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의 비평은 생산적이다.
그는 쓸 데 없는 현학과 장광설을 냅다 걷어 치운다.
90년대 문학은 문학의 생산성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사변속으로 넓고 깊게 흩어져 갔다.
이 흩어짐을 도무지 한 데 모을 수가 없다.
최원식의 비평은 이 모음의 작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첫 사랑의 추억과 그 실제성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
추억 중에서 첫 사랑의 추억만큼 끈덕지게 한 사람을 붙잡는 게 또 있을까?
죽음을 의식하며 첫 사랑의 이야기를 쓴 것은 왜일까?
왜일까?
김승희는 산문가가 더 잘 어울린다.
그가 소설가가 된 것은 필연적이다.
그는 시를 쓰는 이유가 확실하다.
못 견딜만치 시는 그를 충동한다.
이걸 보면 문학은 정말 죄인들이 하는 것인가 보다.
중년의 김승희는 어떤 죄의식에 고통하는가?
프랑스 비평사가 이만큼 풍요로운 것은 거멀못이 되어 줄 작가,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제네바 학파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들은 천장에 구멍을 뚫고자 한다.
이것은 또한 말년 김현의 관심이리라.
인간의 심연을 찾는 방법이기에.
침묵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침묵이 미덕이던 시대를 이 글과 사진들은 증언하고 있다.
달변과 다변이 미덕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너희 뱉어지는 말들은 얼마나 불행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