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 창조적 진화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동서문화사 월드북 74
앙리 베르그손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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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웃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웃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웃음을 유발하는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익살꾼의 찌푸린 얼굴, 재치있는 말솜씨, 보드빌(vaudeville:가벼운 오락용 희극)의 착각, 하이코미디 장면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떤 증류법을 사용하면 저렇게 종류가 잡다한 산물에 독한 향기를 감돌게 하는, 언제나 같은 그 엑기스를 채취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훌륭한 사상가들이 이 사소한 문제에 몰두해 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언제나 그 노력을 비웃듯이 빠져나가고 비껴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철학적 사색에 던져진 비위에 거슬리는 도전이라고나 할까.(13쪽)

 

* 특히 《시학(詩學)》5, 《니코마코스 윤리학》제4권, 제8장 등 참고, 다만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플라톤이 이미 머지않아 문제가 될 것임을 알았다. 다른 각도에서의 '해학성에 대한 웃음' 이론의 어엿한 싹을 《필레보스》29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묵살일까, 간과일까?

 

 * * *

 

(나의 생각)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에 특히 정통한 철학자이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었고, 부논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론」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번에도 극히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건 '그만의 특징'이며 다른 곳에서도 늘 그런 식이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엔 '희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통째로 빠져있다.(아리스토텔레스가 '나중에 다루겠다'고 책에서 약속은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뿐'이다. 그래서 '희극'에 대해서는 비극을 다루면서 곁다리로 잠깐씩 언급하는 설명만 있을 뿐, 구체적인 설명이 거의 없다.) 그 대신『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웃음'과 연관해서 참고할 대목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재치'를 다루는 대목에 담겨 있다.

 

삶에는 휴식이 있으며 휴식에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있기에, 여기에도 또한 어떤 적절한 사귐이, 즉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마땅히 말해야 할 방식으로 말하고 듣는 그런 사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듣는 것인지 사이에서도 또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과 관련해서도 중간에 대한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스갯소리를 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사람들은 '(저급) 익살꾼', '저속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려고만 하며, 고상한 것을 이야기하거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보다는 폭소를 만들어 내는 것에 더 마음을 쓴다.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우스운 이야기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촌스러운 사람', '경직된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 적절하게 농담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방향을 빨리 바꾸는 사람(eutropos)처럼(회전이 빠른 사람처럼) '재치 있는 사람(eutrapelos)'이라고 불린다. 이런 종류의 농담들은 품성상태의 움직임(kinēsis)으로 보여, 마치 신체가 신체의 움직임에 의해 판단되듯, 그렇게 품성상태 또한 이러한 움직임으로부터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웃을 만한 일은 도처에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땅한 것 이상으로 놀이나 조롱하는 일을 즐기기에, 사람들은 저속한 익살꾼마저 즐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양자는 엄연히 다르며, 그것도 적지 않게 다르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바를 보면 분명하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4권, <제8장 재치> 중에서

 

 

 

 

예술과 닮은 그것이 어찌 예술과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없겠는가?

 

희극적 공상은 심하게 탈선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 광기와 같은 것에도 조리가 있다. 꿈을 꾸는 듯하지만 곧 사회 전체에 승인이 되고 이해가 되는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희극적 공상이 인간의 상상작용에 관해서, 특히 사회적·집단적·민중적인 상상의 작용에 관해서 어찌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없겠는가? 실제의 삶에서 나온 예술과 닮은 그것이 어찌 예술과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없겠는가?(13∼14쪽)

 

 

 

 

많은 사람이 인간을 '웃을 줄 아는 동물'로 정의했다.

 

고유한 의미로 인간적인 것을 빼면 웃음이란 없다. 경치가 아름답다거나, 운치가 있다거나, 숭고하다거나, 보잘것없다거나, 또는 추악하다거나 하는 것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동물을 보고 웃을 때가 있다. 그것은 동물에게서 인간의 태도라든가, 인간적인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자를 보고도 웃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 사람이 조롱하는 것은 펠트나 밀짚 따위가 아니고, 사람이 모자에 부여한 인간의 변덕이다.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이 왜 철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을까? 많은 사람이 인간을 '웃을 줄 아는 동물'로 정의했다. 또한 그들은 사람을 웃길 줄 아는 동물로도 정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이 우리를 잘 웃게 한다고 해도, 이는 인간과 유사하기 때문이거나, 인간이 그것에 새겨놓은 표시나, 또는 인간이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14쪽)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꾼이 되어 삶에 임해보자.

 

순수하게 이지적인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다분히 울 일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웃는 일은 있을 것이다. 반면 언제나 사물에 민감하고 삶의 합창에 공감하고 모든 사건이 감정적인 공명을 수반하게 되어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웃음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시험 삼아 잠시 남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완전히 동화되어, 상상 속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느껴보자. 자신의 공감을 최대한으로 펼치는 것이다. 마법의 지팡이에 한 번 맞은 것처럼 자못 가볍게 보이는 것도 무거워지고 모든 것이 엄숙해짐을 보게 되리라. 다음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꾼이 되어 삶에 임해보자. 대부분의 드라마는 희극으로 바뀔 것이다. 사람들이 춤추는 연회장에서, 음악소리에 귀를 막기만 해도 그들을 바보스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어떤 인간 행위가 이러한 시련에 견딜 수 있을까? 대부분은 그것에 수반하는 감정의 음악을 끄면, 갑자기 엄숙함에서 익살맞음으로 돌변한다. (14∼15쪽)

 

 

 

"나는 이 교구의 사람이 아닙니다."

 

웃음에는 반응이 필요하다. 웃음소리를 잘 들어보자. 그것은 분명하고 또렷한 음이 아니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반응하면서 길게 가려는, 마치 산중의 천둥소리처럼 첫 폭발이 있고 나서도 울림이 이어지는 무언가이다. 그럼에도 이 반응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넓은 범위 안에서도 진행될 수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웃음은 언제나 집단의 웃음인 것이다. 기차나 식당에서 여행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야기가 우스워서 웃는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도 만일 그 가운데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패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도 웃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느 사람에게 모두를 감격의 눈물로 젖게 하는 설교를 듣고도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교구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내가 눈물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 웃음에 대해서는 한층 더 진실해진다. 사람들은 웃음이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웃음은 현실의 또는 가상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합의를 본, 거의 공범이라 할 만한 저의(底意)를 숨기고 있다. 관객석이 꽉 차면 찰수록 극장에서 웃음소리는 널리 퍼진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어 보지 않았는가.(15쪽)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

 

한편 희극적 효과는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한 사회의 습속이나 관념과 연관되어 있음이 몇 번이고 강조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이중의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은 익살 속에서 정신이 흥겨워하는 단순한 호기심과, 다른 인간 활동과는 무관한 유별나고 고립된 현상만을 보아왔다. 그래서 '관념들 속에서 인정된 하나의 추상적 관계', 즉 '지적 대조'라든가 '감각적 부조리' 등으로 희극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비록 실제 희극적인 것의 온갖 형태에 들어맞는다고 해도, 왜 그것이 우리를 웃게 하는지를 조금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온갖 다른 논리적 관계가 우리의 몸을 태연히 방치함에도, 유독 이 특수한 논리적 관계만이 인정된 순간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16쪽)

 

 

 

웃음을 이해하려면

 

웃음을 이해하려면 웃음의 본디 환경인 사회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웃음의 사회적인 역할이라는 유용한 역할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제부터 다룰 이것이 우리 연구의 주축이 된다. 웃음은 공동 생활의 어떤 요구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웃음은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16쪽)

 

 

 

사정이 다른 것을 요구하는데도

 

거리를 달리던 사내가 비틀거리면서 쓰러진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는다. 만일 그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않을 생각이었다고 상상했다면 사람들은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얼떨결에 앉은 것을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웃음을 나오게 한 것은 그의 태도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변화 속에 본의 아닌 것이 있다는 것, 즉 실수이다. 길에 돌멩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걸음걸이를 바꾸거나 아니면 그 장애물을 피해서 지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유연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멍청했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몸이 고집을 부린 탓인지, 사정이 다른 것을 오구하는데도 말하자면 경직이나 외부의 힘 탓으로 근육이 여전히 같은 운동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넘어진 것이고, 이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은 것이다.(16∼17쪽)

 

 

 

방심한 사람이 희극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상한 일일까?

 

어떻게 하면 웃음이 내부로 잠입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경직이 모습을 드러낼 때, 우연한 상황이나 누군가의 장난 같은 걸림돌이 더는 필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경직이 밖으로 나타날 늘 새로운 기회를 자기의 품안에서 자연스럽게 끄집어낼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서 마치 반주에 뒤처지는 선율처럼 언제나 한 것만을 생각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잊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이제는 없는 것을 보거나, 울리지 않는 것을 듣거나, 적합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그래서 결국 현실에 몸을 적응시켜야만 할 때에 여전히 과거의 상상 속에 계속 몸담고 있는 듯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이제 우스개는 그 인물 자체에 깃들어 있다. 이 인물이야말로 소재와 형식, 원인과 계기 모두를 우스개로 제공할 것이다. 방심한 사람(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바로 그 인물들)이 희극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상한 일일까?(17∼18쪽)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어떤 웃음의 원인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될수록 그 웃음은 우리에게 더욱더 희극적으로 다가온다.' 단순한 한 행동으로서 사람이 보여주는 방심이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이다. 그 방심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고, 그 기원도 알며, 그 내력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우스울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서, 평소에 연애 소설이나 기사도 이야기를 즐겨 읽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끌리고 매료되어 그 사람은 자신의 사상과 의지를 차츰 그들 쪽으로 옮겨간다. 이리하여 결국 그는 몽유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의 행위는 방심 행위이다. 다만 이러한 방심 행위는 이미 알고 있는 분명한 원인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더 이상 거짓이나 꾸밈없이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상적이긴 한데, 확실하게 정해진 어느 환경에 속해 있는 인물의 존재로 설명될 수 있는 방심인 것이다.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그럼에도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인 방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 깊이 있는 웃음이 가장 피상적인 웃음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다. 망상가, 광신자, 이들 별난 이유가 있는 미치광이는 그 직장의 짓궂은 희극의 희생자 또는 거리에서 넘어진 통행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같은 내부의 기구를 움직여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이다. 그들 역시 확실히 넘어지는 질주자이고 남에게 비웃음당하는 외골수이고, 현실에 좌절하는 이상주의자, 죄없는 몽상가이다. 하지만 그들이 특히 엄청난 방심가이고, 그 방심이 어느 중심 관념을 기준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그들의 불운한 실패가, 모두 서로 결합되고 더구나 현실이 꿈을 바로잡기 위해 적용하는 가혹한 논리로써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잇따라 겹쳐져 갈 수 있는 효과로 끝없이 커져가는 웃음을 주위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다.(18∼19쪽)

 

 

 

약점과 성격의 관계

 

어느 약점과 성격의 관계는 고정 관념의 경직성과 정신의 관계와 같지 않을까? 약점이란 좋지 않은 굴곡이 천성에 생긴 것이든 의지가 위축되든 간에, 대개 영혼이 휘어진 상태와 비슷하다. 물론 어떤 약점은, 풍부한 능력을 지닌 영혼이 그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서, 그 약점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끊임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돌아다니는 일도 있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약점이다. 그렇지만 웃움을 주는 약점은 이와 반대로 우리가 자신을 그 안에 끼워 넣는 틀처럼 외부에서 가져오는 약점이다. 그것은 부드러움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으면서도 딱딱한 경직성만을 부여한다.(19쪽)

 

 

 

긴장과 탄력

 

생활과 사회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재 자신의 처지를 알도록 끊임없이 기울이는 주의이고, 나아가 우리를 그것에 적응시켜 주는 육체와 정신의 탄력이다. 긴장과 탄력, 이것이야말로 삶이 발동시키는 서로 보완하는 두 힘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 육체에 심하게 부족하면 나타나는 것이 온갖 사고, 허약, 질병이다. 정신이 메마르면 일어나는 것이 온갖 심리적 빈곤, 이런저런 정신 박약이다. 결국 성격에 부족함이 있으면 비참한 처지의 원천, 때로는 죄의 기회가 되는 사회생활에 대한 심각한 부적응을 낳게 될 것이다. 생존과 연관이 있는 이러한 결핍에서 멀어져야만(그것들은 생존경쟁이라 불리는 것 가운데서 자연히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생활할 수 있으며, 특히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살 것을 원한다. 이제야말로 사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각자가 실생활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만족해, 그 밖의 것은 모두 몸에 익힌 습관의 손쉬운 자동 현상에 맡겨 방치하는 것이다. 또 사회가 우려해야만 할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성원이 서로 더욱더 정확하게 맞물려야 할 의지와 의지의 사이에서 좀 더 세심한 평형을 지향하는 대신에, 그 평형의 기본적 조건들만을 존중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야합만으로는 사회에서 충분하지 않다. 사회는 서로 적응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따라서 성격이나 정신 내지 육체의 경직은 사회가 우려하는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그것의 활동이 잠자고 있을지도 모르는 표시이고, 또 그 활동이 고립되어 사회가 이끌고 있는 그 공통적 중심에서 벗어나 있을지도 모르는 표시이며, 요컨데 '중심이탈(excentricit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 때문에 손해를 입는 것은 아니므로 이때 구체적으로 단속하며 간섭할 수는 없다. 사회는 불안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것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징후일 뿐 위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기껏해야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가 그것에 호응할 때에도 몸짓으로 하는 것이다. 웃음이란 이러한 어떤 것, 하나의 사회적 몸짓임에 틀림없다.(21쪽)

 

 

 

경직이 바로 웃음거리이고, 웃음은 그 징벌이다

 

웃음은 그것이 일으키는 불안감 때문에 엉뚱한 행동들을 억제한다. 그리고 자칫하면 고립되어 잠에 빠질 우려가 있는 부차적 부류의 활동을 언제나 일깨우고 서로 접촉시켜둔다. 이로써 결국 사회 집단의 표면에 기계적 경직으로 머물러 있을 듯한 모든 것을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웃음은 그렇기 때문에 순수미학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음은 (무의식적으로, 더구나 개별적인 많은 미적인 면을 보인 경우 부도덕적으로도) 넓은 의미에서 보았을 때 개선이라는 유익한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얼마쯤 미적인 면을 보인다. 왜냐하면 희극성이란 사회와 개인이 그들의 자기 보존의 고뇌에서 벗어나 자아를 예술품으로서 다루기 시작한 바로 그때 탄생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이건 사회이건 그 생활을 위태롭게 하고, 이로써 당연히 제재를 받게 되는 행동이나 성향의 주위에 원을 그린다면, 이 동요와 투쟁의 지역 밖에 사람이 단순한 볼 거리가 되는 중립지대가 생기는데, 여기에 육체와 정신과 성격의 어떤 경직이 잔류하는 것이다. 사회는 그 성원들에게 되도록 더 나은 유연성과 사회성을 주기 위해 이러한 경직을 더욱 제거하려고 한다. 이 경직이 바로 웃음거리이고, 웃음은 그 징벌이다.(21∼22쪽)

 

 

 

하나의 잔꾀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종종 힘을 보태주는 하나의 잔꾀를 시도해 볼 것이다. 원인이 명확해질 때까지 결과를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비대화시켜보자. 그리고 추함에 무게를 더하고, 그것을 꼴사나울 정도로까지 밀고나가 보자. 그리고 왜 꼴사나운 것에서 우스꽝스런 것으로 옮겨가는지를 살펴보자.(23쪽)

 

 

 

희극적인 것은 추함(laideur) 보다는 오히려 경직(raidekur)

 

요컨대 우리의 이성이 동조하는 학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상상력은 자신의 확고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적 형태 속에서 상상력은 물질을 형성하는 정신의 노력을 인정한다. 그 정신이란 한없이 부드럽고, 영원히 움직이며, 지구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중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이 정신은 자신이 생기를 불어넣은 육체에 날개와 같은 경쾌함으로 무엇인가를 전해준다. 이렇게 물질에 흡수되는 비물질성이야말로 사람이 일컫는 우아함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저항하고 계속 버틴다. 그러면서 '비물질성의 우월한 원리가 이룬 언제나 깨어 있는 움직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 고유의 무기력 상태로 고쳐 이를 자동 현상으로 퇴화시키려고 한다. 물질은 또한 육체의 교묘하고도 끊임없는 움직임을 멍청하게도 몸에 밴 버릇으로 굳히려고 한다. 그리하여 얼굴의 생동하는 표정을 계속 찌푸린 표정으로 응결시키려는, 즉 살아 있는 이상과 접촉해 끊임없이 자아를 새롭게 해나가는 대신에,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물질성 속에 빨려들어 몰두하는 듯 보이는 그런 태도를 사람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물질이 그처럼 정신의 삶을 외면적으로 둔중하게 하여 그 운동을 응결시키는 일에, 즉 그 우아함과 모순된 것에 성공한 경우, 육체로부터 해학적 효과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만일 익살을 그 반대물과 대조시켜서 정의한다면 그것은 미보다는 우아함과 대립시켜야 할 것이다. 희극적인 것은 추함(laideur) 보다는 오히려 경직(raidekur)이기 때문이다.(25∼2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을 읽으면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 및 결합방식'을 연구주제로 하고 있는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한다.  『웃음』은 1,900년에 출판되었고 『물질과 기억』은 그보다 앞선 1896년에 출판되었다.

 

 

 

계속되는 관습이 그 사물에 깃들었던 희극적 효력을 잠재웠기 때문에

 

웃음에 대해서 잘못되거나 불충분한 이론이 생긴 이유의 하나는, 계속되는 관습이 그 사물에 깃들었던 희극적 효력을 잠재웠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이론적으로는 희극적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이 희극적 효력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는 연속의 급격한 단절, 유행과의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때 이 연속의 단절이 희극성을 낳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희극성이 우리의 눈에 띄게 할 뿐이다. 사람은 웃음을 기습이라든가 대조 등등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정의는 우리가 웃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많은 상황에도 또 들어맞는다. 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31쪽)

 

 

 

가장과 해학

 

가장한 사람은 해학적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가장한 것으로 생각게 하는 사람 역시 해학적이다. 이것을 더 확대하면 한 인간의 가장뿐만 아니라 사회의 그것도, 또 자연의 그것조차도 가장이란 가장은 모두 해학적이 된다.(32쪽)

 

(나의 생각)

찰리 채플린의 '네모난 콧수염'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탈'을 쓴 탈춤꾼도 마찬가지인 듯하고.

 

 

 

의식이 사회라는 몸과 맺는 관계

 

의식이 사회라는 몸과 맺는 관계는 꼭 옷이 개인의 몸과 맺는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이 지닌 엄숙함은, 우리가 관습 때문에 그 의식을 어떤 중대한 일과 똑같다고 간주하는 데 있다. 우리의 상상력이 의식을 그 중대함에서 분리하자마자 의식은 이 엄숙함을 잃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의식을 익살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의를 의식의 격식에 집중시켜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형상만 생각함으로써 그 질료 쪽을 등한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점을 역설할 필요는 없다. 흔해빠진 상품 수여식에서 공판중인 법정에 이르기까지 꼼짝 못하는 형식의 사회적 행사에서 익살적인 기발한 생각이 얼마나 쉽게 떠오르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33쪽)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생명이 있는 것 위에 붙여진 기계적인 것, 그것이 역시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때 희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산 육체가 경직되어 기계화된다는 사실에서이다. 산 육체는 완전한 유연함, 언제나 기능하는 원리의 늘 깨어 있는 활동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활동은 실은 육체보다도 오히려 정신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급 원리에 의해서 우리 내부에 점화되고 투명화 작용으로 육체를 통해서 감지되는 생명의 불길인 것이다. 우리가 산 육체 속에서 우아함과 유연함만을 보는 까닭은 그 안에 자리한 무게가 있는 것, 저항이 있는 것, 즉 물질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생명력만을 염두에 두어 물질성을 잊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명력이란, 우리의 상상력이 지적 정신적 생활의 원리 그 자체로 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의 주의력을 육체의 이 물질성에 쏟도록 했다고 가정하자. 육체를 살리고 있는 원리의 가벼움에 참여하는 대신에 육체가 우리의 눈에는 이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은 것, 땅을 벗어나고 싶어 애태우는 정신을 지상에 붙들어두는 다리의 짐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상상해보자. 그러면 육체는 정신에 있어서 앞서 말한 의복의 육체 그 자체와 같은 것, 즉 생명의 에너지 위에 놓인 생명이 없는 물질이 될 것 이다. 이리하여 희극의 인상은 우리가 이 겹쳐짐에 확실한 느낌을 갖자마자 생길 것이다. 우리는 특히 사람이 육체의 욕구에 들볶이고 있는 정신을 말할 때에 그 느낌을 감지할 것이다-한편으로는 총명하게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에너지를 갖춘 정신적 인격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와 같은 고집불통에 간섭하고 차단하고 있는 어리석고 단조로운 육체. 이러한 육체의 욕구가 시시하게 일률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되풀이될수록 그 효과는 더욱 더 뼈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단순히 정도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현상의 일반 법칙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신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우리의 주의를 인물의 육체적인 것에 돌리도록 하는 것은 모두 희극이다.(35∼36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걸작『창조적 진화』(1907년 출판)에 담긴 내용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주의력이 갑자기 정신에서 육체로 돌아온 것 때문

 

왜 사람들은 연설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에 재채기 하는 연설가를 보고 웃는 것일까? 독일의 한 철학자가 인용한 다음의 추도사, "고인은 덕도 높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기도 했습니다"의 해학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의력이 갑자기 정신에서 육체로 돌아온 것 때문이다.(36쪽)

 

 

 

희극성이 끼어들 우려

 

따라서 비극 작가는 우리의 주의력을 모을 수 있는 모든 육체적인 측면을 피하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면 희극성이 끼어들 우려가 있다. 비극의 주인공이 마시지 않고, 먹지 않고, 따뜻함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심지어 되도록이면 앉지조차 않는다. 대사를 하다 앉는 행위는 육체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때때로 심리학자 같았던 나폴레옹은 앉는 행위만으로 비극이 희극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구르고 남작의 《미완일기》에 이 문제에 대한 나폴레옹의 생각이 나와 있다.

 

(예나 전쟁 뒤 프러시아 여왕과 회견했을 때 일이다.) "왕비는 쉬멘처럼 비극적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는 '폐하, 정의를! 정의를!' 하면서 나를 몹시 곤란하게 하는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결국 나는 왕비의 태도를 바꾸려고 왕비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비극적인 장면을 끊는데 이처럼 좋은 것은 없다. 사람이 앉으면 그것은 희극이 되기 때문이다.(37쪽)

 

(나의 생각)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온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왕을 맞아들이던 장면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킬레우스도 무엇보다 먼저 '비극'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헥토르의 아버지'에게 무엇보다 먼저 '저녁과 포도주'를 내놓았고, 나중엔 '잠자리'까지 내주었으니까 말이다.

 

 

 

내용보다 뛰어나려는 형식

 

육체가 정신을 앞지른다는 이 형상을 확대해 보자. 우리는 더욱 일반적인 무엇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즉 내용보다 뛰어나려는 형식, 글의 진의에 트집을 잡는 표현, 희극이 어떤 직업을 웃음거리로 만들 때 우리에게 시사하는 관념은 이것이 아닐까. 희극은 마치 의사, 변호사, 재판관으로 하여금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직업의 외적 형식이 어디까지나 존중되는 것이 중요하며, 건강이나 재판 등은 사소한 일인 것처럼 말하게 한다. 이처럼 수단이 목적을, 형식이 내용을 대신하면 이제 직업은 대중을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직업을 위해 대중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된다. 형식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 규칙의 기계적인 적용이 여기에서 하나의 직업적 자동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여러 습관이 정신에게 강요하는 자동운동에 비교할 수 있고, 그것과 똑같이 웃음을 자아낸다.(37쪽)

 

 

 

 

사람이 사물과 같아 보이는 모든 경우는 웃음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중심적 형상으로 되돌아가 보자. 즉 생명이 있는 것 위에 붙여진 기계적인 것에. 여기에서 특히 문제가 되었던 생명이 있는 존재는 인간, 즉 사람이었다. 기계적 장치는 이에 반대로 사물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웃음을 유발시킨 것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사물로 바뀌는 것이다. 거기에서 기계적이라는 명확한 관념에서 사물 전반이라는, 좀더 막연한 관념으로 옮겨보자. 그러면 일련의 새롭고 우스운 이미지가 생긴다. 그것은 이른바 전자의 윤곽을 모호하게 해서 얻는 것으로 우리를 다음의 새로운 법칙으로 이끈다. 즉 사람이 사물과 같아 보이는 모든 경우는 웃음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담요 위에 내던져져 풍선처럼 공중에 튀어오르는 산초 판사를 보고 웃는다. 또 대포알이 되어 공간을 날아가는 뮌히하우젠 남작을 보며 폭소한다.(39쪽)

 

(나의 생각)

산초 판사는 '담요 사건'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일을 당했을 때 느꼈던 비참한 심정을 돈키호테에게 여러 차례 호소한다. '그 때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나리님은 아셨느냐'고 말이다. 그때마다 돈키호테는 어쩔 줄을 모른다. 매번 '그 음악은 제발 틀지마세요~' 라는 말밖에 내놓지 못한다. '인간이 사물로 바뀌는 일'이 얼마나 '우습고도 심각한' 일이었던가를 세르반테스는 훤하게 꿰고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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