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감정과 양립할 수 없다
희극성은 순수 이지에 호소하는 것이다. 웃음은 감정과 양립할 수 없다. 어떤 작은 결점이라도, 만일 여러분이 나의 동감, 공포 또는 연민의 정을 움직이며 그것을 드러낸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나는 이제 그것에 대해 웃을 수가 없다. 반대로 뿌리 깊고 흔히 말해서 신물이 나는 악덕을 골라보라. 만일 여러분이 적절한 기교로 그 악덕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여 내 마음이 동요치 않도록 한다면, 악덕을 희극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악덕이 무조건 희극적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희극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희극성을 창조하는 데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정말로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다.(82쪽)
방심이 뿌리 깊으면 깊을수록 희극성은 더욱더 진해진다
요컨대 어떤 성격이 좋건 나쁘건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보았다. 비사회적이기만 하면 그것은 희극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태의 중대성은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음도 보았다. 중대하건 사소하건 우리가 그것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인물의 비사교성과 관객의 무감동성, 요컨대 이것이 본질적인 두 조건이다. 이들 두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세 번째 조건은 바로 이제까지 우리의 분석이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동 현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 연구의 첫머리에서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점에 주목해 왔다. 대체로 본질적으로 우스운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사항뿐이다. 결점에서나 아름다운 점에서조차도 우스개는 인물이 알게 모르게 해버리고 마는 것, 본의 아닌 몸짓이거나 무의식적인 언어이다. 방심은 모두 희극적이다. 그리고 방심이 뿌리 깊으면 깊을수록 희극성은 더욱더 진해진다. 돈키호테의 방심처럼 조리가 있는 방심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한 맨 밑바닥 가까운 곳에서 꺼내 온 희극성 그 자체이다. 다른 희극적 인물을 누구건 택해서 보라. 그 말하는 것, 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아무리 의식적일 수 있었다고 해도, 그가 희극적이라고 하는 이상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인간적인 일면, 즉 그 자신의 눈에 띄지 않는 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점으로만 그가 우리를 웃기는 것이다. 깊이 있는 희극적 경구는 무언가 결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가식 없는 문구이다. 만일 스스로 자신을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다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85∼8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돈키호테』를 다시금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그 작품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베르그송이 여기서 말한 바로 그 '뿌리깊은 방심'을 깨트리기 위해, 스스로 '편력기사'를 자처하면서, '낡은 갑옷과 투구와 창과 늙은 말을 타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구하러 나선 돈키호테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다니... 그 자체가 또한 얼마나 희극적인가 말이다.
"나는 이 영웅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독창성보다 더 심오한 독창성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인생은 인습과 관행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존의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양식에 맞춰진다. 그러한 삶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습관에 자신을 내맡겼거나 현실 문제에 사로잡힌 자아로부터 끊임없이 그 일부를 떼어내는 과정이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돈키호테 성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