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사이
알라딘이 가끔씩 놀라운 마법을 부리는 건 나도 이미 몇 차례 겪어 봐서 조금쯤은 안다고 생각한다. 북플도 그럴까? 물론 그 요물(?)을 쓰기 나름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스맛폰을 무슨 '병맛'처럼 여기고 2G폰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SNS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니, 북플을 무슨 밥상 끄트머리에 붙은 밥풀떼기처럼 취급하는 사람들도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병맛'이 무슨 뜻이냐고? 나도 정확한 뜻을 몰라 이번에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확실히 알았다. ㅋ
병맛은 대한민국의 인터넷 유행어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병신 같은 맛'의 줄임말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주로 대상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위키백과)
내가 북플을 쓰면서 이번에 잠깐 놀랐던 건 순전히 내 스스로 '자가 발전'을 너무 하다 보니 생긴 일이다. 내가 스스로 발전소를 돌릴 생각까지 품은 건 아무래도 북플을 사용하는 동안에 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감시관의 시선을 너무 크게 의식한 탓으로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하등 그런 쓸데 없는 짓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직결된 문제가 바로 북플에서 내가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하나와 오래도록 연결되어 있었다. 그 코너에 가면 북플 소속 감시관이 자꾸만 나를 구석으로 몰아붙인 채 따지듯 묻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감시관은 나만 보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만 반복한다.
'당신이 읽은 책은 도대체 몇 권이오?'
그래서 나는 그 코너에 가기가 싫다. 내가 읽은 책이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도 모르게 가끔씩 그 구석을 또다시 살핀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고민한다. 뭐, 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그래서 나는 맨 처음엔 '내가 읽은 책이 이것 말고 또 뭐가 없을까'를 한동안 열심히 찾아보았다. 연목구어가 따로 없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너무 적었다. 이래 저래 끌어 모아봐도 사백 권이 채 되지 않았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도 있는데 그것밖에 안 되다니! 정말 내가 생각해 봐도 너무 억울했다. 그렇다고 여태 읽지도 않고 빼곡히 쟁여둔 책들한테까지 낮짝도 붉히지 않고 '읽음 표시'를 떡하니 붙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날 가만히 살펴 보니 북플은 고맙게도 '영화'에 대해서도 '읽은 책'에 포함시켜주는 놀라운 아량을 베풀고 있었다. 옳커니! 그래서 '내가 본 영화들'을 끙끙거리며 겨우 떠올리고 나서 착실히 '읽음 표시'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진척시키고 나서 겨우 '오백 권 남짓' 읽었노라는 새로운 성적표를 감시관에게 내밀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뭔가 좀 부족했다. 내가 보고도 '읽음표시'까지 진척시키지 못한 '나머지 영화들'도 결코 적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그 녀석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가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그런 시시한 작업을 위해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까지 사 볼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하겠고 말이다.
누가 말했던가.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아무튼 나는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러니까 그물코가 매우 엉성한 그물을 들고 고기잡이에 나선 한심스러운 어부와 같은 심정으로, '어떤 막연한 참조'를 살펴가며 내가 본 영화들을 조금씩 더 발굴해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엉성한 작업으로도 내가 당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 그 작업의 증거가 바로 다음 사진이다.
검은 볼펜으로 쓴 영화들은 이미 내가 옛날에 '읽음 표시'를 붙여 놓았던 작품들이다. 대충 떠오르는 대로, 그러니까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아직까지도 손 대지 않고 내버려둔 영화들이라고나 할까. 청색 플러스펜으로 쓴 영화들은 이번에 새로 고된 작업(?)을 한 끝에 간신히 건져올린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매우 놀랍고도 쓸 만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그 물건을 본 순간, 나는 마치 요정이 튀어나오는 요술램프를 그물로 건져올린 심정을 맛보는 듯했다. 춘원 이광수의 원작 소설을 신상옥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최은희씨가 그 영화의 주연 여배우로 등장했던 《무정》이라는 아주 오래된 물건(?)이 내 눈에 번쩍 뜨인 것이다. 아... 나는 《무정》이라는 그 영화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같은 소설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유정》이라는 작품을 아주 오래 전에, 그것도 매표원이 버젓이 입구에 버티고 앉아 있는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 그 영화를 본 게 도대체 언제였던가. 북플은 참으로 '별 일'을 다 새삼스레 나에게 떠올려주는구나 싶었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 마을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그래도 읍내에 올라가면 허름한 극장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게 어디 꼬맹이가 쉽사리 다가설 만한 장소던가. 언감생심이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가끔씩 우리 마을에도 영화가 상영되는 날이 있긴 있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마을을 지금 다시 떠올려 보면 마치 <웰컴 투 동막골>의 배경과도 조금은 겹칠 정도로 매우 한적한 시골이었다. 그땐 '영화차'라는 게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날엔 오후부터 영화차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오늘 저녁에 영화가 상영될 예정임'을 미리 알려줬다. 말하자면 관객에게 직접 다가가 호소하는 놀라운 홍보작전을 펼쳤던 셈이었다.
우리는 그 영화차를 무척이나 반겼더랬다. 영사기를 싣고 다니던 그 영화차는 참으로 볼거리가 많았다. 그 영화차가 영화를 상영할라치면 커다란 바퀴 같은 걸 꺼내 놓고 치르르르~ 소리를 내면서 그걸 돌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눈부신 빛을 바퀴 바로 뒤에서 커다란 천을 향해 비추기 시작하면 '별천지 같은 세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찾아 오는 그 영화차를 발견하는 날이면 우리는 너무나 신이 나서 그 영화차의 꽁무니를 온종일 졸졸 따라다녔다. 스크린은 광목으로 만든 엄청나게 큰 천이 대신했다. 어떨 땐 마을 분교에 있는 교실 한 쪽 벽면에 그 광목천이 펼쳐졌고, 또 어떨 땐 마을 한복판에 있는 잔디가 무성한 풀밭 한켠에 서 있는 전봇대를 한쪽 기둥으로 삼아서 펼쳐지기도 했다. 그 때 본 영화들은 주로 박노식, 김희갑, 황정순씨가 단골로 출연했던 <팔도강산> 같은 작품들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대형 화면으로 봤던 그 영화들은 내용이야 어쨌든 나에겐 너무나 신기하고도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갑자기 또 생각났다. 허장강이 등장하는 영화도 두엇 봤던 듯하다. 입소문 빠른 형들한테서 그런 정보가 미리 돌고 있는 게 내 귀에까지 닿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밤엔 허장강이 나온대~ 무지 재밌겠다"는 식이었다. 그 형들은 그때마다 '허장강식 액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바로 우리에겐 헐리웃 액션 스타였던 셈이다. 그 분이 바로 64년생 영화배우 허준호의 선친이니 참 까마득한 옛날 얘기다.
이야기가 자꾸만 옆길로 샐려고 몸부림을 친다. 다시 돌아가자. 영화 《유정》을 본 날은 중간고사가 끝난지 며칠 지나지 않은 따스한 봄날 늦은 오후였다. 학교에서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희망자에 한해서 자율적으로 '단체 영화관람'을 시켜줬는데 그때 본 영화가 바로 《유정》이었다. 내가 '성인들'만 드나드는 곳인 줄로만 알았던 '영화관'을 난생 처음으로 들어가 본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영화관 앞에서 시커먼 교모와 교복 차림으로 줄을 서 있는 동안에도 괜히 흥분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그것도 일종의 가슴떨리는 첫경험이었으니 당연지사였다.
읍내에서 시오리나 떨어진 시골 농촌 마을에 살았던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그 영화를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일이 태산처럼 험난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금새 날이 저물 테고, 읍내에서 우리 마을까지 가는 길은 자갈 투성이 신작로를 따라 가더라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나마 지름길을 택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갈 길'이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름길이라고 해봐야 읍내에서부터 걸어가자면 신작로를 반쯤은 걷고 난 뒤에야 겨우 고를 수 있는, 별반 사정이 나을 것도 없지만 그나마 시간만 조금 덜 걸리는 산길일 뿐이었다. 그 길은 중간에 보(湺)를 한 번 건너야 했고,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휘돌아 걷노라면 중간에 '늘 겁이 좀 나는'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야했다. 가슴을 졸이며 간신히 그 무서운 길을 지나가더라도 또다시 길게 이어지는 논둑길을 지나야 했고, 다시 한번 돌다리로 된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러고도 또다시 자갈이 잔뜩 깔린 신작로를 얼마쯤 더 걸어야 겨우 마을에 도달할 만큼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그 지름길은 훤한 대낮에는 우리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녔던 등하교길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우리는 내내 그 길로 학교를 다녔었다. 봄철 하교길엔 더러 참꽃도 따 먹었고 보리둑도 따 먹었다. 가을엔 더러 콩서리도 해 먹었고, 아주 가끔씩은 점심도시락도 등교길에 미리 까먹을 때조차 있었다. 그런 낭만들은 모두 그 '지름길'에서만 가능했다. 신작로는 온통 자갈길이었고 온통 먼지투성이였으니 그럴 여지가 별로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지름길을 가로등도 하나 없고 인적조차 완전히 끊어진 캄캄한 밤에 홀로 지나가는 일은 참으로 대담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동행을 구할 수밖에.
영화 <유정>을 함께 보자는 내 꼬드김에 넘어간 그 친구는 흔쾌히 나와 동행해 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아예 관심도 없었지만 그 친구는 나처럼 호기심도 많고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이미 그 친구와는 '비슷한 전례'를 만든 일도 한 번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던 분교를 졸업하고 5학년부터 읍내에 있는 본교(本校)로 학교를 다닐 때였다. 읍내엔 전기도 들어왔고, 우리반 아이들 중엔 몹시 드물긴 하지만 자기네 집에 TV가 있다는 녀석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정>을 같이 보게 된 그 시골 친구와 함께 'TV가 있는' 읍내 친구 녀석의 집으로 'TV 자체를 구경하러' 가게 되었다. 그것도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일이었다. 물론 TV는 저녁 무렵부터 방송이 나왔고, 우리 둘은 부잣집 친구 녀석의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까지 얻어 먹고 어린이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즐겨 보는 '연속극'까지도 난생 처음으로 '구경'했었다. 그리고 밤 늦게 깜깜한 밤길을 걸어서 무려 밤 9시가 넘어서야 우리 마을에 돌아왔다. 물론 우리 둘은 어른들로부터 엄청나게 혼이 났다. 동네에서 '애들 둘이 학교에 갔다가 밤이 늦도록 집에 오지 않고 있다'면서 온통 난리가 났었던 모양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깜깜한 밤에 '횃불'을 여러 개 만들어 동구밖을 벗어나 읍내 쪽으로 다가오던 길에 우리 둘을 찾아냈으니 사정이 오죽 했겠는가.
어쨌든 그 친구와 나는 컴컴한 영화관으로 들어가서 영화 <유정>을 감상(?)했는데, 그 내용이 도대체 우리에게는 영 다가오질 않았다. 지금에서야 다시 '내가 봤던 최초의 극장 영화'를 자세히 살펴 봤더니, 그 영화는 1976년 4월 24일에 개봉된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가 맞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때가 바로 중2 때 봄이었구나 싶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해 여름방학때' 일이 또하나 불쑥 떠오른다.
그해 여름방학때 국어 선생님은 '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한 편씩 써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숙제로 내 주신 작품들이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한국 단편 문학 전집에 단골로 나오는 작품들인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광염 소나타>,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이 '숙제 범위'였다. 그런 작품이 실린 책조차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독후감을 쓰란 말인가. 참으로 난감했다. 마침 내 짝이 '박사 마을'로 유명한 주실마을에 사는 아이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친구는 조지훈 시인을 배출한 바로 그 마을에 살았고 성씨도 마침 한양조씨여서 시인과는 '같은 집안'이었다. 자기네 친척집에 가면 '책이 많다'고도 하였다. 그런 소설들이 실린 책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나는 그해 여름 방학도 다 끝나갈 무렵이던 광복절 즈음에 <유정>을 함께 봤던 그 친구와 함께 '책을 빌리러 주실마을을 함께 다녀오자'고 꼬드겼다. 그 친구도 흔쾌히 동의했고, 그 친구와 나는 거의 '삼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다녀왔다.
<감자>와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이 실린 단편문학전집을 빌리기 위해 아침 나절에 길을 나선 우리는 앞서 얘기한 바로 그 '지름길'을 통해 읍내까지 걸었고, 거기서 다시 시오리쯤 더 떨어진 주실 마을까지도 내내 걸어서 갔다. 그 마을에 도착할 때쯤에는 거의 한낮이 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깊은 소(沼)가 딸린 절벽에서 벌거벗은 채 강물로 텀벙텀벙 뛰어내리는 모습들이 먼발치에서도 훤히 보였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더위를 피해 한가로이 앉아 계시는 동네 어르신들께 길을 물어 내 짝의 집을 찾았고, 그 친구는 친척집에서 빌려 놓은 책을 내게 선뜻 빌려주었다. 우리 둘은 대여섯 권이나 되는 두툼한 그 책을 두세 권씩 나눠 안고 다시 우리 마을까지 걸어서 되돌아왔다.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집 마당에는 작두로 썰어 놓은 풀들이 산더미처럼 한마당 가득 쌓여 있었다. 어르신들이 합동으로 퇴비를 만들기 위해 풀베기 작업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그 친구와 나는 빌린 책들을 마루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놓고 나서 곧바로 풀더미 위로 맘껏 몸을 내던졌다. 코끝으로 가득 밀려드는 풀향기가 그때만큼 달콤하게 느껴지던 때도 없었다. 그렇게 뜨겁던 한여름 무더위도 차츰 식는 중이었다. 친구와 나는 풀더미 위에서 아예 큰 대자로 팔을 벌리고 누운 채 어느새 물들기 시작하는 저녁 구름 노을들을 기분좋게 감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해 여름 방학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 또다시 내 이야기가 옆으로 길게 새고 말았다. 다시 <유정>으로 돌아가자. 그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내 친구와 나눈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영화가 하나도 재미없다, 그치?"
"응, 나도 그렇더라."
그 친구와 나는 더 이상 '영화'에 대해 할 얘기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날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떨어지는 불호령을 감수해야만 했다. 학생 주제에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영화'를 본다고 밤이 늦도록 집에도 오지 않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꾸지람이었다. 물론 나도 그런 호된 질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다행히 나는 공부를 매우 잘하는 모범생 이미지를 착실히 쌓아 온 덕분에 더 이상 크게 혼이 나지는 않았다. 나도 애시당초에 그쯤은 혼 날 각오를 미리부터 해놓고 영화를 봤었다. 극장에서의 첫 영화 관람은 그렇게 비참한 결말로 끝난 셈이었다.
내 생애 두 번째로 봤던 영화는 서부극 <돌아온 쟝고>였다. 도내에서도 입시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던 고등학교에 입시 원서를 냈던 나는 안동에 사시던 작은 외삼촌네 집에 머물며 고입 시험을 봤었다. 어쨌든 '고입 시험'을 보고 나서 내 머리에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안동까지 나왔으니, 무슨 영화라도 한 편 볼까' 하는 것이었다. 안동시내는 과연 시골 읍내와는 영 달랐다. 크고 깨끗한 영화관에서 본 <돌아온 쟝고>는 고입 시험이 끝나고 난 뒤의 후련함을 맛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영화였다. 시험을 마치고 난생 처음으로 대중 목욕탕까지 다녀온 후였으니 그런 기분이 훨씬 더했다.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내가 중2때였다. 그러고 보니 중2때 참 여러가지 일들이 많이 있었구나 싶다. 그때까지도 희미한 호롱불에 의지해서 앉은뱅이 책상에서 공부를 했던 나는 60 촉짜리 전구에 처음으로 불이 들어온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전구에서 쏱아져나오는 불빛은 한낮의 태양보다도 더 눈이 부실 지경이었으니까. 전기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종갓집부터 들여놓기 시작한 'TV'가 차츰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을 저녁때마다 엄청나게 끌어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경거리라고는 당최 구경하기가 힘든 시골 마을이었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골인들 안 그랬겠는가. 백여 호 가까이 살던 우리 마을에 TV가 고작 몇 대밖에 없다 보니 저녁을 먹고 조금만 어영부영하다 보면 'TV' 앞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땐 TV에도 다리가 달려 있었다. 바로 그 TV의 다리 옆, 그러니까 거의 사각지대에서 TV를 보는 일도 잦았다.
차츰 소득이 늘어나면서 TV가 두세 집 건너 한 대씩 깔릴 무렵에 마침내 우리집에도 TV가 들어앉았다. 다리도 달리고 미닫이 문까지 어엿이 딸린 이코노 테레비였다. 그 때 즐겨봤던 프로그램은 최불암씨 주연의 <수사반장>과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된 라시찬씨 주연의 <전우>였다. 나는 그 프로그램들 말고도 MBC '주말의 명화'와 KBS '명화극장'을 아주 즐겨 봤었다.
주말에 가까울 무렵만 되면 이미 작고한 영화평론가 정영일씨가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나타나서 '영화 소개'를 잊지 않았는데, 그 짧은 예고편의 말미에 그가 항상 덧붙이던 상투적인 코멘트인 "이 영화, 절대 놓치지 마세요" 하던 말이 어찌나 강력하게 다가오던지 그런 영화를 놓치면 평생 다시는 못볼 줄 알았다. 그 당시 TV로 봤던 그 많은 영화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내 기억 속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버티고 있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도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영화들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내가 까마득한 옛날에 봤던 그 흑백 TV는 매달 사용료를 내야 하는 비싼 공청 안테나를 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간해서는 화면이 깨끗하게 나오지 않았고, 화면뿐만 아니라 소리마저도 치지직 거리면서 애를 먹일 날이 많았다. 그래서 허구헌 날 안테나가 매달려 있던 우리집 뒷켠에 있던 감나무에 기어 올라가 그걸 붙잡고 '형! 잘나와?' 하면서 연신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려대기 바빴다. 그렇게 고생을 하며 겨우겨우 봤던 영화들 가운데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과 같은 작품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지금에서야 문득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고등학교때 봤던 영화는 아예 단 한 편도 없었던 듯하다. <돌아온 쟝고>는 엄밀히 말하자면 '중3과 고1 사이'에 본 영화였다.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오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영화를 정말 마음편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성인영화까지도. 그런 얘기들까지 마저 길게 늘어놓게 되면 내 얘기가 끝이 없을 듯하다. 무슨 <1001 야화>를 흉내낼 일도 아니고, 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세헤라자데처럼 목숨이 위태로울 일도 아니니 대략 이쯤에서 서둘러 글을 마무리지어야 옳지 싶다. 어느새, 그 '사이'에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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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글 제목이 왜 '무정과 유정 사이' 냐고요? <무정>이라는 영화는 이제사 알고 보니 무려 1962년에 나온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더라구요. 그해는 마침 제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유정>은 그보다 14년 뒤인 1976년에 나온 '12세 관람가' 영화였고요. 그러니 그 두 영화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 말하자면 춘원 이광수의 소설이 원작으로 쓰였다는 점 말고는 대체로 '뭔가 적잖은 차이'부터 인식되기 마련이라는 점이 우선 저를 자극했지요. 그건 단순히 두 영화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차이, 즉 무슨 정(情)이 얼마나 있고 없고를 넘어서는 다른 많은 문제들을 함축할 수도 있는 제목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고요. 그러니 저 제목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미 '제법 많은 여러 현실적인 사이 혹은 차이들'까지도 두루 담아낼 수 있겠다는 주제넘은 욕심까지도 부려볼 수 있었던 셈이지요.
제가 오로지 북플 때문에 아주 오랜 옛날에 봤던 영화들까지 '엄마 찾아 삼만리' 식으로 찾아 나선 끝에, 마침내 내가 태어나던 해에 태어난 영화 <무정>을 발견한 걸 계기로 다시 <유정>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또다시 까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온갖 추억들을 무슨 케케묵은 보따리를 풀어헤치듯 여기에 한꺼번에 쏟아내 놓은 일들도, 결국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한 느낌의 <무정>이라는 영화와, 도리어 나와는 절실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느낌의 <유정>이라는 영화 사이에 느껴지는 '어떤 기묘한 사이' 또는 '어떤 상당히 동떨어진 거리'가 발판이 되어 이뤄진 일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을 품었다는 얘기입지요.
달리 말하자면 북플은 제게는 어쩌면 <무정>에 가까운 사물이지만, 북플이 떠올린 과거의 여러 추억들은 <유정>과 더욱 닮은 사물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이 글은 <무정>이라는 다소 엉뚱한 영화가 촉발한 이야기이고, 주된 재료는 어디까지나 <유정>이라는 영화라는 점, 그리고 그런 옛 추억을 떠올리는 일에 있어선 꽤나 여러 '사이'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저런 글제목을 선택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지요. 가령 <유정>이라는 영화를 함께 봤던 나의 오랜 고향 친구와 저와의 '사이' 또는 그와 나와의 '친구 사이' 자체의 변화, 즉 '과거와 현재 사이에 알게 모르게 저만치 벌어진 사이' 또한 저로서는 결코 빼놓기 어려운 또 하나의 고려 요소였다는 점도 저 '사이'를 글제목에서 도저히 배제하기 어렵게 된 요인이라는 말이지요.
이 글의 내용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듯한 저 애매모호하고도 미흡하게만 느껴지는 제목을 제가 굳이 이 글의 제목으로 최종적으로 선택하기까지에는 물론 이것보다 더 많은 고민이 있었음을 여기서라도 털어놓지 않고는 베겨나기 어려울 듯하네요. 저런 엉성한 제목을 달기 전부터 다른 유력 후보가 아예 없었던 건 결코 아니었답니다. 마침 예전에 한번 '책과 영화 사이'라는 글을 쓴 일도 떠오르고 해서, 이번엔 또다른 뜻으로 '책과 영화 사이 Ⅱ'라는 별반 흥미도 없을 듯한 속편 성격의 글까지도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는 얘기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글들이 무슨 흥미로운 영화의 속편도 아닌 주제에 감히 그런 턱도 없는 흉내를 낸다는 것 또한 우스운 꼴에 지나지 않는다 싶더군요.
그래서 결국 적잖은 방황 끝에 저런 황당하면서도 글 내용을 미리 가늠하기도 어려운, 더군다나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왜 도대체 저런 제목을 달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계속 머릿속에 남게 되는, 그런 한심스런 제목을 달게 되었다는 변명을 이토록 길게 늘어놓고 있는 셈이지요.
아무튼 요즘 제가 카프카에 푹 빠져서 그의 소설들을 붙잡고 좀처럼 놓질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하나도 마저 알려드리고 싶군요. 아니, 글쎄, 카프카가 쓴 놀라운 장편소설인 <소송>뿐만 아니라 아예 소설가 <카프카>를 두고도 누가 이미 영화를 만들어 놓았더라구요. 정말로 북플 때문에 별의별 희한한 사실까지도 다 알게 되더군요. <카프카>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를 만들 생각을 다 하다니... 도대체 누가 그런 놀랍고도 엄청난 발상을 한 걸까요?
그러고 보니 북플이 '책과 영화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진작에 미리 알아차리고 책에만 클릭이 가능한 줄로만 알았던 '읽음 표시'를 '영화'에도 허용한 조치는 나름대로 '납득'이 가는 측면도 있더라구요. 어찌되었든 '북플'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그 누가 나더러 '책과 음악과 영화'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보도록 강요할 수 있었겠느냐는 거지요. 그래서 북플이 마법을 부린다는 말도 그다지 설득력이 영 떨어지는 얘기는 아닐 테지요. 그리고 제가 저토록 '자가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북플의 '읽은 책' 코너가 마침내 '1001'을 넘어섰다는 사실도 무슨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1001' 시리즈와 '1001 야화'와도 그리 크게 동떨어진 '사이'도 아닌 듯하구요...
('읽은 책'에 보이는 '1007'이라는 저 숫자는 결코 '책의 권수'가 아니다. 영화와 음악까지도 두루 포함된 수치다.)
아주 한가한 독자들이라면 별 쓰잘 데 없이 그저 시시껄렁하기만 한 제 얘기를 용케 중도에 '되돌리기' 버튼도 클릭하지 않고 줄기차게 끝까지 따라와 주셨으리라 철석같이 믿습니다요. 아무쪼록 독자분들께서도 북플이라는 요물(?)을 부디 유용하게 활용하시는 데 있어서 제 글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저도 더 바랄 게 없습니다요. 날이 저문지도 오래 지났으니 저도 그만 이쯤에서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듯싶네요. 왜냐하면 저는 이제 다시 영화를 떠나 책 속으로, 말하자면 '소송'에 걸린 골치 아픈 주인공 '요제프 K'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요. 그럼 안녕히...
"그런 다음에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군요." K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화가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겉보기로만 자유롭거나 혹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일시적으로만 자유로운 것입니다. …… 외부에서 보면 모든 것이 오래전에 이미 다 잊히고 서류도 어디론가 사라져 무죄 판결이 완전히 확정된 것 같은 인상을 줄 때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서류도 분실되는 법이 없으며, 법원에서는 잊어버리는 일 같은 건 없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판사가 그 서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 사건의 기소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깨닫고는 즉각적인 체포를 지시하는 겁니다. 여기서 나는 외견상의 무죄 판결과 새로운 체포 사이에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경우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그런 사례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법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벌써 위임을 받은 자들이 그를 다시 체포하기 위해 와 있는 일도 역시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자유로운 삶도 끝나게 되지요." "그러면 소송이 새로 시작되나요?" K가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화가가 말했다.
- 프란츠 카프카, 『소송』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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