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를 문화연구로 이겨나가자는 글들이다.
더이상 문학의 고고함과 답답함에 눈 돌리지 않는 시대에 분명 호소력 있는 전언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에 종속된 값싼 문화가 지레 겁을 주기도 한다.
나는 그렇다.
위화는 젊지만 깊이가 있다.
이 깊이는 보편성에 다름 아니다.
그는 중국적인 것이 분명 보편적인 것임을 확신한다.
이 자신감이 보기 좋다.
공산주의는 입으로는 허삼관을 추켜 세우지만 실제로는 밟아버린다.
그것은 이념 역시 악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에 있어서 그림 그리기란 일종의 제의였다.
그림과 화가들의 삶이 내게 이토록 큰 울림을 갖게 하는 것은 왜일까?
이것 역시 성스러운 작업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일종의 순교자일테다.
그래서 혹 서경식은 책의 제목에 '순례'를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개인사를 보자면 더욱 이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애원하듯 사신을 부여잡는 소녀.
청춘이 부여잡아야 할 많고 많은 것 가운데 그는 사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그려진 화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죽음을 끌어 안을 때만이 진정한 삶이 그려지는 것이다.
내겐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된다.
사신은 없으나 死는 있다.
창의력은 어디에 존재해 있는가?
낭만주의적 발상에 기대자면 그것은 내 몸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이 내 몸 곳곳에 숨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용 면에서는 새롭다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이미 알았던 것을 꼼꼼이 따져보는 재미는 있었다.
실용적 저서가 깊이를 갖추기란 쉽지 않을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