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 창조적 진화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동서문화사 월드북 74
앙리 베르그손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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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광석과 금속

 

웃음은 사회적인 의의와 효력을 지니며, 희극성은 무엇보다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어떤 특수한 부적응을 표시한다는 것, 즉 인간을 빼놓고 우스움이란 없다는 사실, 이를 확신하면서 우리가 우선 목표로 삼은 것은 인간과 그 성격이다. 따라서 곤란한 문제는 오히려 왜 성격 이외의 무언가를 대하고 웃는 일이 있는지, 또 어떤 미묘한 침투나 결합 또는 혼합 현상을 통해 희극성이 단순한 운동으로, 비인격적인 상황으로, 독립된 문구로 스며드는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해 온 일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순수한 금속이 주어졌고, 우리의 노력은 한결같이 광석을 재구성하는 일에만 기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가 연구하려는 것은 금속 그 자체이다.(79쪽)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

 

타인의 인격이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했을 때야말로 희극은 시작될 수 있다. 사회생활에 대한 경직으로 불러도 될 만한 행동에서 그것은 시작된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만을 자동적으로 더듬어가는 인물은 희극적이다. 이런 사람의 방심을 다잡기 위해, 그를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 웃음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80쪽)


사회적 신입생에 대한 괴롭힘

 

만일 작은 일을 큰 일에 비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사관학교라든가 사범학교 같은 곳에 입학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이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이란 힘든 고비를 넘긴 수험생 앞에는 더 큰 산이 남아 있다. 바로 선배들이 그를 새로운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군기를 잡기 위해 마련한 과정이다. 큰 사회 속에 형성된 작은 사회라 할지라도 모두 이처럼 막연한 본능에 따라 이제까지 몸에 밴, 그러나 이제는 고쳐야 하는 습관의 경직성을 바로잡고 풀어주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본디 의미에서 사회란 것도 이와 별다르게 작용하지 않는다. 사회의 각 구성원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위 사람들을 거울삼아 자아를 형성한다. 즉 상아탑 속에 틀어박히듯이 자기 성격 속에 틀어박히는 것을 피한다. 그리고 사회는 각 구성원에게 교정하라는 협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굴욕의 예측을 늘 심어준다. 그 굴욕은 비록 경미한 것이라도 두려움의 대상이다. 웃음의 역할은 그와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 웃음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언제나 얼마쯤의 굴욕을 준다. 사회적 신입생에 대한 괴롭힘인 것이다.(80쪽)

 

 

희극이 드라마보다도 현실 생활에 가까운 이유

 

연극에서조차도 웃음에서 오는 즐거움은 순수한 쾌락, 즉 절대적으로 이해 관계를 초월하고 한결같이 심미적인 쾌락은 아니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지 않은 때에도 사회가 우리를 위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저류가 섞여 있다. 웃음에는 말은 하지 않을망정, 그 대상에게 창피를 줌으로써 적어도 외면적으로나마 바로잡아 주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희극이 드라마보다도 현실 생활에 가까운 것은 그 때문이다. 걸작 드라마일수록 작가가 현실에 있는 비극을 순수한 상태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현실에 가해야 할 분석적 재구성은 심오한 법이다. 이에 반해서 희극이 현실적인 것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는 것은 오로지 그것의 저급한 형태, 즉 보드빌(가벼운 희극)과 펄스(웃음극)에 있어서뿐이다. 그것이 고급이 되면 될수록 희극은 더욱더 생활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고,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무대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고급희극에 가까운 현실 생활의 장면이 얼마든지 있다.(80∼81쪽)

 

 

결점과 웃음

 

흔히 다른 사람의 가벼운 결점이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고 한다. 이 주장이 대체로 진리임은 나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엄밀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첫째로, 결점에 대해서도 경미한 것과 중대한 것과의 사이에 한계를 두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결점이 다분히 경미하기 때문에 우리를 웃기는 것은 아니고, 우리를 웃기기 때문에 그 결점을 경미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웃음만큼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나 더 나아가 중대한 것인 줄 잘 알면서도 우리를 웃기는 결점도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는가?(81쪽)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

 

엄밀하게 말해서 희극적인 동시에 도덕적일 수는 있다. 아르세스트의 성격은 완벽한 궁정신사와 같다. 그러나 그는 비사교적이며, 바로 그 때문에 희극적이다. 유연한 결함보다는 완고한 미덕을 희극화 하는 편이 쉬울지도 모른다. 사회가 의심스런 눈으로 보는 것은 이 경직이다. 따라서 아르세스트의 경직이 정직함에 다름없는 것일지라도 우리를 웃기는 것이다.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사람은 누구이건 농담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것은 희극성이 대부분 이 틀어박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희극성이 종종 습속이나 관념-정확히 말해서 사회의 편견과 대단히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설명된다.(82쪽)

 

 

웃음은 감정과 양립할 수 없다

 

희극성은 순수 이지에 호소하는 것이다. 웃음은 감정과 양립할 수 없다. 어떤 작은 결점이라도, 만일 여러분이 나의 동감, 공포 또는 연민의 정을 움직이며 그것을 드러낸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이제 그것에 대해 웃을 수가 없다. 반대로 뿌리 깊고 흔히 말해서 신물이 나는 악덕을 골라보라. 만일 여러분이 적절한 기교로 그 악덕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여 내 마음이 동요치 않도록 한다면, 악덕을 희극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악덕이 무조건 희극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희극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희극성을 창조하는 데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정말로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다.(82쪽)

 

 

희극의 몸짓

 

극작가가 한 영혼의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단순히 그것을 관객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할 의도로 묘사해 보일 때에는, 그것을 그 정확한 치수를 나타내는 동작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게 한다. 그리하여 수전노는 돈 버는 일을 안중에 두고 만사를 계획하고, 거짓으로 독실한 신자는 하늘만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되도록 교묘하게 지상의 일에 분주한 것이다. 희극은 확실히 이러한 잔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타르튀프의 간계를 그 증거로 들어두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은 희극이 드라마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점이다. 드라마와 구별되기 위해, 진지한 동작을 우리가 진지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즉 웃을 수 있도록 우리를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희극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된 하나의 수단을 사용한다. 그것은 우리의 주의를 행위 그 자체에 집중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몸짓으로 향하게 한다. 여기에서 몸짓이란 목적도 없고, 이득도 없고 단지 내적인 근질근질한 작용에 의해서 어떤 정신 상태가 표명되는 그런 태도, 거동, 그리고 말까지 가리킨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면 몸짓은 동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동작은 계획된 것이고 아무튼 의식적인 것이다. 반면 몸짓은 무심코 나타나며 자동적인 것이다. 동작을 부여하는 것은 온 인격이나, 몸짓은 인격의 고립된 부분이 나머비 부분이 모르는 사이에 또는 적어도 분리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의 주의가 행위가 아니라 몸짓으로 향하자마자 우리는 희극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것이다.(84∼85쪽)

 


 

방심이 뿌리 깊으면 깊을수록 희극성은 더욱더 진해진다

 

요컨대 어떤 성격이 좋건 나쁘건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보았다. 비사회적이기만 하면 그것은 희극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태의 중대성은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음도 보았다. 중대하건 사소하건 우리가 그것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인물의 비사교성과 관객의 무감동성, 요컨대 이것이 본질적인 두 조건이다. 이들 두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세 번째 조건은 바로 이제까지 우리의 분석이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동 현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 연구의 첫머리에서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점에 주목해 왔다. 대체로 본질적으로 우스운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사항뿐이다. 결점에서나 아름다운 점에서조차도 우스개는 인물이 알게 모르게 해버리고 마는 것, 본의 아닌 몸짓이거나 무의식적인 언어이다. 방심은 모두 희극적이다. 그리고 방심이 뿌리 깊으면 깊을수록 희극성은 더욱더 진해진다. 돈키호테의 방심처럼 조리가 있는 방심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맨 밑바닥 가까운 곳에서 꺼내 온 희극성 그 자체이다. 다른 희극적 인물을 누구건 택해서 보라. 그 말하는 것, 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아무리 의식적일 수 있었다고 해도, 그가 희극적이라고 하는 이상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인간적인 일면, 즉 그 자신의 눈에 띄지 않는 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점으로만 그가 우리를 웃기는 것이다. 깊이 있는 희극적 경구는 무언가 결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가식 없는 문구이다. 만일 스스로 자신을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85∼8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돈키호테』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그 작품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한 바로 그 '뿌리깊은 방심'을 깨트리기 위해, 스스로 '편력기사'를 자처하면서, '낡은 갑옷과 투구와 창과 늙은 말을 타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구하러 나선 돈키호테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다니... 그 자체가 또한 얼마나 희극적인가 말이다.

 

"나는 이 영웅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독창성보다 더 심오한 독창성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인생은 인습과 관행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존의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양식에 맞춰진다. 그러한 삶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습관에 자신을 내맡겼거나 현실 문제에 사로잡힌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그 일부를 떼어내는 과정이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 성찰』)

 

 

부주의

 

어느 행동을 희극적 인물이 말로 비난하면서 바로 뒤에 그 실례를 보여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주르댕 씨의 철학 교사가 화내는 것을 나무라는 설교를 한 그 입으로 바로 화를 벌컥 내는 것이나, 자기가 쓴 시를 읊는 사람들을 매도한 뒤에 바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는 바디위스 등이 그 예이다. 자신에 대한 부주의, 따라서 타인에 대한 부주의, 그것을 우리는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태를 자세하게 음미해 본다면 그 부주의가 바로 이 경우 비사교성으로 불리는 것과 하나가 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경직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람이 자신의 주변, 특히 자기 내부로 눈을 돌리는 일에 소홀한 것이다. 만일 타인을 알고 또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본보기 삼아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겠는가? 경직, 자동 현상, 방심, 비사교성, 그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성격의 희극성이 완성되는 것이다.(86쪽)

 

희극의 본질

 

갖가지 성격, 다시 말해 여러 일반적인 유형을 묘사하는 것이 하이코미디의 목적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오래도록 말해 온 사실이지만, 여기서 특별히 되풀이해 두고 싶다. 이 공식만으로도 희극을 정의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희극은 우리에게 일반적 유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생각건대 온갖 예술 가운데 일반적인 것을 노리는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 희극에 이 목적이 있는 것으로 정해지면, 희극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 된다. 그것이 바로 희극의 본질이며, 따라서 희극이 비극과 드라마를 비롯한 그 밖의 예술 형태와 대립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예술을 그 가장 높은 형태로써 정의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서서히 희극시로 내려가면, 희극이 예술과 생활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반성이라는 그 성격에 따라 다른 예술과 확실하게 대조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87쪽)

 

예술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술의 목적은 무엇인가? 만일 현실이 직접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와 닿는다면, 만일 우리가 사물과 직접 의사 소통할 수 있다면, 예술은 쓸모없는 것이 되거나 오히려 우리가 모두 예술가가 되거나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때에는 우리의 정신이 끊임없이 장단을 맞추어서 진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기억의 도움으로 모방할 수 없는 그림을 공간 속에서 잘라내 시간 속에 붙여둘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가는 길에도, 고대의 조각상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조각상의 단편들이 인체라는 산 대리석에 새겨져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영혼 깊숙이에서, 때로 쾌활하지만 대개는 구슬픈, 그러면서도 언제나 참신한 음악처럼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내적 생명의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 주위에 있고, 우리 내부에 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의 어느 것도 확실하게 우리에게 지각되지는 않는다. 자연과 우리 사이에는,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의식 사이에는 하나의 장막이 가로놓여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두터우나, 예술가나 시인에게는 얇고 거의 투명에 가까운 장막이다. 어떤 선녀가 이 장막을 짠 것일까? 악의를 가지고 짠 것일까, 아니면 호의로 짠 것일까? 사람은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삶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사물이 지니고 있는 관계에서 우리가 그 사물을 터득하길 요구하고 있다.(87∼88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주장한  '예술철학'과 적잖이 닮았다. 베르그송이 여기서 언급한 '장막 이론'은 언뜻 쇼펜하우어가 그 책의 후반부에서 자주 언급한  '마야의 베일'을 떠올리게도 한다.

 

 

웃음

 

산다는 것은 행위한다는 것이다. 생활을 함은 사물에서 적절한 반작용으로 그것에 응하기 위해 유용한 인상만을 받는 것이다. 그 이외의 인상은 희미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막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주의 깊게 보면서 그저 본다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그저 듣고만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관찰하면서 마음속까지 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에 대해서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단순히 나의 행위를 비추기 위해서 나의 감각이 외부 세계에서 추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 또한 가볍게 표면을 스치는, 내 행동에 실제로 연관된 사항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나 나의 의식은 현실에 대해 단지 그 실룡을 위해 단순화된 것만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사물과 나 자신에 대해서 부여하는 전망 속에는, 인간에게 무용한 차이는 지워지고 인간에게 유용한 유사함은 강조되어 내가 실제로 일하기 위해 들어가야 할 길들이 미리 나를 위해 깔려 있다. 온 인류는 이전에 그런 길을 지나왔다. 사물은 내가 그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이익이라는 입장에서 분류된다. 그리고 그 분류가 사물의 빛깔이나 형태보다도 훨씬 더 내 눈에 띈다.(88쪽)

 

(나의 생각)

베르그송의 다른 저작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창조적 진화』에서 발견한 내용들과 몹시 유사한 주장들이다.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담긴 '눈의 작용'에 대한 설명과도 몹시 닮았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존재의 개성은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 물질적으로 유용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나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개성에 착안하는 경우에도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을 구별할 때처럼) 우리의 눈이 포착하는 것은 개성 그 자체, 즉 형태이건 색이건 완전히 독창적인 일정한 조화는 아니다. 다만 다순히 실용적인 구분을 쉽게 하는 한두 가지 특징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사물 위에 붙어 있는 쪽지를 읽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필요에서 나온 이 경향은 언어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언어는 (고유명사를 제외하고) 모두 종류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흔해빠진 양상만을 나타내는 언어는 사물과 우리 사이에 개입해 그 형체를 우리의 눈에서 가릴 것이다. 언어 그 자체를 만든 필요의 배후에 이미 그 형체가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89쪽)

 

 

우리는 우리의 정신 상태 가운데 그 외적인 부분만을 지각할 뿐이다

 

그리고 단순히 외부 세계의 사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깊숙하고, 개인적이며, 남다르게 체험된 것들마저도 우리에거서 벗어나 사라진다. 우리가 사랑이나 사랑이나 증오를 느낄 때, 기쁘다거나 슬프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감정 그 자체가 그것을 완전히 우리의 것인, 무언가로 하고 있는 수많은 은근한 색조와 깊은 공명음과 함께 우리의 의식에 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소설가이고 시인이며 음악가일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 상태 가운데 그 외적인 부분만을 지각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 가운데 그 비개인적인 면, 즉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에서 거의 동일하므로 언어가 결정적으로 기술한 면밖에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의 개체에서조차 개성은 떠난다.(89쪽)

 

 

바깥쪽에서 생활한다

 

우리는 일반성과 상징에 둘러싸여 움직이고 있다. 마치 우리의 힘이 다른 힘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시합장 안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최대 선을 위해 행동이 스스로 선정한 지반에서 행동에 매료되고 행동에 이끌려 우리는 사물과 우리 사이의 중간지대 안에, 사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 대해서도 바깥쪽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방심으로 인해서 자연이 생활에서 계속 초탈(超脫)하고 있는 정신을 출현시킬 때가 있다. 나는 반성과 철학의 소행인 의도적이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초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초탈이 완전한 것이었다면, 만일 정신이 그 지각의 무언가에 의해서도 행동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 정신은 이 세상이 아직 본 적 없는 예술가의 정신이 될 것이다. 그 정신은 모든 예술에서 동시에 뛰어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예술을 모두 혼합해서 하나의 예술로 만들 것이다. 또한 온갖 사물을 그 근원적인 순수함에서 인정할 것이다. 물질계의 여러 가지 형체, 색, 음향, 그리고 내면 생활의 가장 정교한 움직임까지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자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자연을 통해 예술가가 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연이 장막을 들어 올려 준 것은 단지 한 면에서뿐이다. 이 한 방향에서만 자연은 지각을 필요에 결부시키는 일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방향은 우리가 감각(sens)으로 일컫는 것에 응하고 잇으므로 그의 감각 하나에 의해서, 그리고 단지 이 감각에 의해서만 예술가는 보통 예술에 몸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디 예술에는 다양성이 있다. 그리고 또 선천적 소질의 전문적 구별이 있다.(89∼90쪽)

 

 

삶의 비물질성을 내포한 예술

 

어떤 사람은 색과 형에 집착한다. 그는 형태를 위해 형태를 사랑하고, 색을 위해 색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또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체를 위해 지각하는 것이므로, 그가 사물의 색과 형태를 통해서 보는 것은 사물의 내적 생명이다. 그는 그것을 처음에는 망설이고 있는 우리의 지각에 서서히 잠입시킬 것이다. 적어도 한 순간이나마 우리의 눈과 현실과의 사이에 끼어 있는 형태와 색에 관한 선입견에서 우리를 풀어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술의 가장 큰 야심을 실현한다. 그 야심이란 우리에게 자연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성찰할 것이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한 행동 아래에서, 개인적인 정신 상태를 표출하고 은폐하는 흔해빠진 사회적 언어의 배후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순수한 모습 그대로의 감정과 정신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똑같은 노력을 하도록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연구에 골몰한다. 즉 전적으로 조성되어 하나의 독창적인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되는 언어의 운율적 배역에 의해서 그들은 언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사물을 우리에게 말하거나 암시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욱 깊게 파내려갈 것이다. 다급해지면 언어로 번역될 것도 없이 이런저런 환희와 비애 밑에 그들은 이제 언어와는 전혀 무관한 것, 사람에 따라서 다른, 인간의 가장 내적인 감정보다도 더욱 내면적인 것의 생명과 숨결의 일정한 리듬-사람의 의기소침과 열광, 회한과 희망의 살아 있는 법칙-을 파악할 것이다. 이 음악을 풀어서 고조시킴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지나가다 무도회에 참여하게 된 행인처럼 좋든 싫든 간에 우리를 그 속에 휩쓸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우리를 내몰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진동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무언가를 뒤흔들게 할 것이다. 이리하여 회화건, 조각이건, 시이건, 또는 음악이건, 예술은 우리를 현실 그 자체에 직면시키기 위해 실천에 유용한 상징, 관습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일반성, 즉 우리에게 현실을 숨기고 있는 것 모두를 멀리하는 것 이외의 목적은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점에 관한 오해에서 예술에서의 사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논쟁이 태어난 것이다. 예술이란 확실히 현실을 좀더 직접적으로 투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각의 순수성은 유용한 관습과의 단절, 감각 또는 의식의 내재적으로 타고난 무사무욕, 즉 사람이 언제나 이상주의로 불러온 삶의 비물질성을 내포하고 있다.(90∼91쪽)

 

 

드라마의 목적

 

극예술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가 찾아내 조명하려는 것은 생활의 필요에서, 종종 우리의 이해 그 자체 속에서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깊은 하나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의 필요란 무엇인가? 시는 모두 정신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 상태 중에는 특히 다른 사람과 접촉해 낳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가장 강하고도 격렬한 감정이다. 음양의 전기가 축전지의 양극 사이에서 서로 당기고 축적되어 불꽃을 튀게 하듯이, 사람과 사람을 단순히 함께 나란히 있게 하는 데서 강한 당김과 반발이, 균형의 완전한 파괴가, 즉 정념이라는 정신의 감전 상태를 낳는다. 만일 인간이 그 감성적 자연의 충동대로 맡겨두고 있다면, 만일 무언가의 사회적 법칙도 도덕적 법칙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격한 감정의 폭발은 일상적으로 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폭발은 피하는 편이 유익하다. 사람이 사회에서 생활하고 따라서 어떤 규칙에 따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익이 조언하는 것을 이성이 명령한다. 즉 세상에는 의무란 것이 있고, 우리의 법규는 그에 따르는 것이다. 이 이중의 영향 아래 감정과 관념의 외층이 인류를 위해 형성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는 것도 이러한 쾌락이다. 드라마는 사회와 이성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준 평온하고 평범한 생활 아래서 다행히 폭발은 하지 않으나 그 내적 긴장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를 뒤흔들어 놓는다. 자연을 대신해 사회에 복수해 주는 것이다. 때로 드라마는 일직선으로 이 목표에 돌진한다. 무엇이건 날려 보내는 정념을 속에서 표면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때로는 흔히 현대극이 하듯 옆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궤변으로도 보이는 교묘함으로 사회의 모순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법칙 속에 있을지도 모를 인위적인 것을 과장하고,그로써 우회적인 수단으로 이번에는 겉 껍데기를 찢으면서 역시 우리를 속마음에 접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를 약하게 하건 자연을 강하게 하건, 이 둘 중 어느 경우에도 드라마가 추구하는 목적은 같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숨겨져 있는 부분, 우리가 성격의 비극적 요소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뛰어난 드라마를 본 뒤에 우리는 그런 인상을 받는다. 우리의 흥미를 끈 것은 타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잠깐 엿보인 부분, 겉으로 드러나려고 했으나 우리로서는 다행히도 그렇게 되지 않았던 막연한 것들로 혼돈 상태가 된 하나의 세계이다. 또 한없이 먼 과거에 속해 있는 기억, 마치 우리의 현재 생활이 한때는 비현실적인, 또는 틀에 박혀 그 때문에 우리가 새롭게 터득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이 생활과는 단절된, 이 뿌리 깊은 격세 유전적인 기억, 그 기억에 대해서 우리 안에 하나의 호소가 보내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따라서 드라마가 좀더 유용한 획득물을 초월해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좀더 깊은 현실이고, 거기에서 이 예술은 모든 다른 예술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92∼93쪽)

 

(나의 생각)

TV 드라마 보다는 영화 드라마가 훨씬 더 그럴 것이다. 최근에 봤던 영화 가운데 《나를 찾아줘》,《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문득 생각난다.

 

 

천재의 각인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예술이 언제나 개별성을 지향함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화가가 화폭 위에 그리는 것은 그가 어느 곳,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본 것으로 다시 볼 일 없는 색조를 띤 것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그 자신의, 그리고 오직 한결같이 그 자신의 정신 상태로서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험이다. 극작가가 우리 눈앞에 보여주는 것은 정신의 두루마리이고 감정과 사건의 산 직물이며, 결국 한 번 나타나 두 번 다시 반복되는 일 없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 일반적인 명칭을 부여해도 보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정신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것들은 이제 같은 사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개별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예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반성, 상징, 유형조차도 우리의 일상적 지각의 통화(通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이 점에 관한 오해가 생기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단히 다르게 되어 있는 2개의 것, 즉 사물의 일반성과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의 일반성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감정이 일반적으로 진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인 감정일 수는 없다. 햄릿처럼 특이한 인물이 또 있을까? 설사 그가 얼마쯤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해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성격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가 보편적 진리의 성격을 띠는 것은 단순히 이 의미에서뿐이다. 다른 어느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느 것이나 특이하다. 하지만 만일 천재의 각인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결국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람들은 왜 그것을 받아들일까? 그리고 만일 그 것이 그 분야에서 유일한 것이라면 무슨 근거로 그것이 진실임이 인정되는 것일까? 생각건대, 우리가 진지하게 사물을 보도록 그것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노력 그 자체에 따른 것이리라. 진지함은 전달성이 있다. 예술가가 본 것을 우리가 다시 보는 일은 물론 없을 것이다. 적어도 같은 식으로는 전혀 보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그가 진실로 그것을 본 것이라면, 그가 기울인 철저한 노력은 우리를 좋든 싫든 모방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교훈으로서 도움이 되는 하나의 본보기이다. 그리고 교훈의 효력에 따라 작품의 진리가 측정되는 것이다. 진리는 그 안에 신념, 변화조차 촉구하는 힘을 맡고 있으며, 이것이 그 진리가 인정될 때의 표지(標識)이다. 작품이 위대해질수록, 거기에서 엿보이는 진리가 심원할수록 그 효과는 더욱더 기대해 볼 만하며 그만큼 보편적이 된다.(93∼94쪽)

 

 

비극 작가 VS 희극 작가

 

비극 작가는 그의 주요 인물 주위에 이른바 그를 단순화시킨 유사품에 지나지 않은 인물을 표현하자고는 결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그 방면에서 유일한 한 개체이다. 그 주인공을 모방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우리의 의식 여부에 상관없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옮기게 된다. 그를 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하고도 닮은 면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희극 작가가 중심 인물을 만들어낼 때는 하나의 두드러진 본능이 그를 이끌어, 그 주위에 똑같은 일반적 특징을 지닌 인물들을 그러모으게 한다.(94∼95쪽)

 

 

비극 VS 희극

 

삶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의 눈에 비칠 뿐이다. 시적 상상력은 현실의 보다 완전한 이해 이외의 것일 수는 없다. 만일 비극 작가가 창조하는 인물들이 살아 있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면, 그것은 그들이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내면을 관찰하려는 노력으로 자신을 깊이 파고듦으로써, 현실적인 것 가운데 잠재적인 것을 포착하고, 자연의 소묘나 초찬으로 그의 내부에 맡겨 준 것을 되찾아서는 하나의 완전한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희극을 낳는 관찰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외면적 관찰이다. 아무리 희극 작가가 인잔적 본성의 우스운 점에 호기심이 있다고 해도, 생각건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을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격 가운데 의식으로 포착하기 힘든 면에서만 우스꽝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관찰이 이루어지는 것은 타인에 대해서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에서 관찰은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 향하게 할 때에는 얻을 수 없는 일반성의 성격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찰이란 표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인물들의 겉모양, 즉 대부분이 서로 접촉해 서로 닮을 수 있는 데 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진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96∼97쪽)

 

 

허영심과 겸손

 

이 혼합물은 허영심(vanite)이다. 생각건대 이 이상으로 표면적인, 이 이상으로 뿌리 깊은 결점은 달리 없을 것이다. 사람이 허영심에 대해서 받는 손가락질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지만, 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사람이 이에 대해서 하는 봉사는 모든 봉사 가운데서 가장 허무한 것이지만, 그 뒤에 오래도록 고마움의 마음을 남긴다. 그 자체는 악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온갖 악덕이 그 주위에 모여들고 방법을 짜내면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 이외에 무언가를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그것은 타인에게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찬미 위에 구축된 자화자찬이기 때문에, 이기주의보다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며 본디부터 타고난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은 종종 이기주의는 극복하지만, 허영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생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겸손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생리적인 어떤 소심함이라고 부르지 않는 한, 우리가 선천적으로 겸손하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만에 가까이 있다. 진정한 겸손은 허영심에 대한 성찰 외에는 있을 수 없다. 타인의 착각을 보는 것에서, 그리고 자신도 똑같은 미혹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겸손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에 관한 과학적 주의와 같으며, 숱한 교정과 시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즉 그것은 획득된 미덕이다.(98∼99쪽)

 

(나의 생각)

아마도 '허영과 오만'에 대해서라면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을 통해 밝혀낸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어쩌면 베르그송도 그 책을 읽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직업적 우스개

 

모든 전문적 직업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에게 어떤 정신적 습관이나 성격적 특이성을 부여하고, 그것에 따라서 서로 닮아가고 남의 것과 자신을 구별한다. 이렇게 해서 몇 개의 작은 사회가 큰 사회 내부에 구성되는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런 것들은 사회 전반의 조직 그 자체에서 나온다. 하지만 만일 그런 것들이 너무 지나치게 고립되면 사회성을 파괴하기에 이를 우려가 있다. 그런데 웃음은 모든 분리하려는 경향을 억제한다. 즉 경직을 유연함으로 교정하고, 개체를 전체에 재적응시키며, 모난 것을 제거해 둥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스개를 얻는다. 그리고 그 변종은 사전에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직업적 우스개로 부르고 싶다.(101쪽)

 

 

직업적 허영심

 

제일선에는 직업적 허영심이란 것이 있다. ······ 게다가 여기에서는 영위되고 있는 직업에 사기꾼 같은 기미가 엿보이고 허영심이 거드름을 피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어느 과목이 수상쩍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더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성직이 부여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람이 자신의 비밀스런 의식 앞에 고개를 숙이도록 요구하는 것은 두드러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용한 직업은 명백히 공중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유용성이 훨씬 의심스러운 직업은 공중이 그것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상정해 비로소 자신의 존립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거드름을 피우는 근저에 있는 것은 이 착각이다. 몰리에르가 묘사한 의사들의 우스개는 대부분 거기에서 오고 있다. 그들은 마치 환자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리고 자연 그 자체를 의술의 종속물 가운데 하나처럼 다룬다.(101쪽)

 

 

싸움터로 떠나는 돈키호테

 

이번에는 싸움터로 떠나는 돈키호테를 보자. 그는 애독하는 이야기 가운데서 기사가 도중에 적의 거인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아무래도 거인이 필요하다. 거인이란 관념은 언제나 그의 정신에 자리를 차지하고 대기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무언가의 사물에 몸을 드러낼 기회를 노리는 하나의 특권이 있는 기억이다. 그것은 물질화되길 원한다. 따라서 최초로 나타난 사물이 거인의 형태와 아주 먼 유사함밖에 지니고 있지 않아도 그것은 기억을 통해 거인의 형태를 부여받는다. 돈키호테는 우리가 풍차를 보는 곳에서 거인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희극적이면서도 부조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조리일까?

 

그것은 매우 특수한 상식의 뒤바뀜이다. 이것은 우리의 관념을 사물의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의 틀에 사물을 맞추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눈앞에서 보는 것이다. 양식은 사람이 그의 추억을 모두 차례로 늘어놓길 원한다. 그 결과 적당한 추억이 현재 상황의 호출에 응해 그때마나 나타나 그것을 해석하기만 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한 무리의 기억이 다른 기억들 위에 군림하고 또한 인물 그 자체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서 현실의 힘이 이번에는 상상 앞에 굴복하고 이제는 상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게 된다. 한 번 착각이 형성되면 돈키호테는 그것을 그가 내리는 모든 결론 속에서 합리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꿈대로 사는 몽유병자처럼 확실함과 정밀함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착각의 기원이고 부조리에 가득 찬 특수한 논리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돈키호테에게만 특별하게 있는 것일까?

 

우리는 희극적 인물이 정신 또는 성격의 완강함에 의해서, 방심에 의해서, 자동적인 것에 의해서 실수를 저지른다고 설명해 두었다. 우스개의 밑바닥에는 경직이 있어 그것이 사람을 일직선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타인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게 하거나, 모든 것에 귀를 막게 하는 것이다. 몰리에르 희극의 많은 장면들이 이 단순한 유형에 따른다. 즉 자신의 사고에 따라가는 인물이, 타인이 끊임없이 가로막는데도 언제나 자신의 사고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는 사람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려는 사람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행해질 것이다. 완강한 정신은 결국 사물에 자신의 관념을 적응시키는 대신 자신의 관념대로 사물을 굽히게 한다. 따라서 모든 희극적 인물은 지금 말한 착각의 도정에 있고, 돈키호테는 희극적 부조리의 일반적 유형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 상식의 뒤바뀜에는 이름이 있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광기의 어느 형태 속에서 급성이거나 만성이거나 이러한 상식의 뒤바뀜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많은 방면에서 고정관념을 닮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광기도 고정관념도 결코 우리를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연민의 정을 일으키게 한다. 웃음은 우리가 익히 알 듯이 정서와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웃음을 유발하는 광기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의 일반적 건강과 양립할 수 있는 광기, 건전한 광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점에서나 광기를 따라하는 건전한 정신 상태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정신착란에서와 똑같은 관념의 연합이고, 고정관념에서와 똑같은 기이한 논리이다. 그것은 꿈의 상태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분석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정리로 공식화될 것이다. 희극적 부조리는 바로 꿈속의 부조리와 같은 성질의 것이다.(104∼105쪽)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가면서 느끼는 바로 그것

 

꿈속에서 크레센도, 즉 진행함에 따라서 고조되는 기괴한 일을 드물지 않게 본다. 이유가 없는 최초의 양보가 제2의 양보를 유치하고, 이것이 더욱 중대한 다른 양보를 유치해 계속해서 마지막 부조리까지 이른다. 그런데 이 부조리한 것으로의 진행은 꿈을 꾸는 사람에게 특이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생각건대, 술을 마시다 보면 논리든 체면이든 이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기분 좋게 미끄러져 가면서 느끼는 바로 그것이다.(107쪽)

 

 

불가사의한 융합

 

꿈에는 특히 고유한 정신착란이 있다. 꿈꾸는 사람의 상상으로는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깨어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무척 거슬리는 것이어서, 그런 경험을 한 적 없는 사람에게는 정확하고 완전한 관념을 줄 수 없을 듯한 특별한 모순들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실제로 같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확실히 분리된 두 인물 사에에서 꿈이 종종 행하는 불가사의한 융합이다. 보통 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본인이다. 그는 실재하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을 느낌에도 다른 인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인 동시에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행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의 몸을 빌리고 그의 목소리를 택한 것으로 느낀다. 또는 평상시처럼 이야기하고 행동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일을 자신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타인의 일처럼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107∼108쪽)

 

 

웃음이야말로 더욱 심한 무례

 

이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서 특히 교정 수단을 보았다. 일련의 희극적 효과를 들어서 크게 지배적인 타입을 분리해 보라. 그러면 중간에 있는 효과는 희극적 공덕의 힘을 그런 유형과의 유사함에서 빌려온다는 것, 또 그런 유형 자체가 사회를 상대로 한 그만한 수의 무례함의 본보기임을 여러분은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무례에 대해서 사회는 웃음으로 되받아친다. 그 웃음이야말로 더욱 심한 무례이다. 따라서 웃음이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악을 악으로 갚을 것이다.(109쪽)

 

 

방심과 나태

 

희극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안이한 측면-대체로 습관의 비탈길-을 따라서 가려는 경향이 있다. 습관에 젖으면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일원인 사회에 대해서 끊임없이 몸을 적응시키고 재적응시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삶에서 지불해야 할 주의를 느슨하게 푸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많건 적건 방심하는 사람을 닮아간다. 이지(理智) 위의 방심이라기보다 의지의 방심임을 우리는 승인했다. 그래도 역시 방심은 방심이고 따라서 나태이다. 앞서 논리와 인연을 끊은 것처럼 습관에 젖은 사람은 예의범절과 인연을 끊는다. 결국 그는 유희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의 첫째 충동은 나태로의 초대를 수락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 순간 우리는 유희의 동아리에 낀다. 그것이 삶의 어려움에서 숨을 돌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을 돌리는 것은 겨우 잠시뿐이다. 희극성의 인상 중에 낄 수 있는 공감은 곧 사라지는 공감이다. 실은 그것 또한 방심에서 오는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가 때로는 자기를 잊고 아이의 못된 장난에 끼어들었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려서 아이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16쪽)

 

 

우리의 최대 선을 위해 어느 결점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미연에 막음으로써

 

웃음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교정이다. 굴욕을 주기 위한 웃음은 표적이 되는 사람에게 반드시 쓰라린 상처를 안겨준다. 사회는 웃음으로 사람이 사회에 대해서 행한 자유 행동에 복수하는 것이다. 웃음에 만일 공감과 호의가 새겨져 있었다면 그 목적을 이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즉 적어도 웃음의 의도만은 좋은 것일 수 있고,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최대 선을 위해 어느 결점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미연에 막음으로써, 그러한 결점 자체를 교정하고 우리를 내면적으로 개선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틀어서 웃음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분석은 그것을 증명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웃음이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거나, 그것이 친절 또는 공평함에 대한 생각에서 나왔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나 정곡을 찌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성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웃음은 자연적으로, 또는 거의 같은 이야기지만 사회생활의 아주 오랜 습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갖추게 된 기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혼자서 일어나 앙갚음의 빈격을 한다. 그때마다 어디서 맞는지를 확인할 틈은 없다. 웃음은 마치 질병이 사람의 과도함을 벌하는 것과 비슷하게 어느 결점을 벌한다. 죄가 없는 자를 공격하고, 죄인을 눈감아주고, 개개인의 경우를 따로따로 살피는 경의를 표하는 법 없이 일반적 결과를 지향한다. 의식적 반성으로 이루어지는 것 대신에 자연의 도리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은 모두 그와 같다. 하나의 중용적인 공평함은 전체의 결과라면 몰라도 개개의 세부 사항 가운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110∼111쪽)

 

 

웃음은 굴욕을 주어 기가 죽게 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반드시 친절한 것도 아님을 되풀이해 둔다. 그것은 굴욕을 주어 기가 죽게 하는 것을 역할로 삼는다. 만일 자연이 이를 위해 가장 선한 사람들에게도 심술궂음이나 적어도 놀리고 싶은 마음을 조금쯤 남겨두지 않았다면, 웃음은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은 깊게 파고들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우리는 이완 또는 팽창 운동이 웃음의 서곡에 지나지 않고, 웃는 자는 즛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다소나마 오만하게 스스로 자신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마치 자신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것이다. 게다가 이 오만 중에서 우리는 즉시 약간의 이기주의를, 그리고 그 이기주의 배후에 무언가 더욱 자발적이지 않은 좀더 고통스러운 무엇, 웃는 자가 자기의 웃음에 이유를 더 붙이면 붙일수록 더욱더 움직이기 어렵게 되어가는 무언가 일종의 맹아적(萌芽的) 염세주의를 구별해 낼 것이다.(111쪽)

 

 

사회가 완전한 영역으로 나아감에 따라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여기에서도 선을 위해 악을 이용했다. 이 연구 전체에 걸쳐서 우리가 마음을 쏟아 완성한 것은 특히 이 선이다. 즉 사회는 완전한 영역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좀더 큰 적응의 유연함을 그 성원에게서 얻고 그 뿌리가 더욱더 균형을 잡게 되며, 그 표면에서 그와 같은 대집단에 따라붙는 여러 가지 혼란을 일소하는데, 웃음은 그러한 동요의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111쪽)

 

 

웃음은 이 물거품처럼 태어나는 것

 

그리하여 바다의 표면에서는 파도가 잔잔해질 틈도 없이 싸우는데도 아래쪽 심연에서는 깊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파도는 서로 충돌하고 항쟁하면서 균형을 추구한다. 희고 가벼운 물거품은 끝없이 변화하는 윤곽의 뒤를 쫓고 있다. 때때로 파도가 바닷가 모래 위에 거품을 조금 남겨두고 간다. 그곳에서 놀던 아이가 와 그것을 한 주먹 쥐어보고는 손바닥에 물이 서너 방울밖에 잡히지 않은 것에 놀란다. 더구나 그것을 싣고 온 파도의 물보다 훨씬 짜다. 웃음은 이 물거품처럼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외면에 가벼운 모반(謀叛)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러한 동요의 움직이는 형태를 즉시 묘사해낸다. 그것 또한 염분을 머금은 거품이며, 거품처럼 다른 거품을 만든다. 그것은 쾌활함이다. 그러나 그것을 음미하기 위해 이 거품을 채집하는 철학자는 때로 그 보잘것 없는 양에서나마 한 가닥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111∼112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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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3-2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대학 다닐 때 종로서적에서 나온 <웃음>을 밑줄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동서문화사 책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여담인데, oren 님 쓰신 <시학>에 대한 리뷰를 보고 저는 시학 리뷰 쓰기를 포기했습니다. 혹시 나중에 다시 읽고 쓴다면 시학에 언급된 미술(그림, 조각)에 관한 내용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ㅎㅎ

oren 2015-03-22 11: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돌궐 님.

돌궐 님께선 대학에 다니실 때 벌써 베르그송의 『웃음』을 읽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런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거든요. 저로서는 아마도 책 제목만 어렴풋이 들어본 정도였지 싶습니다.

제가 쓴 『시학』에 대한 리뷰 때문에 돌궐 님께서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못하셨다니 그런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싶네요. 어떤 책에 대한 어떤 리뷰든, 저는 그게 다른 사람들이 미래에 쓸 리뷰를 결코 배척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오히려 자극을 줄 수는 있어도 말이지요.. 돌궐 님께서도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아주 훌륭하게 쓰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틀림없이 읽을 테니 나중에라도 꼭 『시학』에 대한 리뷰를 남겨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