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_ 책 읽기와 미래 예언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앨프리드 테니슨,『율리시스』


 * * *




내가 T.S.엘리엇과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하워드 가드너가 쓴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지 싶다. 그 책 속에는 무척이나 난해한 시로 이름난『황무지』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우선 이 불후의 걸작시가 탄생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던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얘기부터 조금 인용해 보자.


『황무지』의 재발견

1968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버그(Berg) 콜렉션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 초고가 발견되었다. 대개는 타자로 친 54페이지 분량의 초고 뭉치였는데, 군데군데 육필 원고도 끼어 있었다. 별다른 표시가 없는 페이지도 있었지만, 여러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뚜렷한 페이지도 있었고, 아예 가위표로 삭제 표시가 그어진 페이지도 있었다. 타자로 친 부분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구어체 영어로 쓰인 대목도 많았고, 우아하고 심원한 문체로 쓰인 대목도 많았다. 각종 유럽어에서 산스크리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쓰인 시행이 페이지 곳곳에 널려 있었다.


흔히 얘기하는 초고와는 달랐다. 20세기 영시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작품이라 할만한 『황무지』의 중간 초고였다.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인이었던 T.S.(Tomas Steams) 엘리엇은 1914년 경에 이 작품(혹은 이 작품에 포함될 운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이르는 초고를 완전히 끝낸 것은 1921년 말이었다. 그는 아내 비비언(Vivien)과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 정착했던 시인으로서 가까운 친구 에즈라 파운드에게 초고를 보여주었다. 이 '우호적인 비평가들'은 엘리엇과 함께 작품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특히 에즈라 파운드는 원래 길이를 반으로 줄여버릴 정도로 가차없이 수정하라는 제안을 했다. 엘리엇 연구자인 헬렌 가드너의 말을 빌면, "파운드는 좋은 구절과 나쁜 구절이 함부로 뒤섞인 초고 뭉치를 한 편의 시로 만들었다."

엘리엇은 파운드의 도움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그는 『황무지』가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으리라 확신하고 미국에서 엘리엇의 출판권을 대리하고 있던 유능한 에이전트 존 퀸(John Quinn)에게 초고를 선물로 보냈다. 퀸은 원고를 받은 이듬해에 사망했고,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초고가 분실되었다. 엘리엇은 아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45년 후에 초고가 발견된 일은 문학상의 미스터리를 밝혔음은 물론, 뛰어난 문학 작품의 탄생 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값진 실마리를 제공했다. 즉, 우호적이면서도 솔직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 것이다. 게다가 이 초고는 고국을 떠난 두 젊은 미국인이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어째서 문명의 쇠퇴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02∼403쪽


 

 

 
엘리엇은 '책을 좋아하고 문예에 밝고 기지가 풍부한 사람으로서 모든 면에서 '하버드 맨'으로 합당했던' 인물이었지만, 결국 하버드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 인문학을 경시하는 대학 풍토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엘리엇은 점차 소외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당시의 보스턴과 세인트루이스와 미국을 싫어했다. 배타적인 학생들, 보스턴의 먹물들, 그리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도시 하층계급에도 정이 떨어졌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삶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엘리엇은 다른 세상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매력을 느꼈다.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철학 공부에도 마음이 끌렸지만, 구체적인 정서와 강렬한 감정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삶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종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10쪽

 

 

졸업 후에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프랑스에서 앙리 베르그송과 에밀 뒤르켐과 같은 석학들의 강의를 들었고, 젊은 프랑스인들과도 사귀었다. 그가 외국에 남아 시인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도 고려해 봤지만, 결국 1911년에 하버드로 되돌아가 철학 박사 과정을 밟는다.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엘리엇은 대학원생이 되어서는 학부 시절보다는 좀더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버드의 철학 교수들도 엘리엇을 높이 평가해서 철학자가 되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런던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20년 가까이 유럽에 머물게 된다. 목가적인 대학 캠퍼스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자의식적인가"라고 그는 공언했다. 이 무렵 그는 경계인의 삶에 만족했고, 작가로서의 삶에 운명을 걸고 이국 땅에서 성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젊은 엘리엇이 편안한 미국인과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예술가로 입신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만한 자신감이 필요했다. 문명의 중심지 파리와 런던에 비해, 여전히 미국은 예술 분야의 업적이 빈약한 낙후된 땅이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와 같은 아주 뛰어난 사람만이 유럽에 훌륭하게 정착했을 뿐이었다. 이런 제임스조차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엘리엣에게는 아이다호 주 출신으로 1908년에 유럽에 이주한 젊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선례가 있었다. 활기차고 논쟁하길 좋아했던 파운드는 이런 성격에다가 다섯 권의 시집으로 영문학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1914년 9월 아직 『프루프록』의 원고를 출판하지 않았던 엘리엇을 만나보고는 금방 이 하버드 출신의 어린 동료에게 굉장한 호감을 보였다. 그는 『포이트리(Poetry)』의 편집자인 해리엇 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루프록』이 미국인이 쓴 시 중에서 최고라고 추켜세웠고, 작가 멩켄(H.L. Mencken)에게는 엘리엇이 "내가 본 최후의 지성인"이라고 말했다.

훗날 엘리엇은 이렇게 썼다.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질은 달랐어도 출신 배경이 같았던 두 사람은 급속히 친해졌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13∼414쪽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여전히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주제라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엘리엇은 1921년말 즈음에 파운드에게 초고를 건넸고, 파운드는 이것을 가차 없이 편집했다는 점'이다. 엘리엇 연구자들은 이제 엘리엇이 수정한 흔적뿐만 아니라 파운드의 제안대로 개고한 흔적까지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광대한 시공간에서 끌어온 다양한 인물의 의식과 사물을 반영하는 온갖 목소리가 담긴 시

오랫동안, 특히 1921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엘리엇은 온갖 다양한 상황을 묘사한 장면과 에피소드를 탈고했다. 현대 런던에서 하층계급이 영위하는 삶,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고전적인 장면, 겨울과 뼈, 사막 등 환기력 강한 이미지가 특징인 자연 현상 묘사, 여러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 고급 문학(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에서 따 온 구절, 평판 높은 작가(포프)의 패러디, 찬미의 송가, 뜨거운 설법, 페니키아 수부(水夫) 이야기, 산스크리트 구절 등이 그것이다. 독자는 이제 곤혹스러운 중년 남자의 언어만이 아니라, 광대한 시공간에서 끌어온 다양한 인물의 의식과 사물을 반영하는 온갖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27쪽


 




엘리엇이 '더 훌륭한 장인(匠人)'으로 불렀던 파운드가 이 작품을 두고 엘리엇에게 얼마나 많은 제안을 했고, 엘리엇이 친구의 제안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랐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결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최종작이 원래의 초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비록 일부 주석가들이 '차라리 더 많은 파운드의 제안을 무시했어야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지만, 하워드 가드너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굳이 양자택일을 한다면, 파운드의 제안을 무조건 따르는 편이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창조적인 걸작품의 탄생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시를 쓸 무렵 엘리엇은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문학계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대단한 성공이 가능한 작품을 난삽하게나마 탈고한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줄지가 의문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가까운 두 사람이 작업을 도와주었고 그들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29쪽

 


『황무지』라는 작품에 대한 반응과 평가까지 여기에 소개하는 건 지나친 과욕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만년의 엘리엇이 "삶에 대한 개인적이고 거의 무의미한 불평에 불과한 ······. 리드미컬한 볼멘소리"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걸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하였지만, 문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성과를 이룬 작품이자 한 세대의 정신을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으로서,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시는 '역사상 거의 없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작품의 의의

엘리엇은 한때는 통합된 전체를 이루었지만 이제는 점차 조각나고 해체되어 무력화된 유럽 문명의 묵시록적 종말, 유럽 문명에 만연되어 있는 병적인 불안감을 시라는 언어 예술에 담아냈다. 그는 몇 년 전에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t Spengler, 1880∼1936)의『서구의 몰락』에서 직설적으로 표명된 메시지를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 『황무지』의 어느 대목에서도 서양 문명이나 인간의 분열 혹은 가치의 몰락이나 부재를 명백하게 언급하는 구절은 없다. 이러한 감수성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었다. ······

엘리엇의 업적은 다른 측면에서도 인상적이다. 『황무지』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어서, 소수의 교양 있는 독자나 이해할 수 있는 시행과 아무리 장황한 주석을 달아도 완전한 해독이 불가능한 암시로 가득한 작품이다. 하지만 『황무지』의 난해성과 심오함은 독자(특히 젊은 독자들)를 속이거나 정떨어지게 하는 대신, 시의 효과를 높이고 독자가 겉으로만 심오한 작품을 읽는 데서 오는 속물적인 만족감을 뛰어넘도록 유도한다. 엘리엇은 개별 시행의 의미가 애매하고 상호 연결이 어색한 5부로 시를 나누어 구성했음에도 시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다른 현대의 문학작품처럼 재독, 삼독이 필요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작품이다). 하나하나의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엘리엇의 비감한 정서를 더욱 뚜렷하고 힘차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 혹은 『봄의 제전』과 『결혼』에 유사한 점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31∼432쪽


 




대략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통해 그토록 난해하다는 엘리엇의 걸작시 『황무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감이라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을까. 어림없는 얘기이다. 이 걸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정말 적잖은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많이 아쉽지만 하워드 가드너가 '엘리엇의 특별한 업적'이라고 설명한 부분만이라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엘리엇은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황무지』는 당대의 다른 어느 시작품보다 동시대 교양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분과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냈다. 500행에서 다소 모자라는 시행에서 엘리엇은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시행 하나하나 연(聯) 하나하나가 의미로 가득했고,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 독립적인 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굉장한 특성으로 인해, 독자는 하나의 거대한 시세계(사실은 다른 세상)를 음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관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분마다 장면마다 구어체 언어와 생생한 희화(戱畵), 한결같은 자연 묘사, 신화적인 이미지, 재기 넘치는 대화, 애상적인 도시 장면, 이야기체의 소품(小品), 음가(音價)를 이용한 언어 유희, 붉은 빛이 강렬한 스냅사진과 같은 이미지 등 수많은 특징이 두드러졌다. 현대의 또 다른 걸작, 가령『율리시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처음에는 한 쪽 방향으로 전개되다가 나중에는 다른 방법으로 변주된 다양한 주제들 역시 작품의 효과를 높이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비록 정연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자는 마치 고대의 모험담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완결된 체험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34∼435쪽



하워드 가드너의 설명을 통해『황무지』라는 걸작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그의 친구 에즈라 파운드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파악하는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산만하게 늘어놓은 느낌이 없지 않다. 이쯤에서 그 유명한 시의 '잘 알려진' 앞부분만이라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다음은 위키백과에서 그대로 옮겨온 내용이다.


 

황무지(The Waste Land)는 모더니즘 시인인 T. S. 엘리어트1922년 출간한 434 줄의 시이다. 이것은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시는 난해함이 지배하는 시로, 문화화 문학에서 넓고, 부조화스럽게 나타나는 풍자와 예언의 전환, 그 분열과 화자의 알려지지 않은 변화들, 위치와 시간, 애수적이지만, 으르는 호출 등이 나타나는 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현대 문학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 유명한 싯구들 중에 첫 행의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손안에 든 먼지만큼이나 공포를 보여주마”(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그리고 마지막 줄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문인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는 유명한 구절들이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여름은 우릴 놀라게 했어요, 슈타른버그 호 너머로 와서
소나기를 뿌리고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
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대공의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Frisch weht der Wind
고향으로 불어요 Der Heimat zu
아일랜드의 님아 Mein Irisch Kind,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Wo weilest du?>

 

 

주석
 

  1. Bennett, Alan (12 July 2009). "Margate's shrine to Eliot's muse". The Guardian. Retrieved 1 September 2009.
  2. 예지력과 아름다움으로 아폴론 신을 매혹시킨 무녀
  3. 독일 바이에른 주 남부의 독일의 네번째로 큰 호수
  4. 독일 뮌헨 중심에 있는 공원
  5. 에스겔(성경, Ezekiel) 2장, 3절, And he said unto me, Son of man, I send thee to the children of Israel, to a rebellious nation that hath rebelled against me: they and their fathers have transgressed against me, even unto this very day.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도 여기서 제목을 가져왔다
  6. 전도서(ecclesiastes) 12:5[1]
  7. 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쿠마에 무녀는 한 줌의 모래만큼 생명을 요구했지만, 그에 따른 젊음은 요청하지 않아서 몸이 쪼글어들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8. 트리스탄과 이졸데(V. Tristan und Isolde, i, verses 5-8.)

 - 출처 : 위키백과


시에 얼마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엘리엇의『황무지』를 여기까지는 읽었지 싶다. 나 또한 이 유명한 시를 까마득한 옛날 그 언젠가 한번쯤 읽은 듯하지만, 그때 내가 이 어려운 시를 도대체 어디까지 읽었는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너무나 어려워서 아주 조금밖에 읽지 못했음이 틀림없지 싶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에 봤던-읽은 게 아니라 그저 눈으로만 살펴봤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 시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목 하나는 바로 페트로니우스의 작품 《사티리콘》(Satyricon)에서 인용했다는 라틴어그리스어 묘비명이다. 특히 '쿠마에 무녀'의 존재는 정말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도대체 그 무녀는 왜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으며, 그녀는 왜 그토록 '죽고 싶어' 안달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쿠마에는 도대체 어디에 '실재'하는 도시이며, 그 무녀는 도대체 어떤 깊은 사연을 지니고 있는지도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나서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새까맣게 잊고 지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신화'를 조금씩 찾아 읽게 되면서 그 무녀의 정체가 나에게도 결코 낯선 인물이 아닌 듯하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옴을 느꼈다. 언젠가 몹시 어렵게 읽었던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고, 이윤기의『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최근에야 겨우 다 읽은 오비디우스의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멀게만 떨어져 있지는 않은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 또한 바로 이 '쿠마에 무녀'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옳을 듯하다.

 




이번 기회에 쿠마에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 지도로 새삼 확인해 보니 그곳은 놀랍게도 나폴리 근처에 있었다. 아, 그곳이라면 내가 처음으로 유럽에 발을 디뎠던 2001년에 어쩌면 슬쩍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곳이 아닌가. 우리 일행이 파리와 런던을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에 도착한 지 사흘쯤 되는 날이었지 싶다. 그 전날만 하더라도 난생 처음 찾아간 로마의 유적지들을 하나라도 빼놓지 않으려고 온종일 바쁜 걸음을 재촉했던 터여서 녹초가 되다시피 했던 우리 일행은 정작 그 다음날 훨씬 더 '기나긴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바로 그날, 우리 일행들은 아마도 거의 새벽 4시쯤에 모닝콜을 들었던 듯하다. 미리 호텔에서 준비해 놓은 '빵 도시락' 비슷한 걸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난 뒤에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 타고 로마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화산재로 뒤덮여 하루 아침에 '황무지'보다 더한 폐허로 뒤바뀐 폼페이를 빠트리지 않고 둘러본 우리는 쏘렌토 항에 도착하자말자 곧바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큰 배를 타고 카프리 섬으로 건너 갔다. 거기에서도 우리에게 한가한 틈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린 또다시 작은 배에 옮겨 타고 '푸른 동굴'로 가야 했으니까. 그래도 배를 타고 지중해의 잔잔한 바다를 건너 다니고, '푸른 동굴' 속에서 이탈리아 남자 뱃사공이 불러주는 '돌아오라 쏘렌토로'를 '생생한 이탈리아어'로 듣는 순간들은 정말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카프리 섬을 떠나 우리가 나폴리 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무렵이었다. 그 때 나폴리에서 우리가 어딜 더 구경했는지는 별다른 기억조차 없다. 아마도 서둘러서 예약된 식당으로 찾아가 저녁을 먹고는 다시 로마로 되돌아오는 먼 길에 오르기 위해 버스에 올라타느라 정신이 없었던 듯하다. 그 뒤에 우리들에게 무섭게 찾아온 손님은 다름아닌 '깊은 잠'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모두 무거운 잠에 빠져들던 바로 그때쯤 우리를 태운 버스가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에 쿠마에를 빠르게 지나쳤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떠오른다. 나폴리 근처에 그 유명한 '쿠마에'라는 도시가 있었고, 그곳에서 시뷜라라는 무녀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살고 있었을 줄은 정말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쿠마에 무녀는 도대체 얼마나 예뻤으면 아폴론이 그토록 큰 소원까지 들어주며 사랑을 애원했던 걸까. 그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으면서 "죽고 싶어"라고 애원하던 괴퍅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번에야 비로소 '실물'로 찾아본 그녀가 너무 예쁜 모습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바로 그 죽고 싶어 애원하던 쿠마에 무녀가 과연 맞는지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쿠마에의 무녀], 도메니키노(Domenichino 1581∼1641), 1610년경, 피나코테카 카피톨리나, 로마


그런데 그녀의 이미지를 조금 더 찾아보니 쿠마에 무녀가 저토록 예쁜 모습으로만 그려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음의 그림을 보라. 그녀는 얼마나 여자답지 못한 모습인가.

 

[쿠마에의 무녀], 미켈란젤로(1475∼1564), 1510년, 프레스코, 시스티나 성당, 바티칸


로마 신화에 따르면 이 무녀는 자신을 사랑한 아폴론 신으로부터 구애를 받으면서 '먼지 알갱이 수만큼 많은 생일'을 선물로 얻었지만 '그 세월이 줄곧 청춘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깜빡하는 바람에 끝없이 늙어가면서도 죽지 못하는 슬픈 운명을 겪는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에 그린 쿠마에 무녀는 결국 늙었으나 여성스러움을 잃어버리고 남성처럼 우람한 근육과 힘을 갖춘 모습으로 뒤바뀌었고, 그녀의 기이하고도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듯한 그림이다.

이왕 미켈란젤로의 그림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갔으면 싶다. 그 천재화가가 교황의 명을 받들어 매우 고된 작업 끝에 1512년에 완성한 시스티나 천장 그림은 높이 20m, 길이 41.2m, 폭 13.2m의 거대한 천장에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 그림은 모두 9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고, 그 9개의 그림 주변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7명과 이방의 예언자인 무녀 5명도 함께 그려졌다. 그 가운데 이방의 무녀는 《페르시아 무녀》, 《에트리아 무녀》, 《델포이 무녀》, 《쿠마에 무녀》, 《리비아 무녀》라고 한다. 천장의 다섯 번째 그림에 아래와 같이 '쿠마에 무녀'가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이번에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유독 시스티나 천장 그림 이야기를 자세히 늘어놓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안타깝게도『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펼치면 '쿠마이의 시뷜레'가 마치 여럿 있었던 것처럼 다소 혼란스럽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대목은 T.S. 엘리엇의 『황무지』와 함께 '쿠마에 무녀' 이야기를 매우 자세히 설명하는 대목이어서 나로서도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었는데 저자의 '혼동스러운 설명' 때문에 뭔가가 좀 아리송했다. 다음의 인용문을 우선 읽어보자.


시뷜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럿이지만 오비디우스나 베르길리우스가 말하는 '쿠마이의 시뷜레(Cumaean Sibyl)'가 가장 유명하다. 오비디우스는 시뷜레가 천 년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뷜레의 수가 많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일한 성격을 지닌 동일 인물이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태어났다는 뜻인 듯하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다섯 명의 시뷜레를 그린 바 있다.

 - 이윤기,『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3』제4장〈소원 성취, 그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

 
이런 설명과 함께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에 그렸던 그림 두 장을 함께 실어 놓았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림 하나는 '쿠마에 무녀'이고 또 다른 그림은 '델포이 무녀' 그림이다. 그런데 이윤기 작가는 그 그림 둘을 한 테두리에 묶어서 '미켈란젤로의 『쿠마이의 시뷜레』'라는 제목을 붙였고, 제목 바로 아래에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다섯 시뷜레의 일부'라는 부연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그 설명과 그림을 함께 읽은 독자들 가운데는 틀림없이 나와 같은 궁금증이나 오해를 품지 않았을까. 다음과 같이 말이다.

"도대체 '쿠마이의 시뷜레'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으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에 무려 '다섯 가지 모습'으로 따로 따로 그려 넣었을까?" 혹은 "'쿠마이의 시뷜레'는 정말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닌 무녀로구나..."

이쯤에서 내 이야기의 무대를 '성당'에서 '황무지'로 다시 되돌리고 싶다. 어쨌든 엘리엇의 작품『황무지』에 인용된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Satyricon)에서는 무녀가 나이를 너무나 많이 먹은 탓에 몸이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로 변해 있다. 비록 목숨은 살아 있지만 몸은 이미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니 그녀의 간절한 염원은 진짜로 죽는 것일 수밖에. 또한 고대의 신화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그러하듯 모든 존재들은 꼭 한 번은 죽어야만 새로운 삶으로의 재탄생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 시뷜라 또한 그런 희망을 위해서라도 간절히 죽음을 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엘리엇이『황무지』라는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 또한 쿠마에의 무녀처럼 '삶 속의 죽음(Death in Life)' 상태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황무지』의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죽은 자들의 행렬을 꼭 빼닮은, 매일 아무런 생각없이 아침 9시에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출근하느라 바삐 런던브릿지를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을 그렸다. 제2부 '체스 한 판'과 제3부 '불의 설교'에서는 공허한 일상과 육체적 욕구만을 채우기 바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거기에는 권태롭고 공허한 욕정만 오갈 뿐 생명력이 넘치는 고결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래서 불모(不毛)의 '황무지'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년 찾아오는 봄비와 꽃향기 가득한 사월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황무지처럼 '잔인'하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아폴론의 사랑' 때문에 유명해진 예언녀를 둘이나 기억하고 있다. 쿠마에의 무녀 시뷜라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신화의 무대에 등장하는 트로이야의 불행한 공주 카산드라를 누가 모르겠는가. 그녀는 아폴론에게 사랑받아 예언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끝내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예언하는 능력 가운데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 트로이야의 멸망을 정확히 예언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트로이야가 완전히 불타고 없어진 뒤 그녀는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되어 그리스 군대의 배를 타고 뮈케나이로 끌려갔다가 정부(情夫)와 짜고 왕의 귀환과 목숨을 동시에 기다려왔던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손에 의해 왕과 함께 피살되고 만다.(이때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 아이스퀼로스의『아가멤논』이며, 카산드라는 이 작품뿐 아니라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인 『트로이아 여인들』에도 등장한다.)

아폴론 신으로부터 구애를 받았으나 그 사랑을 거부했던 트로이야 공주의 운명은 비참했다. 예언녀로서의 명성 뿐만 아니라 아폴론의 사랑까지도 동시에 얻었고, 신의 은총으로 '먼지만큼 수많은 생일'을 누릴 수 있게 된 시뷜라 역시 아폴론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탓에 가혹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아폴론가 비록 그녀의 바람대로 기나긴 인생을 살고 싶은 소원까지는 들어주었으나, '청춘'마저 그만큼 오래 함께 누리도록 만들어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신화의 무대에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언제였을까. 내가 알기로는 트로이야가 멸망한 이후 아이네아스가 그곳을 떠나 천신만고끝에 드디어 이탈리아 땅에 도착하던 무렵이었다. 말하자면 그녀의 데뷔 무대는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볼리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대서사시『아이네이스』가 아닐까 하는 게 나의 판단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가 카산드라 공주보다 조금 더 늦게 신화에 등장하지만 그녀의 나이가 카산드라 공주보다 어렸던 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신화의 무대에 데뷔했을 때, 즉 쿠마에의 동굴에서 아이네아스를 만났을 때는 그녀가 태어난지도 이미 7세기가 흐른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 '아이네아스'는 나폴리 근처 쿠마에의 깊은 동굴에 살고 있는 예언녀 시뷜라에게 찾아간 뒤 그녀의 도움으로 (신화 속의 영웅들만이 다녀올 수 있는) 저승까지 내려가 아버지 앙키세스를 만난다. 거기서 아이네아스는 자기 자신과 후손들의 미래를 자세히 듣게 되는데, 이 부분은『아이네이스』의 제6권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다'에 담겨 있다. 무려 901행에 달하는 제6권의 내용 가운데 내가 여기서 인용하고 싶은 부분은 다음의 두 대목이다.

우선, 아이네아스가 예언녀 시뷜라에게 간청하는 대목부터 살펴 보자. 영웅 아이네아스가 늙고 추하게 변한 무녀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는지 그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래사를 미리 알고 있는 가장 신성한 예언녀여!
그대는 테우케르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며 폭풍에 시달리던
트로이야의 신들과 함께 라티움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소서.
그러면 나는 포이부스와 트리비아를 위해 대리석으로 된 신전을
세울 것이며, 포이부스의 이름으로 축제일들을 정할 것입니다.
그대도 우리 왕국에 큰 신전을 갖게 될 것인즉, 나는 그곳에
그대의 신탁들과 그대가 우리 백성들에게 말한 수수께끼 같은
예언들을 안치하고 그것들을 위해 사제들을 선임할 것입니다.
자비로운 이여, 그대의 노래들을 한갓 나뭇잎에 맡기지 마옵소서.
그것들이 낚아채는 바람의 노리개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부디 직접 노래해 주십시오."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제6권 65∼76행


두 번째로 인용하고 싶은 대목은 아이네아스의 아버지 앙키세스가 저승에까지 찾아온 아들에게 '로마의 미래'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대목이다. '위대한 로마'의 탄생과 그 영광스런 로마를 세울 영웅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쿠마이의 무녀'를 통해 아이네아스가 비로소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운명적이고도 세계사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곧 이어 앙키세스는 아들과 시뷜라를 데리고
혼백들의 요란한 무리 한가운데로 가서 둔덕 위에 자리잡고 섰다.
그곳에서 그는 긴 행렬을 지어 다가오는 자들을 앞에서
살펴보며 지나가는 자의 얼굴을 분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너에게 다르다누스의 자손들이 어떤 영광을 누리는지,
이탈리아의 부족에게서 네가 어떤 후손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
설명해주겠다. 앞으로 우리의 이름을 계승하게 될
찬란한 혼백들 말이다. 또 너에게 네 자신의 운명도 가르쳐주겠다.
······
로마인이여, 너는 명심하라.
귄위로써 여러 민족들을 다스리고, 평화를 관습화하고,
패배한 자들에게는 관용하고, 교만한 자들은 전쟁으로 분쇄하도록 하라.
"
······
"일리움의 혈통에서 태어난 어떤 소년도 라티움의 선조들을
그토록 희망에 들뜨게 하지는 못할 것이며, 로물루스의 나라는
다시는 그토록 자기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아아, 그의 경건이여, 아아, 그의 고풍스런 성실성과
전쟁에서 패배를 모르는 오른손이여! 그가 보병으로 적에게 다가가든,
또는 거품 같은 땀을 흘리는 말들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든,
어느 누구도 벌받지 않고는 그와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아아, 가련한 소년이여, 가혹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면,
너는 진정한 마르켈루스가 될 텐데. 너희들은 내가 빛나는 백합들을
두 손으로 듬뿍 뿌려, 설사 그것이 소용없는 짓이라 하더라도,
내 자손의 혼백 위에 이런 선물이나마 수북이 쌓아올리는 것을
허락해다오." 이렇게 그들은 대기의 넓은 들판들을 사방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앙키세스는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그곳의 광경을 일일이 보게 하고
다가올 명성에 대한 욕망으로 그의 마음에 불을 지른 다음,
머지않아 그가 치르게 될 전쟁들과 라우렌툼의 백성들과
라티누스의 도시에 관해,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가 모든 위기를
피하거나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일러주었다.

 -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제6권 752∼892행(부분 발췌)

 

위에서 인용한 두 대목만 보더라도 로마 건국에 있어서 쿠마에의 무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떠맡았던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 그녀가 왜 그토록 여러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던가도 아울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던 오비디우스 또한 자신의 걸작『변신 이야기』를 통해 시뷜라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를 인용할 차례가 되었다.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에서 시뷜라와 아이네아스에게 부여된 '무거운 사명'을 장중하고도 생동감 넘치도록 매우 길게 펼쳐놓은 데 반해,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천재 시인 오비디우스는 어쩌면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핵심은 조금도 빠트리지 않고' 노래할 수 있었는지 시인의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그는 이곳들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는 파르테노페의
성벽 옆을, 왼쪽으로는 나팔수인, 아이올루스의 아들의 무덤과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 옆을 지나 쿠마이의 해안에
도착한 다음 장수(長壽)하는 시뷜라의 동굴로 들어가서는
아베르나를 지나 아버지의 망령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시뷜라는 한참 동안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마침내 신에 씌어 눈을 들더니 말했다.
"그대는 큰 것을 요구하시는구려, 그 손은 칼에 의해,
그 경건함은 불에 의해 검증된 위대한 행적의 영웅이여.
하지만 두려워 마시오, 트로이야인이여! 그대는 소원을 이루어
내 인도 아래 엘뤼시움의 거처들과, 우주의 마지막 왕국과,
아버지의 소중한 환영을 보게 될 것이오.
미덕이 갈 수 없는 길은 없어요." 그러더니 그녀는
아베르나의 유노의 숲에서 황금으로 빛나는 가지를
가리키며 그것을 줄기에서 꺾으로고 명령했다.
아이네아스는 시키는 대로 하여 무시무시한 오르쿠스의
부(富)와, 자신의 선조들과, 고매한 앙키세스의 연로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또 그곳의 법과, 새로운 전쟁에서
자신이 어떤 위험을 겪어야 하는지도 배웠다.
그곳으로부터 지친 발걸음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그는
쿠마이의 안내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노고를 덜었다.
그는 어두침침한 어스름을 지나 무시무시한 길을 걸으며 말했다.
"그대가 여신으로서 내 곁에 있든 아니면 신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소녀이든 간에, 나는 그대를 언제나 신성으로 여길 것이며,
내 모든 것이 그대 덕분이라고 고백할 것이오. 그대의 뜻에 따라
나는 죽음의 세계에 다가가 그것을 보고 나서 그 세계에서 무사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나는 지상의 대기로 돌아가게 되면
그대를 위해 신전을 세우고, 그대의 명예를 위해 분향할 것이오."
그러자 예언녀가 그를 돌아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여신이 아니며, 인간의 머리는 그 누구도 분향의 명예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대가 몰라서 실수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하는 말이지만, 나는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어요. 만약 내 처녀성이 포이부스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말예요.
그분은 그것을 바라며 선물로 미리 나를 매수하고 싶어 말했어요.
"쿠마이의 소녀여, 그대가 원하는 것을 고르도록 하라!
그러면 그대는 원하는 것을 갖게 되리라." 나는 한줌의
먼지 무더기를 가리키며 어리석게도 그 먼지 알갱이 수만큼
많은 생일을 갖고 싶다고 했어요. 하나 그 세월이 줄곧
청춘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깜빡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그 세월뿐만 아니라 영원한 청춘도 주시려고 했어요. 내가 그분의
사랑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말예요. 하나 나는 포이부스의 선물을
무시하고 여태 미혼으로 남아 있어요. 어느새 행복한 시절은 내게
등을 돌리고 병약한 노령이 떨리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을 나는 오랫동안 참고 견뎌야 해요. 나는 벌써 일곱 세기를
보냈지만, 내 나이가 먼지 알갱이 수와 같아지려면 아직도
삼백 번의 수확기와, 삼백 번의 포도 수확을 더 보아야 해요.
긴긴 세월이 내 이 몸을 왜소하게 만들고 노령에 시든
내 사지가 최소의 무게로 오그라들 때가 오겠지요.

그러면 나는 사랑 받았던 여자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신의 마음에 들었던 여자로도 보이지 않겠지요. 포이부스 자신도
아마 나를 몰라보거나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하시겠지요.
나는 그만큼 변해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겠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그 목소리로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게 될 거예요."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제14권 101∼153행

 





[쿠마에의 시뷜레].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1450년경, 빌라 카르두치의 벽면, 산타폴로니아 수도원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도 있었던 시뷜라가 결국 신의 사랑을 외면한 댓가로 얻은 건 '죽음같은 삶의 오랜 지속'  뿐이었다. 결국 그녀에게는 죽음만이 유일하고도 간절한 소망일 수밖에 없겠다는 걸 이제야 나도 뚜렷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왜 하필이면 쿠마에의 무녀를 맨 앞에 등장시켰는지 그 이유도 조금쯤은 알 것만 같다. 우리는 굳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무릇 모든 생명들은 필멸의 존재이며,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쿠마에의 무녀가 그토록 간절히 죽음을 원하는 이유 또한 '소생과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엘리엇이『황무지』에 담고자 했던 그저 음울하고, 아무런 가망도 없이, 노쇠하고 상실감에 사로잡힌, 그런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내던져진 게 아니라는 느낌 또한 어쩌면 시뷜라의 '죽고 싶어'라는 말 속에서 찾아낼 수도 있을 듯하다.

다시 엘리엇의 작품『황무지』를 둘러싼 얘기로 되돌아 오자. 엘리엇으로부터 '보다 나은 예술가'라는 칭송을 받은 에즈라 파운드는 한때 강력한 노벨상 후보였으나 끝내 그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도움으로 그보다 훨씬 더 유명한 작가가 된 사람은 엘리엇만이 아니고 제임스 조이스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도 포함된다고 하는데,『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을 통해 하워드 가드너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한 가지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마치 희귀종 생물처럼 자신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을 금방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다. '젊은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일찍부터 막스 자코브와 거트루드 스타인, 기욤 아폴리네르, 앙리 마티스, 조르쥬 브라크와 만나 어울렸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전념한 지 한두 해 만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바슬라프 니진스키와는 늦은 저녁을 함께 먹고, 클로드 드뷔시와 모르스 라벨과는 작곡 기법을 서로 얘기하면서 칭찬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엘리엇 또한 젊은 시절부터 이들 조숙한 천재들과 비슷한 패턴을 보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비록 만년에는 조금 쌀쌀맞은 사람이 됐지만... 가드너의 말이다.
 

엘리엇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예술가를 존경했다.

엘리엇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예술가를 존경했다. 당대의 걸출한 대가로 인정한 제임스 조이스에게는 경외감마저 느꼈다. 그는 『황무지』와 거의 동시에 출간된 『율리시스』를 한 세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이라 여겼는데, 조이스는 이 책에서 엘리엇이 겨우 433행의 시로 나타내고자 했던 현재와 과거의 초상을 25만 단어로 (어조만은 좀더 의기양양하게) 묘사했다. 엘리엇은 『피네건의 경야』출간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는 조이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는데, 어쩌면 그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말일 수도 있다. "내가 존경하는 조이스는 외부의 자극에 초연하고 죽을 때까지 1급의 작품을 창조할 사람이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48쪽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작품『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다.(로마 신화에서 오뒷세우스는 '울릭세스'로 불린다.) 물론 조이스의 소설『율리시스』의 세 주요 부분-「텔레마키아드」,「오뒷세우스의 방랑」및「귀환」-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의 그것들과 병행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제임스 조이스의 그 소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같은 호메로스의『오뒷세이아』를 바탕으로 쓴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라는 시가 훨씬 더 쉽게 다가오고 또 내 마음에도 든다. 왜냐하면 그 시인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오랜 방랑 끝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영웅 오뒷세우스를 그저 안락한 삶에 머무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또다시 새로운 탐험에 나서는 것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인데, 이 시인의 노래는 얼마나 쉽고도 또 호소력이 강한가.(깜빡 잊을 뻔했다. '쿠마에의 무녀'에게는 이 시인의 노래가 과연 어떻게 들릴까. 아마도 나와는 딱 '정반대의 느낌'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그녀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대로 틀림없이 '이미' 죽었을테니 말이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다.
나는 내 삶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어 마시겠다. 나는 언제나
기쁨도 고통도 최대한 누리고 겪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또 혼자서도.
언제나 굶주린 마음으로 방랑하며
많이 보고 많이 배웠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란 내가 다가갈 때마다
그 가장자리가 한없이 희미해져가는 미지의 세계가
어렴풋이 빛나는 하나의 아치문 같은 것이다.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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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엘리엇의 걸작『황무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내 글을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다가 문득 몽테뉴가 했던 다음의 말이 떠올랐다. 맞다. 바로 그거였구나.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글을 써내려 왔구나 싶었다.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나는 나 자신을 이 세기에는 쓸모 없는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세기로 뛰어들며, 그들에게 완전히 반해서 옛날의 그 자유롭고 정의롭고 융성하던 로마에(나는 로마의 시초나 노쇠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흥미를 느끼며 열중한다. 그 때문에 나는 그들 거리와 옛 집터와 세상의 양극까지 이르는 그들의 깊은 폐허를 그렇게 자주 찾아 보아도 흥미를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것을 기억해 두는 일, 권장되는 인물들이 자주 찾아다니고 살고 하던 곳인 줄을 알아 방문할 때에, 그들의 발자취 이야기를 듣거나 작품을 읽는 것보다도 어느 점에서 더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은 우리들의 본성이 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 공상의 속임수에 의한 것인가?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키케로) 나는 그들의 용모와 자세와 의복을 고찰해 보기가 재미난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내 입에 올려 보며, 그것을 내 귀에 울려 오게 한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면 이런 위대한 이름들 앞에 일어선다."(세네카) 그 어떤 부분들도 위대하고 감탄할 만한 이런 사물들 중에, 나는 바로 그 평범한 부분들에 감탄한다. 나는 그들이 잡담하며 산책하며 식사하는 것을 보았으면 한다. 그들의 살아가고 죽고 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그들을 좇을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시범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그 많은 훌륭하고 용감한 인물들의 유적과 모습들을 경멸한다는 것은 배은망덕이 될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1108쪽


테니슨의 말처럼 나도 아직은 '여행을 그만두고' 쉬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서 나는 옛 고전들을 읽으며 '아직도 옛 이름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장소들'을 언젠가는 꼭 한번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으면서 지도 위에 표시해 두었던 흔적들을 다시금 꺼내 보았다.(아래에 나열한 지도들이 실려 있는 책들은 모두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작품에 딸린 지도'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겉모습만은 똑같은 그림이 적지 않다.) 

몽테뉴의 말대로 그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이 우리들의 본성이 시키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들 공상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든 그 어느 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어쨌든 나는 저 지도 위에 표시된 무수히 많은 도시들을 언젠가는 꼭 나의 두 발로 직접 둘러 보고 싶다. 까마득한 옛날에 비하면 '여행의 노고'는 따져볼 필요도 없다.


 -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576쪽



 -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577쪽




 -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579쪽




 -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580쪽




 -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아이네이스』581쪽




 -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794쪽



 -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795쪽



 -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796쪽




 -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797쪽



 -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798쪽




 -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799쪽 (이 지도에 '쿠마이'가 보인다.)




 -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의 옮김, 『역사』995쪽



 -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의 옮김, 『역사』996쪽




 -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의 옮김, 『역사』997쪽




 -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의 옮김, 『역사』998쪽




 -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의 옮김, 『역사』999쪽




 -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734∼735쪽




 -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736∼737쪽




 -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738∼739쪽




 -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740∼741쪽




 - 플루타르코스, 지음, 천병희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742∼7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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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튤립과 백수오
    from Value Investing 2015-05-01 14:32 
    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은 자라고추억과 정욕이 뒤섞이고잠든 뿌리가 봄비로 깨어난다.차라리 겨울은 따스했거니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메마른 구근으로 작은 목숨을 이어줬거니. - T.S.엘리어트의 황무지 <1> 매장(埋葬)' 중에서 * * * 또 한 번의 4월이 지나갔다. 그 누군가에게는 틀림없이 '내 삶에서 가장 잔인한 달'로 각인된 채로... T.S. 엘리어트가 『황무지(荒蕪地)』를 쓰지 않았더라도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