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뉴스들에 대해서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다. TV 뉴스를 일부러 시간에 맞춰 보는 일이란 아예 없다고 하는 편이 맞고, 이제는 신문도 거의 들여다보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뉴스가 재미가 없게 되다니...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은 생각도 가끔은 든다. 그런데 별 재미도 없는 뉴스를 굳이 억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은 이미 뉴스가 자기 자신의 '손 안에' 다 들어와 있다. 그러니 뉴스를 일부러 외면하기도 그리 쉽지는 않다. 다른 게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열었다가 자꾸만 저절로 '뉴스'를 보게 되니까.
어제도 그랬다. 나는 정작 다른 무엇인가가 궁금해서 스마트폰을 열었을 뿐인데, 거기엔 이미 온통 '두 여인'이 원인을 제공한 '뜨거운 뉴스' 때문에 열이 바짝 달아 올라 있었다. 거기엔 무수한 댓글과 '뜨거운 공감'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 뉴스들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밖에... 그리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햐아~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로마인이 쓴 책 속의 글이 어쩌면 이 두 여인에게 그토록 들어맞는지 무릎을 탁 칠 지경이었다. 바로 키케로가 쓴『키케로의 의무론』이라는 책 속 글귀들이었다.
키케로가 누구인가. 그는 로마에서 최고의 웅변실력을 자랑했던 인물이자 또한 로마 공화정 말기에 오래도록 정치 무대를 주름잡던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카틸리냐 탄핵을 주도했고, 불세출의 영웅이었던 카이사르와도 맞섰으며, 안토니우스를 공격하는데도 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결국 그는 카이사르가 급작스럽고도 드라마틱하게 암살된 이후 권력 공백기에 다시 등장한 제2차 삼두정치 시대에 이르러 '그 시대의 주역들'로부터 끝내 버림받게 되면서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 쫒긴 끝에 목이 잘리고 만다. 명연설을 토해 내던 그의 목과 그 연설문을 작성했던 손들이 로마 광장 한복판에 내걸렸을 때, 지은 죄(?)가 많았던 그의 혓바닥이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에 의해 밤중에 송곳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모욕까지 당했을 정도로 어쨌든 그는 정말 말을 잘 했던 인물이다.
본래 하고 싶은 말을 쓰기 위해 일부러 늘어 놓은 말이 자꾸 엉뚱한 데로 흐른다 싶다. 이제 그만 '라틴어 산문의 대가'로 평가받는 그 인물이 쓴 글을 직접 들여다 보자.
폭력과 기만
이상으로 전쟁들의 의무에 관해서는 정말 충분히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어 가장 미천한 자들에 대해서조차도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천한 상태와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은 노예들인데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훌륭한 교훈은 그들을 고용 노동자처럼 다루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심하게 일을 시키기는 하되, 의식주와 같은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불의가 행해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폭력과 기만이다. 기만은 마치 여우의 교활함처럼 보이고, 폭력은 마치 사자의 사나움처럼 보인다. 폭력과 기만은 인간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지만, 기만이 더 큰 혐오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모든 불의 중에서도, 남을 가장 기만하면서도 자신은 마치 선인처럼 보이도록 위장하면서 속이는 자들의 불의가 가장 위험하다. (44쪽)
어제 열린 '땅콩 회항' 사건의 첫 공판에서 나온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길게 쓸 것도 없다. 그저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로 요약된다. 심지어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까지도 나왔다.
이보다 훨씬(?) 더 뜨거웠던 뉴스는 바로 '13월의 세금 폭탄'이었다. 그토록 '경제 민주화'와 '증세 없는 복지'를 외쳤던 새로운 정부에서 기껏 '세제 개혁'이라고 내놓은 작품이 그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키케로의 말을 들어 보자.
다수의 증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모든 동기 중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확고히 하는 데는 경애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고, 공포보다 더 낯선 것도 없다. 엔니우스는 정말 감탄조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는 자를 증오하노라.
누구나 자신이 증오하는 자가 죽기를 바라노라.
그런데 어떤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뎌낼 수는 없다. 전에 몰랐다면 최근에는 알았을 것이다. 이 참주,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용하여 국가의 목줄을 눌렀고, 또 그가 죽은 후인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전보다 더 아주 비굴하게 그에게 쩔쩔매고 있는 터인데, 그의 암살은 사람들의 증오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모든 참주들의 유사한 운명에 의해서도 같은 교훈이 도출되는데, 실제로 참주치고 그 누구도 일찌기 이러한 죽음에서 피할 수 있었던 자는 없었던 것이다. 정녕 공포 정치란 단지 권력을 유지시킬 뿐인 나쁜 안전 장치이지만, 이와 반대로 선의(善意)는 실제로 그것을 영구히 믿을 만하게 지켜주는 안전판인 것이다.(129∼130쪽)
지금이 비록 저 당시(카이사르 암살 두세 달 후인 B.C 44년 봄이나 초여름)와 비슷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작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이 매우 가파르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지지율 하락'이 진짜 무서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어떠한 권력도 다수의 증오를 견뎌낼 수는 없다'는 저 변치 않는 진리 때문이 아닐까.
내가 오래 전에 쓰인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오늘날의 뉴스'를 너무 지나치게 의식한 건 아닐까.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키케로가 남긴 여러 명언들 가운데 내가 겨우 딸랑 하나 외우고 있는 인상적인 문장까지도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여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상상했을 정도니까. 내가 기억하는 문장은 바로 다음과 같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 (한참 있다가)
"Ego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이 짧은 두 문장 속에서도 내가 두 여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느꼈다고 해서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키케로의 저 말은 '지금 여기'의 상황과 너무 어울린다. 오늘날의 뉴스와 옛날의 책이 서로 이렇게 '딱'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마주 손뼉을 칠 때도 다 있구나 싶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