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이 지적한 대로 성의 사람들은 성의 질서에 순순히 자신을 내 맡긴다.
성과 관리들은 온갖 풍문 속에서 이들을 다스린다.
결국 풍문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풍문과 자발적 복종이 나치즘을 만들어냈다.
카프카를 통해 이를 들여다본 벤야민을 나치는 죽였다.
카프카는 나치를 보지 않아 행복하다 하겠는가?
딴죽을 걸어대는 인터뷰가 좋기도 한데 김혜리는 인터뷰이에게 푹 빠져 있어 시종 기대하기가 힘들다.
인터뷰 앞선 글의 미문 취향까지 더해 인터뷰이의 낯선 아우라를 만든다.
그래서 외려 인물이 제대로 안 보이기도 한다.
김혜리도 직장 선배인 조선희, 고종석 처럼 소설을 쓰게 될까?
책 말미 아옌데의 죽음을 말하는 네루다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 칠레의 고통은 도르프만에게서 충분히 보았기에 네루다의 슬픔이 더욱 절절히 다가온다.
시인의 몫이 노래 뿐이라는 이들에게 네루다는 사랑과 투쟁을 말하는 것이리라.
Pablo Neruda(1904–1973)
위화와 바진을 비롯해 중국은 유난히 가족 소설이 많은 듯 하다.
한 특색이리라.
봉건성이 가장 뿌리 깊은 데가 가정이기에 자주 그리고 있다.
회의가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이 작품은 깊은 회의가 묻어난다.
또한 섣부른 돌파구도 견제한다.
중국현대문학의 빛나는 장이다.
중국의 대국화, 국수주의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겠다.
하지만 베이다오 같은 정치적 망명자들이 앞서 말한 경향이 없다고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
리쩌허우, 가오싱젠, 베이다오를 좀 더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외교부 대변인 따위가 자국을 방문한 대통령을 혼내는 건 아무래도 민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