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 *
1987년 한 해 동안의 격동이 2017년과 비교될 만할까? 자세히 살피면 적지 않은 공통점을 찾아낼 수도 있지 싶다. 그런데 가장 큰 차이가 있다. 거기엔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간극이 가로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군부 독재에 항거하다가 때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만큼 비극적인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토록 가슴아픈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상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보름이나 지났지만 선뜻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자주 함께 영화를 봐왔던 아내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둔 딸과 함께 스페인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고, 어느새 '1987년때 나의 처지'와 엇비슷한 나이가 된 복학생 아들은 '아빠 혼자 보고 와요' 라는 시큰둥한 말로 '동반 감상'을 가볍게 거부하고 만다. 이래저래 혼자 가야 할 판이다.
전방부대에 근무할 때 경험했던 '영하 26도'를 다시금 생생히 떠올릴 만큼 매서운 혹한이 찾아왔지만 밤늦게 홀로 영화관을 찾았다. 좋은 좌석을 골라 늦은 밤 '홀로' 차분히 감상하기 위하여 예매해둔 날짜가 마침 어젯밤이었다. 날씨 때문인지 제법 많은 좌석이 비어 있었고, 맨 앞에서 다섯 번째줄 한가운데 자리를 찾아 앉고 보니, 고작 스무남은 명쯤 되어 보이는 관객 가운데 맨 앞 좌석에 홀로 오도카니 앉은 꼴이 되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게 아무도 없어서 영화에 몰입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 악명 높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빠른 전개와 긴박감 때문에 금세 몰입되었다. '공안검사 최 환' 역을 맡은 하정우의 연기에 차츰 끌려드는가 싶다가 순식간에 '박처원 치안감' 역을 맡은 김윤석의 연기에 급속도로 빨려드는 느낌도 잠시였다. 군부독재 정권을 송두리째 뒤흔들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가증스런 은폐 조작과 '진실'을 밝히려는 거센 저항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들이 격랑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공안검사는 특유의 깡다구로 버텨보지만 역부족이고, 부검의는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당황하여 그만 '고문치사 정황'들을 누설하기에 이르고, 사건은 점차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순식간에 '정권 안보 차원'의 문제로 급부상한다. 기자회견장에서 치안본부장이 '대학생 고문치사 사인'을 두고 어물쩡거릴 때 치안감이 해명했던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다시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혹하면서도 너무나 어이없다. 어느 누구나 인간은 '참나무나 진흙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가 있을 터이고, 친척이나 친구들도 여럿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저토록 뻔뻔스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토록 어이없는 말은 '비극적인 사건을 둘러싼 온갖 은폐와 조작과 억압과 불의의 아주 자그마한 시작'에 불과했다. 군부정권과 검찰과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온갖 조작과 회유와 협박을 서슴치 않았고, 졸지에 자식과 조카를 잃은 박종철 군의 부모와 삼촌은 도리어 죄인처럼 따돌려지고 억압받는 신세로 내몰린다. 고문치사에 가담한 부하들을 입막음하기 위해 대공수사처 간부들은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기 위해 폭력은 물론 가증스런 협박과 회유를 서슴치 않는다.
이 와중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학가의 시위는 나날이 더 거세진다. 이럴 때 바로 기름을 붓는 '대통령 특별 기자회견'이 열린다. 이른바 '4.13 호헌 선언'이다. 5.18 광주 학살이라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독재자의 가증스런 기자회견을 지켜본 국민들의 가슴은 순식간에 거센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당시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4학년생이던 나는 '그날의 기분'을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발하던 따스한 봄날이었다. 연초부터 고문 치사 사건 때문에 가뜩이나 교내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차였던 터라, '호헌 선언'은 가슴 속에 흐르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저 놈이 마침내 실성했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당장 저 살인마를 때려 잡으러 청와대로 쳐들어 가자..' 대통령 담화를 지켜본 학생들은 너나 할것없이 분노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산발적으로 계속 이어지던 교내 시위는 어느새 일과가 되기 시작했고, 학과별 비상대책모임 등에서 '수업 거부'도 속속 결의되었다. 학내 시위는 차츰 교외 시위로 번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6.10 대규모 시민 항쟁'을 하루 앞둔 '출정식'에서 연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고 의식불명에 빠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마침내 6월 10일이 되자 그 무덥던 초여름의 날씨는 그날따라 오전부터 무더위로 푹푹 찌는 듯이 더웠고, 전국의 대학생이란 대학생은 모조리 시내 중심가로 쏟아져 나올 정도로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고, 이른바 넥타이 부대 시민들까지 시위에 가세하면서 '시민혁명'이라는 역사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교내에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벌이다 이내 교문을 벗어나 시내 중심가로 이동하면서 외쳤던 구호가 바로 '호헌철폐! 독재타도!' 였다. 피끓는 젊은이들이 분노를 가득 담아 외치는 그 절박하고 우렁찬 외침들을 어느 시민인들 외면할 수 있었으랴.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종로로, 무교동으로, 시청앞으로 떠밀리듯 밀려 갔고, 새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뜨거운 박수로 호응해 줄 땐 금방이라도 눈물이 솟을 만큼 감격에 겨운 기분도 맛봤다.
그날의 분노와 함성을 영화 속에서 다시 듣는 순간들은 정말로 감동이었다. 모든 걸 그 때 그 시절로 순식간에 되돌려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감정이입'은 이미 대학 신입생 '연희'가 시위 현장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잘 생긴 대학생 오빠'를 만나던 순간부터 마음 속에서 시작되었던 듯하다. 신군부가 막 들어섰던 81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던 내가 더러 가담했던 시위 현장에서 우악스런 경찰한테 붙잡히기 싫어 도망치느라 오금이 저릴 정도로 죽자살자 내뺐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매캐한 최루탄 가스에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어도 함부로 비비지도 못하고 수도꼭지 밑으로 얼굴을 들이밀던 기억들도 떠올랐다.
연희가 시위 현장에서 만났던 학생은 마침 '만화 동아리'에서 활동 중인 연대생 이한열이었다. 그 오빠를 좋아해 써클룸까지 찾아간 연희는 '광주사태 비디오'를 난생 처음으로 보게 된다. 내가 입학한 81년부터 대학 축제때마다 대학가에서 단골로 상영되던 다큐멘터리 비디오였는데, 1987년까지도 '광주의 진실'은 어둠 속에서 몰래 겨우 들여다볼 수 있는 '금서' 같은 역사로 머물러 있었다.
나는 광주 사태가 일어난 때만 하더라도 고3이어서 '세상 물정'을 자세히 몰랐지만, 10.26 이후 '국보위'를 통해 실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몹시 악랄하고 잔인하다는 사실을 5.17 사태 즈음부터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비록 입시준비에 여념이 없는 고3 수험생이었지만, 5월 18일 밤늦도록 켜 놓은 라디오를 통해 생생하게 들려오던 아나운서의 떨리는 목소리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광주 시내는 진압군과 시민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수백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간 현재까지도 소요 사태는 진정이 되지 않고 있으며... 전남도청을 점거한 시민군들은 ... " 정규방송이 갑자기 중단되고 '긴급 뉴스'로 아주 긴박하게 전해지던 그 뉴스는 불과 4분 내지 5분도 못 되어 강제로 중단되었고, 라디오 방송은 다시 '편안한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지만, 그때 새가슴처럼 팔딱거리던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마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더랬다. 어떻게 한 나라의 군대가 자기 나라의 시민과 학생들을 향해 저토록 잔인하게 총탄을 무차별로 퍼부울 수 있단 말인가.
'4.13 호헌 성명 발표'를 영화 <1987>에서 다시 보는 건 여간 끔찍한 게 아니었다. 저 괴수같은 인간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더란 말인가.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과 학생들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참담한 고통을 겪었더란 말인가. 그 비참하고 아픈 역사는 아직까지도 진행중이다. 그런데도 우린 아직까지도 저런 악당 하나 제대로 깔끔하게 단죄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야기가 너무 곁가지로 흐른 듯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4.13 호헌 조치 발표에 뒤이은 6.10 시민 항쟁과 이한열 열사 시민 민주장을 정점으로 막을 내린다. 1966년 8월에 태어났던 연세대 2학년생 이한열 군은 1987년 7월 5일에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축 늘어진 모습으로, 안개처럼 자욱한 최루탄의 포연 속에서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끌려 도망치는 모습은 마침 현장에 출동했던 로이터 기자에 의해 촬영되어 온갖 신문들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아마도 당시에 중고등학교 정도 다녔던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다 기억할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장면을 실감나게 재연한 배우 강동원의 모습이 얼마나 그 당시 실제 상황과 유사한지 깜짝 놀랐다. 시위 도중 쓰러져 의식조차 희미해진 그 순간까지 그의 발에 신겨진 '연희'가 사 준 신발도 자못 감동적이었다.
(맨 왼쪽에 있는 학생은 1987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였는데 영화 『1987』에서 치안본부장 배역을 맡았다. 가운데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민주당 의원.)
이 영화를 보면서 '옛날 생각'이 너무 많이 떠올라 참 많이 놀랐다. 고3때 나는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5.18 광주사태 이후로 강제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에 항의하는 표시로 '교련 수업'을 거부했던 일까지 떠올랐다. 교련복을 입은 채 교련 시간 내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앉아 아무런 구호도 없이 '침묵 시위'를 벌였던 일. 고3때 한문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허구헌 날 '내 아들놈이 서울서 대학 댕기는데, 맨날 데모만 할까봐 걱정이 태산이데이, 니들은 지발 서울로 올라가거등 데모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레이~' 했는데, 이듬해 내가 대학에 진학하고 보니 바로 한문 선생님의 아들이 내가 입학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일(그 선배는 고교와 대학 동문이라 지금도 가끔 만난다), 대학 1,2학년때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거나 강제 징집을 당해 군대에 끌려갔던 많은 학우들, 군대에서 자주 만났던 '강제징집으로 끌려온' 운동권 출신의 선배님, 사회생활 이후 차츰 운동권에서 멀어지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해 간 많은 친구들의 모습까지도.
다른 한편으로는 30년 전에 우리가 살던 당시의 생활상도 생생하게 되떠올릴 수 있었다. 입학 당시만 하더라도 한 학기 등록금이 40만원 남짓 했던 듯하고, 학교 앞 하숙비가 월 3만 5천원 정도 했던 일. 하숙집 전화기는 아줌마가 철저히 감시하기 때문에 시골에서 상경한 고향 친구들이나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올 때도 눈치를 봐야 했던 일, 학교앞 커피숍엔 별로 가지도 않았지만 커피엔 언제나 계란 노른자를 띄워 주던 일, 커피 한 잔 값이 120원이었다가 150원으로 오르고 나중에는 무려 200원까지 올랐던 일, 학교앞 분식집에서 파는 떡라면이 250원, 백반이 400원쯤 되었던 듯하고, 주머니엔 회수권과 천 원짜리 한 두장이 고작일 정도로 늘 '돈이 궁했던' 일까지도...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싶다. 내 아들이 어느새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에 다시 복학을 했으니, '한 세대가 대략 30년'이라는 말이 진정 실감이 난다. 영화 <1987>의 주인공이자 이미 고인이 된 박종철 군(1964.4.1∼1987.1.14)이나 이한열 열사(1966.8.29∼1987.7.5)도 나보다 어린 나이였는데, 그들이 의로운 죽음으로 고인이 된 지도 벌써 30년이나 지났으니 나도 결코 적게 산 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다.
영화를 '홀로' 너무 진지하게 몰입해서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몇 차례나 눈시울을 붉혔더랬다. 박종철 군의 시신을 부검하는 장면에서 삼촌이 홀로 입회하여 울먹거리는 모습이나, 시신을 화장한 뒤 차가운 얼음으로 덮인 강 위에 유골을 뿌린 박종철 군의 아버지가 끝내 강물 속으로 허우적거리며 걸어 들어가 얼음 위의 유골을 쓸어 모으며 "잘 가그래이! 철아!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 라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목이 꽉꽉 잠기기도 했다.
영화로 다시 보더라도 30년 전에 이 땅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는 여간해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이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지만, 그 시대를 온몸으로 헤쳐나온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현실은 영화보다 조금이라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고 말할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만큼 험악한 격동의 세월을 겪어 왔으니까.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로부터 꼭 30년 만에 '1987년에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던 대규모의 시위'가 서울 한복판에서 고스란히 재연되는 기적같은 일이 발생했다. 우연 치고는 참으로 놀라운 우연이었다.
우리에게 1987년이 두고 두고 재조명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주 명백하다. 한 나라의 시민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최소한의 자격이나 능력이나 양심이나 도덕성조차 갖추지 못한 무능하고 악랄한 권력자가 함부로 시민들을 다스리고 억압할 때, 그토록 부당한 권력자의 횡포에 맞서는 시민들은 언제나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고, 일단 깨어나기만 하면 그런 불의한 권력자를 내쫓을 충분한 힘과 의지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비록 아무리 큰 희생이나 고통이 뒤따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언제나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비록 30년 전에 많은 사람들의 크나큰 희생으로 얻은 결과가 고작 '대통령 직선제'일 뿐이었고, 그해 말에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의 결과가 또다른 군부 정권으로 재연장되는 어이없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 이후에 마침내 탄생한 문민정부마저 '군부정권이 저지른 온갖 죄과에 대한 충분한 단죄'에까지 이르지 못했더라도, 1987년 그날의 희생과 함성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가 바로 여기서 이만큼 살 수 있도록 만든 중대한 토대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도 영화 <1987>을 보면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30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역사를 다룬 영화 <1987>이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로부터 두루 큰 호응을 얻는 건 조금 뜩밖인데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력 덕분이지 싶다. 그것 말고도 나처럼 1987년을 직접 맞닥뜨려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층 관객들에게까지 충분한 공감을 얻게 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동안 각종 기록물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알아 왔던 '80년대의 엄혹한 군부정권 시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당시 상황들을 아주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마침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풍경들 중에는 지난 9년 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생생히 목도했던 온갖 추악하고 가증스런 일들과도 적잖이 닮아 있기도 하고.
그러나 80년대 군부정권 시절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50대의 장년층들이라면 아무래도 여느 관객들과는 감회가 사뭇 남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땐 등교를 위해 전철역에서 내려 학교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책가방을 검색당하는 게 일상사였고, 청바지에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이 수시로 교내로 진입해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해 가는 일도 너무나 자주 봤었으니까 말이다. 미국 대통령이나 교황이 방한하기라도 할라치면 많은 학우들이 긴급 수배되기 일쑤였고, 그들은 몇 달씩 변장을 하고 산사로 숨어 들어가 지내기도 했었다.
1년 쯤 전에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들고 운집했던 시위 인파가 하룻밤에만 200만 명을 넘긴 적도 있었다. 나와 같은 50대의 장년층들까지 나서서 무려 30년 만에 '다시 광장에 모여' 목청껏 '정권 퇴진'이라는 똑같은 구호를 절박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는 영화 <1987> 속에서 다시 찾아 내고 홀로 마음 속으로 흐뭇한 기분을 느꼈다. 왜냐하면 영화 <1987> 속에 나타난 대한민국의 모습에서나 2016년 겨울쯤에 우리가 보았던 대한민국의 모습에서나 둘 모두에서 명백히 발견되는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이게 나라냐' 라는 물음이었고, 그런 불의에 저항했던 몸부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1년 전 그 매서운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에서 양희은의 <상록수>와 <아침 이슬>을 감격에 겨워 함께 목놓아 따라 불렀던 많은 이들 또한 <1987>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우리들 몸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음을 알고 기뻐했음에 틀림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