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_ 책 읽기와 미래 예언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앨프리드 테니슨,『율리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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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T.S.엘리엇과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하워드 가드너가 쓴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지 싶다. 그 책 속에는 무척이나 난해한 시로 이름난『황무지』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우선 이 불후의 걸작시가 탄생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던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얘기부터 조금 인용해 보자.
『황무지』의 재발견
1968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버그(Berg) 콜렉션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 초고가 발견되었다. 대개는 타자로 친 54페이지 분량의 초고 뭉치였는데, 군데군데 육필 원고도 끼어 있었다. 별다른 표시가 없는 페이지도 있었지만, 여러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이 뚜렷한 페이지도 있었고, 아예 가위표로 삭제 표시가 그어진 페이지도 있었다. 타자로 친 부분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구어체 영어로 쓰인 대목도 많았고, 우아하고 심원한 문체로 쓰인 대목도 많았다. 각종 유럽어에서 산스크리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쓰인 시행이 페이지 곳곳에 널려 있었다.
흔히 얘기하는 초고와는 달랐다. 20세기 영시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작품이라 할만한 『황무지』의 중간 초고였다.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인이었던 T.S.(Tomas Steams) 엘리엇은 1914년 경에 이 작품(혹은 이 작품에 포함될 운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이르는 초고를 완전히 끝낸 것은 1921년 말이었다. 그는 아내 비비언(Vivien)과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 정착했던 시인으로서 가까운 친구 에즈라 파운드에게 초고를 보여주었다. 이 '우호적인 비평가들'은 엘리엇과 함께 작품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특히 에즈라 파운드는 원래 길이를 반으로 줄여버릴 정도로 가차없이 수정하라는 제안을 했다. 엘리엇 연구자인 헬렌 가드너의 말을 빌면, "파운드는 좋은 구절과 나쁜 구절이 함부로 뒤섞인 초고 뭉치를 한 편의 시로 만들었다."
엘리엇은 파운드의 도움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그는 『황무지』가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으리라 확신하고 미국에서 엘리엇의 출판권을 대리하고 있던 유능한 에이전트 존 퀸(John Quinn)에게 초고를 선물로 보냈다. 퀸은 원고를 받은 이듬해에 사망했고,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초고가 분실되었다. 엘리엇은 아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45년 후에 초고가 발견된 일은 문학상의 미스터리를 밝혔음은 물론, 뛰어난 문학 작품의 탄생 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값진 실마리를 제공했다. 즉, 우호적이면서도 솔직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 것이다. 게다가 이 초고는 고국을 떠난 두 젊은 미국인이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어째서 문명의 쇠퇴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02∼403쪽

엘리엇은 '책을 좋아하고 문예에 밝고 기지가 풍부한 사람으로서 모든 면에서 '하버드 맨'으로 합당했던' 인물이었지만, 결국 하버드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 인문학을 경시하는 대학 풍토에 고통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엘리엇은 점차 소외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당시의 보스턴과 세인트루이스와 미국을 싫어했다. 배타적인 학생들, 보스턴의 먹물들, 그리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도시 하층계급에도 정이 떨어졌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삶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엘리엇은 다른 세상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매력을 느꼈다. 훨씬 오랜 역사와 더 위대한 문학 유산을 가진 나라, 종교와 영혼의 문제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아이러니의 깊은 의미를 아는 땅인 프랑스와 영국에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철학 공부에도 마음이 끌렸지만, 구체적인 정서와 강렬한 감정 그리고 자신을 짓누르는 삶과 문명에 관한 생각을 종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의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10쪽
졸업 후에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프랑스에서 앙리 베르그송과 에밀 뒤르켐과 같은 석학들의 강의를 들었고, 젊은 프랑스인들과도 사귀었다. 그가 외국에 남아 시인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도 고려해 봤지만, 결국 1911년에 하버드로 되돌아가 철학 박사 과정을 밟는다.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엘리엇은 대학원생이 되어서는 학부 시절보다는 좀더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버드의 철학 교수들도 엘리엇을 높이 평가해서 철학자가 되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런던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20년 가까이 유럽에 머물게 된다. 목가적인 대학 캠퍼스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이다. "대도시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자의식적인가"라고 그는 공언했다. 이 무렵 그는 경계인의 삶에 만족했고, 작가로서의 삶에 운명을 걸고 이국 땅에서 성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젊은 엘리엇이 편안한 미국인과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예술가로 입신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만한 자신감이 필요했다. 문명의 중심지 파리와 런던에 비해, 여전히 미국은 예술 분야의 업적이 빈약한 낙후된 땅이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와 같은 아주 뛰어난 사람만이 유럽에 훌륭하게 정착했을 뿐이었다. 이런 제임스조차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엘리엣에게는 아이다호 주 출신으로 1908년에 유럽에 이주한 젊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선례가 있었다. 활기차고 논쟁하길 좋아했던 파운드는 이런 성격에다가 다섯 권의 시집으로 영문학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1914년 9월 아직 『프루프록』의 원고를 출판하지 않았던 엘리엇을 만나보고는 금방 이 하버드 출신의 어린 동료에게 굉장한 호감을 보였다. 그는 『포이트리(Poetry)』의 편집자인 해리엇 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루프록』이 미국인이 쓴 시 중에서 최고라고 추켜세웠고, 작가 멩켄(H.L. Mencken)에게는 엘리엇이 "내가 본 최후의 지성인"이라고 말했다.
훗날 엘리엇은 이렇게 썼다. "1914년에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질은 달랐어도 출신 배경이 같았던 두 사람은 급속히 친해졌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13∼414쪽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여전히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주제라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엘리엇은 1921년말 즈음에 파운드에게 초고를 건넸고, 파운드는 이것을 가차 없이 편집했다는 점'이다. 엘리엇 연구자들은 이제 엘리엇이 수정한 흔적뿐만 아니라 파운드의 제안대로 개고한 흔적까지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광대한 시공간에서 끌어온 다양한 인물의 의식과 사물을 반영하는 온갖 목소리가 담긴 시
오랫동안, 특히 1921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엘리엇은 온갖 다양한 상황을 묘사한 장면과 에피소드를 탈고했다. 현대 런던에서 하층계급이 영위하는 삶, 신화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고전적인 장면, 겨울과 뼈, 사막 등 환기력 강한 이미지가 특징인 자연 현상 묘사, 여러 언어로 이루어진 대화, 고급 문학(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에서 따 온 구절, 평판 높은 작가(포프)의 패러디, 찬미의 송가, 뜨거운 설법, 페니키아 수부(水夫) 이야기, 산스크리트 구절 등이 그것이다. 독자는 이제 곤혹스러운 중년 남자의 언어만이 아니라, 광대한 시공간에서 끌어온 다양한 인물의 의식과 사물을 반영하는 온갖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27쪽

엘리엇이 '더 훌륭한 장인(匠人)'으로 불렀던 파운드가 이 작품을 두고 엘리엇에게 얼마나 많은 제안을 했고, 엘리엇이 친구의 제안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랐는지를 따져보는 일은 결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최종작이 원래의 초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비록 일부 주석가들이 '차라리 더 많은 파운드의 제안을 무시했어야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지만, 하워드 가드너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굳이 양자택일을 한다면, 파운드의 제안을 무조건 따르는 편이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보다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황무지』의 작시 과정은 창조적인 걸작품의 탄생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시를 쓸 무렵 엘리엇은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불행했고, 문학계에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대단한 성공이 가능한 작품을 난삽하게나마 탈고한 상태였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줄지가 의문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행운아였다. 가까운 두 사람이 작업을 도와주었고 그들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29쪽
『황무지』라는 작품에 대한 반응과 평가까지 여기에 소개하는 건 지나친 과욕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만년의 엘리엇이 "삶에 대한 개인적이고 거의 무의미한 불평에 불과한 ······. 리드미컬한 볼멘소리"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걸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하였지만, 문학 분야에서 혁명적인 성과를 이룬 작품이자 한 세대의 정신을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으로서,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시는 '역사상 거의 없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작품의 의의
엘리엇은 한때는 통합된 전체를 이루었지만 이제는 점차 조각나고 해체되어 무력화된 유럽 문명의 묵시록적 종말, 유럽 문명에 만연되어 있는 병적인 불안감을 시라는 언어 예술에 담아냈다. 그는 몇 년 전에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t Spengler, 1880∼1936)의『서구의 몰락』에서 직설적으로 표명된 메시지를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다. 『황무지』의 어느 대목에서도 서양 문명이나 인간의 분열 혹은 가치의 몰락이나 부재를 명백하게 언급하는 구절은 없다. 이러한 감수성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었다. ······
엘리엇의 업적은 다른 측면에서도 인상적이다. 『황무지』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어서, 소수의 교양 있는 독자나 이해할 수 있는 시행과 아무리 장황한 주석을 달아도 완전한 해독이 불가능한 암시로 가득한 작품이다. 하지만 『황무지』의 난해성과 심오함은 독자(특히 젊은 독자들)를 속이거나 정떨어지게 하는 대신, 시의 효과를 높이고 독자가 겉으로만 심오한 작품을 읽는 데서 오는 속물적인 만족감을 뛰어넘도록 유도한다. 엘리엇은 개별 시행의 의미가 애매하고 상호 연결이 어색한 5부로 시를 나누어 구성했음에도 시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면(다른 현대의 문학작품처럼 재독, 삼독이 필요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작품이다). 하나하나의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엘리엇의 비감한 정서를 더욱 뚜렷하고 힘차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 혹은 『봄의 제전』과 『결혼』에 유사한 점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31∼432쪽

대략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통해 그토록 난해하다는 엘리엇의 걸작시 『황무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감이라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을까. 어림없는 얘기이다. 이 걸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정말 적잖은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많이 아쉽지만 하워드 가드너가 '엘리엇의 특별한 업적'이라고 설명한 부분만이라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엘리엇은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황무지』는 당대의 다른 어느 시작품보다 동시대 교양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기분과 주제를 풍부하게 담아냈다. 500행에서 다소 모자라는 시행에서 엘리엇은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시행 하나하나 연(聯) 하나하나가 의미로 가득했고,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 독립적인 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굉장한 특성으로 인해, 독자는 하나의 거대한 시세계(사실은 다른 세상)를 음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관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분마다 장면마다 구어체 언어와 생생한 희화(戱畵), 한결같은 자연 묘사, 신화적인 이미지, 재기 넘치는 대화, 애상적인 도시 장면, 이야기체의 소품(小品), 음가(音價)를 이용한 언어 유희, 붉은 빛이 강렬한 스냅사진과 같은 이미지 등 수많은 특징이 두드러졌다. 현대의 또 다른 걸작, 가령『율리시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처음에는 한 쪽 방향으로 전개되다가 나중에는 다른 방법으로 변주된 다양한 주제들 역시 작품의 효과를 높이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 『황무지』는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정신, 즉 현대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생각을 농밀하고 강렬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비록 정연한 서사와는 거리가 멀지만, 독자는 마치 고대의 모험담을 읽을 때처럼 하나의 완결된 체험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34∼435쪽
하워드 가드너의 설명을 통해『황무지』라는 걸작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그의 친구 에즈라 파운드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파악하는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산만하게 늘어놓은 느낌이 없지 않다. 이쯤에서 그 유명한 시의 '잘 알려진' 앞부분만이라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다음은 위키백과에서 그대로 옮겨온 내용이다.
황무지(The Waste Land)는 모더니즘 시인인 T. S. 엘리어트가 1922년 출간한 434 줄의 시이다. 이것은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시는 난해함이 지배하는 시로, 문화화 문학에서 넓고, 부조화스럽게 나타나는 풍자와 예언의 전환, 그 분열과 화자의 알려지지 않은 변화들, 위치와 시간, 애수적이지만, 으르는 호출 등이 나타나는 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현대 문학의 시금석이 되었다. 그 유명한 싯구들 중에 첫 행의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손안에 든 먼지만큼이나 공포를 보여주마”(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그리고 마지막 줄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문인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는 유명한 구절들이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여름은 우릴 놀라게 했어요, 슈타른버그 호 너머로 와서
소나기를 뿌리고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대공의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Frisch weht der Wind
고향으로 불어요 Der Heimat zu
아일랜드의 님아 Mein Irisch Kind,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Wo weilest du?>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