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라는 산맥을 타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힘을 단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 *

 

니체가 쓴 문장들을 타고 넘는 일이 결코 쉬울 리는 없다. 어떤 문장들은 몇 번씩 다시 읽어야 겨우 그 뜻을 단지 겉으로나마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인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마치 높은 산봉우리처럼 느껴지는 억세고 가파른 문장들을 만날 때면 온갖 근육들을 다 써보아도 그 문장들을 딛고 올라서기가 몹시 힘에 부친다. 니체가 아무런 고려도 없이 그저 독자들을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런 험로와 경사와 높이를 일부러 문장 속에 숨겨놓았을 리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어쨌든 그런 문장들을 따라 험준한 산맥을 넘어가듯이 낑낑거리며 힘든 산행을 하노라면, 숨이 너무나 가빠서 자주 헐떡거릴 뿐만 아니라 가끔씩 한숨마저 내쉴 때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몹시도 소화하기 힘든' 단단한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어쨌든 뒤로 물러서기 보다는 기어이 그걸 타고 넘어가 봄으로써 그 다음에 맞닥뜨릴 새로운 도전을 오히려 마음속으로 기다릴 때조차도 아예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문장들은 온갖 힘겨운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전망이 탁 트인 산마루를 올라선 느낌이 들 때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후줄근한 몸을 한순간에 식혀주는 듯한 상쾌한 휴식과 더불어 노고와 분투를 위무해 주는 듯한 따스한 격려마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겁게 휴식을 취하면서 문득 방금 지나온 가파른 산길들을 되돌아보는 일만으로도 다시금 장차 새롭게 맞닥뜨릴 여정에 대한 부푼 기대와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니체의 문장들은 읽을 수록 빠져드는 치명적인 매혹을 지니고 있다.

 

비록 때때로,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듯 단단한 껍질로 중무장한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리고 어금니 사이에 그 열매를 무작정 들이밀 때를 연상케 하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있다. 호두를 깨트리기 위해 아무리 깨무는 데 쓰이는 턱근육들에 힘을 주어본들 그처럼 단단한 열매가 쉽사리 깨질 리는 없다. 니체의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나약하게 자신의 껍질을 쉽사리 허물고 깊숙히 감춰둔 속살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성급하게 내보이리라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땐 어금니에 맡길 게 아니라 차라리 망치라는 유용한 도구를 손에 들어야 마땅할 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빨의 야만적인 힘만 믿고 어리석게도 억지로 힘으로 억누르고 깨물어서라도 껍질 속에 숨은 열매를 맛보기 위해 애를 쓰는 꼴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렇게라도 시도해 보지 않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아주 미약하게라도 내 이빨이 그 문장들의 표면에 약간의 자국이라도 낸 것처럼 느껴지기만 하면 나로서는 충분하다고 느낄 때조차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어쨌든 다음 문장으로 꾸역꾸역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다 운이 좋을 때도 있다. 가끔씩이라도 단단한 껍질이 한순간에 와작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생기니까 말이다. 그럴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며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듯한 파도처럼 거세고 드높은 새로운 문장들과 또 싸워가며 어쨌든 앞으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득 힘겹게 지나온 길들을 한참이나 되돌아 가서, 그가 쓴 문장들을 다시금 살펴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땐 내가 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경이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새롭게 만날 때도 있다. 그 문장들 속에 깊이 숨겨져 있던 오묘한 리듬과 심연처럼 깊은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고나서 돌연 화득짝 놀라게 되는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자였던가. 그는 이미 열 살때 작시와 작곡에 손을 댈 만큼 일찍부터 비범했다. 열여덟 나이에는 벌써 <운명과 역사>라는 거창한 작품(?)을 마치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듯 줄줄 써내려갔을 정도였다.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과 더불어, 치밀한 분석능력과 인내를 요하는 고전어에 대한 놀라운 재능, 타고난 문학적 기질들을 두루 갖춘 그가 '루터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 언어의 천재'로 불리는 게 결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싶다. 우리가 이런 평가에 선뜻 동의한다면, 니체는 '루터와 자신' 사이를 지나갔던 수많은 '독일 문학의 천재'들을 모조리 따돌린 셈이다. 심지어 자신이 아주 예외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들'로 칭송해 마지 않았던 극소수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괴테까지도!

 

그런데 우리는 기껏해야 그가 쓴 문장을 어렵사리 우리말로 번역한 문장밖에 접하지 못한다. 문체의 리듬뿐만 아니라 '문체의 속도'에 대해서까지도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부여할 줄 알았던 그를, 단지 가까스로 번역된 우리말로 겨우 희미하게나마 해독할 능력밖에 없는 딱한 독자들에 대해서라면, 그도 틀림없이 그런 사정에 대해 몹시 안타깝고 슬픈 표정을 지었음에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사정을 조금 더 쉽게 유추해보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저 그가 '문체의 속도'에 대해 남겼던 다음의 말을 한번 슬쩍 엿보는 것만으로도 아마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문체의 속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 문체의 속도라는 것은 종족의 성격에,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속도에 근거한다. 충실하게 그 뜻을 담고 있는 번역도, 본의 아니게 원전의 격조를 더럽힘으로써, 거의 위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모든 위험한 것을 뛰어넘고,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전의 대담하고 경쾌한 속도가 함께 번역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28절

 

이 독일 언어의 천재는 심지어 자신의 작품 속에 음악의 형식까지도 대담하게 도입했던 것이다. 자신의 작품 속에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 형식을 부여했던 것이다!

 

빠르고 거친 음악의 속도로

 

니체는 이 책의 문체에 대해 여러 곳에서 계속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저서의 "문체는 격렬하며 자극적이고, 정교함이 가득하며, 탄력 있고 다양한 색채로 차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선악의 저편》의 서평을 쓴 비트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악의 저편》이 섬세한 중립적 태도와 머뭇거리며 앞으로 전진하는 움직임"의 속도로 씌어졌다면, 《도덕의 계보》는 빠르고 거친 음악적 속도로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빠르고 거친 속도로 기술함으로써 '어머어마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고, 마침내 번개가 치듯 "두꺼운 구름 사이에서 하나의 새로운 진리가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계보의 마지막을 구성하는} 제3논문은 이와는 다소 다른 색조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마지막을 장식하며 다시 반복되는 '피날레Finale'와 '론도Rondo'의 형식으로 더욱 대담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니체는 말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해설> 중에서

 

니체의 문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매력들을 온전히 맛보기 위해서는 근육이 충분히 발달된 튼튼한 팔다리뿐만 아니라 '눈과 귀' 또한 예민한 감각과 함꼐 충분히 열려 있어야 함을 거듭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더불어, 그의 문장들은 그저 한번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힘겹게 읽고 넘어갔다고 해서 충분히 해독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느낀다. 어쨌든 그의 문장들을 따라 읽으려면 어쩔 수 없이 특별한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의 말대로 '근면성과 우직성'도 함께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선악의 저편』을 다 읽고 나서 뒤딸린『도덕의 계보』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다시금 도돌이표도 붙지 않은『선악의 저편』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그 책의 내용들을 힘겹게 필사하는 가운데, 저만치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니체의 문장들' 가운데서 발견한 다음 문장은 어쨌든 나에겐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소화가 덜 된 채로 억지로 집어삼켰던 문장들을 도로 끄집어내어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동안에 보다 부드럽게 잘근잘근 씹히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마치 소처럼 우직하게 그의 문장들을 반추하는 독자를 향해 그가 이토록 놀라운 격려의 말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을 줄은 차마 몰랐다. 더군다나, 니체의 책을 읽다가 마음 속으로 '소가 된들 어떠리...'를 읊조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

 

만일 이 저서가 어떤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해도, 그 책임이 반드시 내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먼저 이전의 내 저서들을 읽었고 이때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내 전제를 함께 전제한다면, 이 저서는 아주 분명하다 : 사실 이전의 나의 저서들은 그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차라투스트라' 에 관해 말하자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때로는 깊이 상처받고 또 때로는 깊이 황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 책에 통달한 자라고 나는 인정할 수 없다 : 이러한 경험을 한 후에야 그는 이 작품이 태어난 평온한 경지에, 그 태양빛 같은 밝음, 아득함, 드넓음, 확실함에 존경심을 지니고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경우 잠언 형식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 그것은 사람들이 이 형식을 충분히 진중하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새겨 넣으며 쏟아낸 잠언은 읽는다고 해도 '해독(解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비로소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에는 해석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경우 내가 '해석'이라 부르는 하나의 모범을 이 책 세 번째 논문에서 보였다 : ㅡ 이 논문의 맨 앞에는 하나의 잠언이 놓여 있으며, 논문 자체는 이에 대한 주석이다. 물론 이와 같이 읽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날에는 가장 잘 잊혀진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ㅡ 이렇게 잊혀졌기 때문에 내 저서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 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ㅡ . 이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 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는 되새김하는 것[反芻]을 말한다 ……

 

 -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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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0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서문을 보니, 오만할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있네요. 니체의 원전을 언젠가는 혼자서 음미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직은 해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시적 은유와 서사는 철학을 문학처럼 생각하게 만든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뭏든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철학이기도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철학이 니체의 철학이죠. *^

oren 2016-02-21 01:21   좋아요 0 | URL
니체는 오만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위험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철학자라고 부르는 게 좀 더 정확하지 싶습니다. 사실 그로부터 망신이나 조롱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지요. 그에게 혼쭐이 났던 인물들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세 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유대인 여자(나자렛의 예수와 어부 베드로, 양탄자를 짜는 바울,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가장 대표적인데, 그들 말고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칸트,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철학자들도 니체의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었지요. 그러니 `저 돌대가리`로 불렸던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가령 이 책에서만 하더라도, 베이컨, 홉스, 로크, 다윈, 허버트 스펜서, 칼라일, 빅토르 위고 등등)은 니체로부터 얼마나 호되게 당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지요. 사람뿐만 아니라 숱한 책들도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심한 조롱을 당한 책 또한 《성서》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누가복음>,<마태복음>,<로마서>,<요한복음>,<데살로니가전서> 등을 조목조목 빗대어 조롱한 대목들은 『도덕의 계보』 <제1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답니다.
* * *
ㅡ 그들에게 삶의 온갖 고통에 위로가 되는 것 ㅡ 미리 상정하는 미래의 축복의 환상을 그들은 어떻게 부르는가?
ㅡ ˝무엇이라고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입니까? 그들은 그것을 `최후의 심판`, 그들 나라, 즉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부릅니다 ㅡ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그들은 `믿음 속에서`, `사랑 속에서`, `희망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ㅡ 충분하다! 충분하다!

- 『도덕의 계보』, <제1논문 :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중에서

탕기 2016-02-2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의 말씀처럼, 니체는 소가 되어 묵묵히 밭을 가는 독자의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 어떤 외경의 영토에 있는 사람입니다. 무척 공감합니다. 가볍게 뛰어넘는 니체 관련 저서들을 보다가 그 책들을 던져버린 기억이 떠오르네요. 하물며 니체를 읽고 자랑질하는 사람들의 글은,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고명섭 씨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생을 한 번 들여다보고 예의 책들을 다시 읽어볼 참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수가 추천했던 것처럼 莊子를 읽고 카잔차키스를 읽어야겠고요. 미약한 머리로나마 지금껏 생각해온 니체의 위대함이란, 그 시작은 문헌학에서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는 아무런 인용도 없이 광인처럼 말을 내뱉어 그걸 읽는 사람들을 뒤흔들었던 것일 테고요.
나이의 문제일 뿐이라고 위무해봅니다만, 솔직히 저는 아직 Oren님처럼 니체를 되새김질 하는 작업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욕지기가 이는 때도 있는 걸요... 필사를 한 번 해볼까요? 저는 그다지 성실한 사람이 아니니, 모르겠습니다. 내공의 차이일 테지요. 오랜만에 니체에 관한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소가 배부르니, 다시 밭일을 하러 가야할 것 같습니다.^^

oren 2016-02-21 15:15   좋아요 0 | URL
탕기 님 반갑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니체의 책들을 틈날 때마다 조금씩 훔쳐볼 때가 있었는데, 그의 문장들이 너무나 격렬하고 힘찬 데 놀라서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 싶은 두려움과 외경을 느낀 적이 있었답니다. 마치 북한산 인수봉도 올라가 보지 못한 주제에 감히 히말라야의 눈 덮힌 고봉들을 쳐다본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꾸역꾸역 다른 책들을 읽다가 뒤늦게 만난 니체는 확실히 예전보다는 덜 두렵더군요. 그의 책 속에서 예전에 이미 봐 왔던 친근한 인물들을 더러 만날 수 있어서 그런 느낌이 더하는 듯싶기도 합니다.

니체를 읽는 매력은 암튼 그의 문장 속에 깊숙하게 숨어 있는 `니체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온갖 함의들`을 재삼 발견해 내는 기쁨에 있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류의 천재들이 생산해 낸 온갖 위대한 문헌들`을 온통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던 인물이니까요. 특히 저는 그가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온갖 작품들에 대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심오한 깊이와 이해를 드러낼 때마다, 그에 대해 경이를 넘어 경외감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더군요.

암튼 탕기 님께서도 `쟁기를 깊이 박은` 농부가 부지런한 소를 앞세우며 몰고 가듯이, `재 너무 사레 긴 밭들을` 부지런히 갈아 엎기를 바랄께요~~

yamoo 2016-02-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의 속도가 콱 박히는 군요!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한다노 인상깊어요~

니체를 읽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베르그손이 끝나면 니체를 읽어야 겠습니다!

oren 2016-02-26 14:46   좋아요 0 | URL
철학자들의 문장들이 어디 예사롭지 않은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니체의 문장들 만큼 `절창`인 경우는 드물지 싶어요. 그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가끔씩은 다양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답니다. `그가 지금 바로 내 옆에 앉아있다고, 혹은 서서 뜨거운 목소리로 소리 높여 외친다고` 그려보며 읽는다는 얘기이지요. 그렇게 상상하면서 읽을 때라야 겨우 희미하게나마 그의 문체의 속도나 높낮이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