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전반 프로작가와 동반자 작가는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어깨동무를 풀어버렸다.
그리고 제각각의 세계로 침잠한다.
이제 프로 / 동반자라는 구분도 소용 없어진다.
특히 이효석 같은 이는 변화의 반경이 꽤나 컸다.
여기서 그의 소시민이 발견됨은 물론이다.
한반도의 기형적인 근대 여명기는 문학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온당한 것이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참다운 개인과 사회가 그려지기란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신채호의 소설 등속에서 일종의 해괴함까지 느끼는 건 그 때문이다.
"평범한 기독교적 삶의 실체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지적인 열망을 발전시키는 것은 다소 버거운 과제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론과 실천의 조화는 항상 어렵다.
그래도 맥그래스가 꾸준히 이 작업을 해 나가듯 우리도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우린 '영육'의 존재가 아니던가?
문학의 사상인지, 사상의 문학인지 헷갈린다.
전자는 문학 속에 내재화한 것이 사상이라는 뜻일 테고, 후자는 결국 사상의 발현이 문학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상을 말할 만한 우리의 작가가 얼마나 되느냐는 의문은 조남현 교수만이 갖는 건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문학은 불온하다"는 김수영의 아포리즘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살아있기 때문에 불온하다.
불온해야만이 살아남는다.
뜨뜻미지근한 문학을 향해 냉큼 꺼지라고 소리치는 김수영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