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 정략론 동서문화사 월드북 9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황문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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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거기서 삶을 마감한 피렌체 토박이였다. 그래서 피렌체의 역사는 마키아벨리의 생와와 사상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피렌체는 봄의 도시이자 꽃의 도시다. 토스카나 주의 북방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알바노 산맥을 끼고, 서쪽으로 완만하게 흐르는 아르노 강이 피렌체를 적신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에트루리아가 세력을 떨치던 곳인데,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국가였던 그들도 결국 BC 4세기 무렵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만다.


피렌체는 흔히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는 이름이 붙는다.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시절은 인간의 정신이 바야흐로 '중세의 미망'에서 막 깨어나던 시기였다. 고대 로마가 멸망하고 난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확고하게 다져 놓은 '그리스도교가 모든 삶을 지배하는 세계관'에 비로소 사람들이 질문을 품고 강력하게 반기를 들던 때였다. 르네상스에 도화선을 붙인 건 페트라르카였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 단테가 마중물을 부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단테는 처음으로 '고대'를 문화생활의 전면에 힘차게 밀어넣었던 인물이었다. 페트라르카는 고전들을 예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았다. 중세 학자들이 고전들을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통합하려 애썼지만, 그는 고대의 시나 역사, 철학 등을 그 자체로 고대 문명의 '빛나는 본보기'로 이해했던 것이다.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보는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관이 '1천 년 동안이나' 맥이 끊겨 있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도 페트라르카였다.


마키아벨리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이어받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니 온갖 고전 작가와 작품들이 그를 자극했음은 당연했다. 1486년 그의 나이 17세 때,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제본했는데, 그 우연한 일 때문에 그는 리비우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뛰어난 문헌학자였던 포조 브라치올리니가 1417년에 발견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직접 필사할 정도로 고대 로마의 철학에 매료되기도 했다. 바티칸 국립 도서관에 현재 남아 있는 그 책의 필사본은 마키아벨리가 쓴 것으로 뒤늦게 확인되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때만 하더라도 이탈리아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피렌체 공국도 공화정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로, 다시 소델리니 정권에서 메디치 가문의 재집권으로 여러 차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주변의 강대국들인 프랑스,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침입도 잦았다.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동향을 예민한 감각으로 살필 수 있게 만든 건 그가 피렌체 정청에서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서기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정치 현장'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외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 로마 교황청 등으로 동분서주했으며, 14년 동안 공화정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체사레 보르자와 만나기도 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궁정에서 머물기도 했다. 특히 그가 열정을 쏟은 분야는 '군사위원회'의 사무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피렌체는 군사력을 '용병부대'에 의존했는데, 그는 언제나 '자국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창설할 것을 끊임없이 주창했다.


그가 『군주론』을 집필한 동기는 소델리니 정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자신의 면직이었다. 18년 만에 메디치가가 정권을 되찾게 되자 새 정부는 마키아벨리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고 피렌체로부터 추방시켰다. 로마 근교의 허름한 집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서재 책상 앞에서 고대 로마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직접 겪고 관찰해 왔던 현실 정치와 접목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지리멸렬한 조국의 현실과 찬란했던 고대 로마 공화정과의 간극이 너무나 컸고,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구체화함으로써 국가를 위해 훌륭한 타개책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사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쓴 책은 『로마사론』(일명『리비우스에 관한 담론』)이었다. 그 책을 통해 그는 로마 공화정의 온갖 훌륭한 법률과 제도와 군대와 인물들을 무수히 살폈다. 또한 로마가 멸망한 이후 여러 나라로 쪼개진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깊이 생각한 온갖 책략들을 현실에 투영시키기 위해서도 자신이 '활약할 무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군주론』이라는 더없이 솔직하고도 대담한 책을 써서 권력을 잡고 있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 전하를 위해 바쳤다. 그 짧은 책에는 국가의 성격, 그 종류, 유지 방법, 상실 이유 등에 대해 전례가 없을 정도로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권력'이라는 마신(魔神)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 그 책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합리주의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 정치가의 냉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국가'의 개념이나 '정치학'의 원리는 상당 부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에 뿌리를 둔 것이었지만, '근대 국가의 탄생'을 재촉시킨 마키아벨리즘이 오래된 전통적 국가관을 한 순간에 쓸데 없는 소리에 가깝도록 몰아부친 셈이었다. 이 책은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1532년에 인쇄된 이 책은 로마 교황청이 서둘러 금서에 올릴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혹자가 말한 대로,『군주론』이 겪은 역사가 그대로 유럽 정치의 역사라고 말할 정도였다. 수많은 국가들이 '자국 군대'를 강화하고, 무력을 앞세워 이웃 약소국가들을 강제로 삼키기 시작하였고, 서유럽 열강들은 멀리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까지 손길을 뻗쳐 식민지 확대에 열을 올렸다. 모스크바까지 점령했던 나폴레옹에 뒤이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 겪었던 것도 마키아벨리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마키아벨리의 영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군비 경쟁과 군사력의 극대화에 기반한 열강들의 세력 다툼은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일 뿐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군주론』의 끝부분만 보더라도 그런 증거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야만적 지배는 누구든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명예 높은 당신 일가가 정의의 싸움을 일으킬 때의 그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 책무를 담당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당신이 내건 기치 아래서 조국이 고귀하게 빛을 발하고, 당신의 편달 아래서 페트라르카의 그 말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미덕은 광포에 대하여 무기로써 맞서지 않느니. 싸움은 조용히 그만두라."고 썼으니 말이다.

『군주론』과 그 책의 저자인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는 수많은 학자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논쟁 거리였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까지 일반 사람들이 살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평범한 독자들이 마키아벨리와『군주론』을 둘러싼 오해를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법도 있다. 그가 쓴『로마사론』을『군주론』과 함께 읽는 일이다. 오랜 시간의 연구와 노력끝에 완성한 그 책을 읽어보면 마키아벨리의 참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놀랄만큼 성실하게 티투스 리비우스의『로마사』를 공부했다. 아쉽게도 리비우스의 방대하고도 탁월한 역사서인『로마사』는 지금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와 리비우스의 책과 함께 읽으면서 서로 직접 비교할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마키아벨리의『로마사론』만 읽어도 마키아벨리의 진면목은 물론 리비우스의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기에 별로 부족함이 없다. 『로마제국쇠망사』라는 불후의 대작을 남긴 에드워드 기번이 마키아벨리를 그토록 칭송했던 이유 또한 그가 남긴『로마사론』때문이었으리라.

마키아벨리가 쓴『로마사론』은 전3권(제1권 60장, 제2권 33장, 제3권 49장)에 이른 방대한 저작이다. 그 책의 핵심 주제는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정 체제의 수립 및 발전 전략'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그는 이미 『군주론』에서 군주정 체제에 관한 이론과 책략들을 충분히 서술했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전공 분야인 '로마 공화정'을 바탕으로 '공화정 체제의 우수성'과 '저해 요인 및 발전 전략'을 더없이 치밀하고도 풍성하게 펼쳐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역사를 이끈 숱한 인물들에 대해서라면 마치 그 사람들의 마음 속까지 훤히 꿰뚫는 듯한 마키아벨리의 명민(明敏)한 관찰은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숱한 장(章)에서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서』를 인용하는 대목들은 마키아벨리의 칼날처럼 예리한 분석 포인트와 절묘하게 결합한다. 수많은 군대지휘관들의 촌철살인과 같은 '명연설'은 전장의 생생한 현실로 거듭 독자들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명성을 얻는 법, 평판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법, 위험에 대처하는 법,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법, 상황에 대한 오판이 초래하는 영향들은 훌륭한 처세술을 전수받는 느낌도 갖게 만든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긴 장인 <음모에 대하여>를 읽으면 마치 제갈공명을 앞에 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군대의 규율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군주 자신의 태만과 통찰력 부족을 한탄해야 할 때는 언제인지, 나가서 싸울 것이냐 적을 끌어들여서 싸울 것이냐의 선택 문제, 진지의 구축과 요새의 필요성, 대포의 효용 등등은『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를 훨씬 더 능가할 정도로, 그가 얼마나 탁월한 전술가요, 책략가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로마사론』을 통해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핵심은 '공화정에 대한 뜨거운 옹호'와 '민중의 자유 수호'였다. <민중의 잘못은 군주의 잘못에서 생긴다>는 주장이나,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는 표현을 마주하면 그가 과연 『군주론』을 쓴 그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이다. 로마가 발전을 거듭했던 이유도 훌륭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 집정관으로 뽑히는 구조와 민중의 권리를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호민관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사령관의 지휘권 연장'을 로마 공화정 붕괴의 '시발점'으로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탁견이다. 임기 1년의 두 집정관 체제가 '현장의 필요성' 때문에 '지휘권 연장'을 편법으로 용인함으로써 그 지휘관에게 맹목적 충성을 다짐하는 장교들이 등장하게 되고, 결국 군대의 사병화가 시작되었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집정관을 맡게 된 이후에 나타난 결과는 참혹한 내전이었다.

그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경쟁하게 되었고, 소(小) 카토나 브루투스와 같은 고결한 인물들이 나타나 '공화정 수호'를 위해 분기했지만, 끝내 카이사르에게 무너지고 만 것도 결국 시대가 너무 타락했기 때문이었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진단이다. 카이사르야말로 마키아벨리에게는 '로마 인민의 자유'를 끝장내고 로마를 '노예 상태'로 전락시킨 원흉이었던 셈이다.("이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첫 번째 참주가 되고, 그에 따라 로마의 자유는 다시 되살아나지 않게 되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어찌보면 '권력의 진실'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합리적이고 덕성 높은 사람이었으며, 인간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낸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권모술수와 음모와 책략의 대가로만 인식되는 게 현실이다. 마키아벨리의 참모습을 발견한 많은 전공자들이 그 점에 대해 억울해 해도 충분한, 그런 인물이 마키아벨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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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3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는 사리분별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군주론>을 쓴 것조차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절호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 본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뇌물로 아부 떠는 것보다는 글로써 자신의 생각을 상부에게 어필하는 마키아벨리의 선택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oren 2017-03-03 15:27   좋아요 2 | URL
마키아벨리처럼 철저한 현실주의자도 보기 드물겠지요. 피렌체 공화정청에서 14년간 밤낮 가리지 않고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한 죄밖에 없는데, 하루 아침에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으니 그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싶어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불과 서너 달만에『군주론』을 후다닥(?) 완성해서 출사표를 냈지만 그게 ‘전달‘조차 되지 못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런 불운들이 도리어 불후의 명저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3-04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분열되었던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단기처방이라 생각됩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주된 사상은 <로마사론>에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군주론>과 <로마사론>을 같이 읽어야겠습니다. 한편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시 생각하니, 케인즈가 생각나네요. ‘유효수요‘ 창출을 위해 ‘정부의 재정확대‘를 주창한 그의 경제관을 생각해보면, <군주론>과 <로마사론>의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Oren님 좋은 책과 독서법 소개 감사합니다.

oren 2017-03-04 13:42   좋아요 1 | URL
『군주론』과『로마사론』의 관계를 잘 살펴보는 일이야말로 마키아벨리를 좀 더 깊게 이해하는 첩경임은 분명한 듯합니다. 두 작품에서 다룬 ‘군주정‘과 ‘공화정‘은 어쨌든 서로 모순되는 사상이니까요. 사실 그는『로마사론』을 먼저 집필하다가, 사정이 다급한 바람에 그 책 가운데 ‘군주정을 논한 부분‘만 따로 떼어내어 『군주론』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추론하는 학자들도 많은 듯합니다.(그래서 마키아벨리는『로마사론』의 여러 곳에서 ‘군주정‘에 관한 부분은 이미 ‘다른 책‘에서 충분히 언급했다는 말을 자주 내세우고 그냥 넘어갑니다. 『로마사론』에서 느껴지는 탄탄한 구조를 갖춘 건축물 같은 느낌이, ‘군주정‘을 다루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텅 빈 공간‘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칠 때처럼 휑한 느낌으로 뒤바뀌는 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어쨌든『군주론』은 ‘격동하는 정세‘ 탓인지 몰라도 그 논조가 매우 격렬한데 비해,『로마사론』은 ‘리비우스의『로마사』를 바탕으로 로마의 흥망을 마치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듯이‘ 유려하게 논하고 있어서, 전혀 다른 스타일의 마키아벨리를 만나는 느낌도 강하게 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