낯설 때 적개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제 이 낯섦을 제쳐두고 타자를 동화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무리를 이룬다. 무리를 이루는 자들은 메이저리티가 되고, 차이를 지닌 자들은 마이너리티가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메이저리티는 권력을 갖게 된다. 차이를 지닌 마이너리티는 이제 함께 있기가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마이너리티는 광인 혹은 병인으로 불린다. 연장하여 푸꼬는 실정성(實定性)에 대해서도 논한다. 실정성이란 어떤 담론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합의되는 조작의 전제이다. 그는 이를 '역사적 아프리오리(a priori)'라고 부른다. 실정성에서 도출되는 담론은 예컨대 학교 교육 등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사실로 각인되어간다. 곧 담론=권력이 되는 것이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미국 보스턴 남쪽에 있는 섬)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그들이 우리는 정말 낯설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청각 장애인을 대하는 섬 사람들의 언행이 나는 너무나 신기했다. 노라 엘렌 그로스도 이 연구를 하는 내내 신기함을 감추지 못한다.
난 섬 사람들이 차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건청인들은 수화를 배운다. 수화를 익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테고, 실제 청각 장애인을 대할 때는 갑갑할 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수화를 익히는 것이 당연하다. 수화란 그들에게 외국어 하나를 익히는 정도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청각 장애인들의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외국어 하나를 더 익힌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차별을 조성하지 않으려면 건청인들이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앞서 인용한 푸코에서 사람들은 차이를 대할 때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로 가르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더 이상 소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는 차별만 난무할 뿐이다.
차별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있나?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바로 그런 곳이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차별은 없다. 수화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수화로 말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의 삶의 체계에는 분명히 자리잡혀 있다. 함께 살고자 함이다. 더불어 살고자 함이다. 이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Nora Ellen Groce(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