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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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쓴 문장들을 타고 넘는 일이 결코 쉬울 리는 없다. 어떤 문장들은 몇 번씩 다시 읽어야 겨우 그 뜻을 단지 겉으로나마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인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마치 높은 산봉우리처럼 느껴지는 억세고 가파른 문장들을 만날 때면 온갖 근육들을 다 써보아도 그 문장들을 딛고 올라서기가 몹시 힘에 부친다. 니체가 아무런 고려도 없이 그저 독자들을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런 험로와 경사와 높이를 일부러 문장 속에 숨겨놓았을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그런 문장들을 따라 험준한 산맥을 넘어가듯이 낑낑거리며 힘든 산행을 하노라면, 숨이 너무나 가빠서 자주 헐떡거릴 뿐만 아니라 가끔씩 한숨마저 내쉴 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몹시도 소화하기 힘든' 단단한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어쨌든 뒤로 물러서기 보다는 기어이 그걸 타고 넘어가 봄으로써 그 다음에 맞닥뜨릴 새로운 도전을 오히려 마음속으로 기다릴 때조차도 아예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문장들은 온갖 힘겨운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전망이 탁 트인 산마루를 올라선 느낌이 들 때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후줄근한 몸을 한순간에 식혀주는 듯한 상쾌한 휴식과 더불어 노고와 분투를 위무해 주는 듯한 따스한 격려마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겁게 휴식을 취하면서 문득 방금 지나온 가파른 산길들을 되돌아보는 일만으로도 다시금 장차 새롭게 맞닥뜨릴 여정에 대한 부푼 기대와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니체의 문장들은 읽을 수록 빠져드는 치명적인 매혹을 지니고 있다.
비록 때때로,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듯 단단한 껍질로 중무장한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고 어금니 사이에 그 열매를 무작정 들이밀 때를 연상케 하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있다.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아무리 깨무는 데 쓰이는 턱근육들에 힘을 주어본들 그처럼 단단한 열매가 쉽사리 깨질 리는 없다. 니체의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나약하게 자신의 껍질을 쉽사리 허물고 깊숙히 감춰둔 속살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성급하게 내보이리라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땐 어금니에 맡길 게 아니라 차라리 망치라는 유용한 도구를 손에 들어야 마땅할 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빨의 야만적인 힘만 믿고 어리석게도 억지로 힘으로 억누르고 깨물어서라도 껍질 속에 숨은 열매를 맛보기 위해 애를 쓰는 꼴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라도 시도해 보지 않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아주 미약하게라도 내 이빨이 그 문장들의 표면에 약간의 자국이라도 낸 것처럼 느껴지기만 하면 나로서는 충분하다고 느낄 때조차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어쨌든 다음 문장으로 꾸역꾸역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다 운이 좋을 때도 있다. 가끔씩이라도 단단한 껍질이 한순간에 와작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생기니까 말이다. 그럴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며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듯한 파도처럼 거세고 드높은 새로운 문장들과 또 싸워가며 어쨌든 앞으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득 힘겹게 지나온 길들을 한참이나 되돌아 가서, 그가 쓴 문장들을 다시금 살펴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내가 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경이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새롭게 만날 때도 있다. 그 문장들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오묘한 리듬과 심연처럼 깊은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고나서 돌연 화득짝 놀라게 되는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자였던가. 그는 이미 열 살때 작시와 작곡에 손을 댈 만큼 일찍부터 비범했다. 열여덟 나이에는 벌써 <운명과 역사>라는 거창한 작품(?)을 마치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듯 줄줄 써내려갔을 정도였다.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과 더불어, 치밀한 분석능력과 인내를 요하는 고전어에 대한 놀라운 재능, 타고난 문학적 기질들을 두루 갖춘 그가 '루터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 언어의 천재'로 불리는 게 결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싶다. 우리가 이런 평가에 선뜻 동의한다면, 니체는 '루터와 자신' 사이를 지나갔던 수많은 '독일 문학의 천재'들을 모조리 따돌린 셈이다. 심지어 자신이 아주 예외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들'로 칭송해 마지 않았던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괴테까지도!
그런데 우리는 기껏해야 그가 쓴 문장을 어렵사리 우리말로 번역한 문장밖에 접하지 못한다. 문체의 리듬뿐만 아니라 '문체의 속도'에 대해서까지도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부여할 줄 알았던 그를, 단지 가까스로 번역된 우리말로 겨우 희미하게나마 해독할 능력밖에 없는 딱한 독자들에 대해서라면, 그도 틀림없이 그런 사정에 대해 몹시 안타깝고 슬픈 표정을 지었음에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사정을 조금 더 쉽게 유추해보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저 그가 '문체의 속도'에 대해 남겼던 다음의 말을 한번 슬쩍 엿보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문체의 속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 문체의 속도라는 것은 종족의 성격에,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속도에 근거한다. 충실하게 그 뜻을 담고 있는 번역도, 본의 아니게 원전의 격조를 더럽힘으로써, 거의 위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모든 위험한 것을 뛰어넘고,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전의 대담하고 경쾌한 속도가 함께 번역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28절
이 독일 언어의 천재는 심지어 자신의 작품 속에 음악의 형식까지도 대담하게 도입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 속에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 형식을 부여했던 것이다!
빠르고 거친 음악의 속도로
니체는 이 책의 문체에 대해 여러 곳에서 계속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의 "문체는 격렬하며 자극적이고, 정교함이 가득하며, 탄력 있고 다양한 색채로 차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선악의 저편》의 서평을 쓴 비트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이 섬세한 중립적 태도와 머뭇거리며 앞으로 전진하는 움직임"의 속도로 씌어졌다면, 《도덕의 계보》는 빠르고 거친 음악적 속도로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빠르고 거친 속도로 기술함으로써 '어머어마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고, 마침내 번개가 치듯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진리가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계보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제3논문은 이와는 다소 다른 색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마지막을 장식하며 다시 반복되는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의 형식으로 더욱 대담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해설> 중에서
니체의 문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들을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는 근육이 충분히 발달된 튼튼한 팔다리뿐만 아니라 '눈과 귀' 또한 예민한 감각과 함꼐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함을 거듭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더불어, 그의 문장들은 그저 한번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힘겹게 읽고 넘어갔다고 해서 충분히 해독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낀다. 어쨌든 그의 문장들을 따라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특별한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말대로 '근면성과 우직성'도 함께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선악의 저편』을 다 읽고 나서 뒤딸린『도덕의 계보』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다시금 도돌이표도 붙지 않은『선악의 저편』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 책의 내용들을 힘겹게 필사하는 가운데, 저만치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니체의 문장들' 가운데서 발견한 다음 문장은 어쨌든 나에겐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소화가 덜 된 채로 억지로 집어삼켰던 문장들을 도로 끄집어내어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동안에 보다 부드럽게 잘근잘근 씹히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마치 소처럼 우직하게 그의 문장들을 반추하는 독자를 향해 그가 이토록 놀라운 격려의 말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더군다나, 니체의 책을 읽다가 마음 속으로 '소가 된들 어떠리...'를 읊조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만일 이 저서가 어떤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해도, 그 책임이 반드시 내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먼저 이전의 내 저서들을 읽었고 이때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내 전제를 함께 전제한다면, 이 저서는 아주 분명하다 : 사실 이전의 나의 저서들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차라투스트라' 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깊이 상처받고 또 때로는 깊이 황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 책에 통달한 자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다 :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야 그는 이 작품이 태어난 평온한 경지에, 그 태양빛 같은 밝음, 아득함, 드넓음, 확실함에 존경심을 지니고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우 잠언 형식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 그것은 사람들이 이 형식을 충분히 진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새겨 넣으며 쏟아낸 잠언은 읽는다고 해도 '해독(解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에는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경우 내가 '해석'이라 부르는 하나의 모범을 이 책 세 번째 논문에서 보였다 : ㅡ 이 논문의 맨 앞에는 하나의 잠언이 놓여 있으며, 논문 자체는 이에 대한 주석이다. 물론 이와 같이 읽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는 가장 잘 잊혀진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ㅡ 이렇게 잊혀졌기 때문에 내 저서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ㅡ .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 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는 되새김하는 것[反芻]을 말한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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