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B.C. 83년에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그 '무녀'들의 예언들은-그 중 많은 부분은 여자 예언자들이 예언한 사건 이후에 태어난 인간 시인에 의해 창작된 것이 분명한데-그리스, 로마, 팔레스타인과 기독교 유럽에서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 예언들은 큐메의 여자 예언자에 의해 손수 아홉 권의 책으로 묶여 고대 로마의 7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앞에 제시되었다. 타르퀴니우스가 돈을 지불하려 하지 않자 그 여자 예언자는 그 책 중 3권을 불태웠다. 또다시 그가 거절하자 그녀는 또 다른 3권에 불을 질렀다. 결국 왕은 원래의 9권 값을 다 치르고 남은 3권을 구입했는데, 그 책들은 B.C. 83년에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주피터 사원 및 돌로 만든 지하실의 상자 안에 보관되었다.(290∼291쪽)

 

 

예수 탄생일이 동지에 가까운 날로 옮겨진 사연

 

원래 소아시아 출신이었던 콘스탄티누스의 가족은 태양을 아폴로 신, 즉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로마 최고의 신으로 소개했던 바로 그 무적의 신으로 숭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리키니우스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것으로 그대는 승리를 얻으리라"라는 경구가 새겨진 십자가의 환상을 받았던 것도 태양으로부터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은 그의 어머니가 갈보리 언적 가까운 곳에서 발굴했다는, 진짜 십자가에 박혔던 못으로 만든 햇살 무늬 왕관이었다. 그 태양신의 광휘가 얼마나 막강했던지 콘스탄티누스가 죽고 17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예수 탄생일-크리스마스-이 태양의 탄생일인 동지에 가까운 날로 옮겨지기에 이르렀다.(293쪽)

 

 

각자가 좋아하는 종교를 따를 자유를 누리는 게 옳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제국의 정권을 나눠 가졌다가 결국에는 그를 배신하고 만다) '왕국의 안녕과 안전'을 논의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만나 그 유명한 칙령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유익한 것 중에서 신을 숭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각자가 좋아하는 종교를 따를 자유를 누리는 게 옳다"라고 선언했다. 이 밀라노 칙령으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내에서 자행되던 기독교인 박해에 공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 그때까지 기독교도들은 범법자와 배신자로 여겨졌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었다.(293쪽)

 

 

마침내 이 역겨운 인간도 죽었도다.

 

그러나 박해받던 사람들이 박해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새로운 국가 종교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이 과거 자신의 적들이 활용했던 방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예컨대, 전설적 인물 카타리나가 막센티우스 황제에 의해 나무 바퀴에 못박힌 채 순교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361년 주교 자신이 직접 나서서 페르시아 신인 미트라의 사원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이 신은 당시 군인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경쟁 상대였다. 또 391년에는 사교(司敎)였던 테오필루스가 다산의 신 디오니소스를 모시는 의식이 은밀히 치러지던 디오니소스의 사원을 약탈하고, 기독교인 무리들에게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의 거대한 조각상을 파괴하도록 부추겼다. 이어서 415년에는 키릴루스 사교가 젊은 기독교도들에게 이교도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히파티아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녀를 길거리로 끌어내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시체는 광장에서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여기서 키릴루스 사제 자신도 그렇게 사랑받던 존재가 아니었음을 밝혀야만 한다. 444년에 그가 죽자, 알렉산드리아의 어느 주교는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읽었다. "마침내 이 역겨운 인간도 죽었도다. 그의 떠남은 그를 버텨 낸 사람들을 즐겁게 하겠지만 죽은 사람들을 낙담시키게 될지어다. 어쩌면 언젠가는 죽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려 그를 다시 우리에게로 돌려보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의 무덤에는 엄청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야 하리라. 그래야만 우리는 그를, 심지어 귀신으로라도 다시 보게 될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좋을 테니."(294쪽)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올라간 예언녀

 

······ 그는 더 나아가 "키케로도 이 시와 친숙한 나머지 라틴어로 옮겨서 자신의 작품 속에 살며시 차용했다"고까지 말했다. 불행하게도 키케로가 여자 예언자-에리트리아가 아니고 큐메의 예언자임-를 설명한 문장에는 눈을 씻고 봐도 이런 시구나 머리글자 맞추는 유희시(遊戱詩)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 문장들도 사실은 예언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가 얼마나 그럴싸하게 들렸던지 그 후에도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세계는 여자 예언자를 그들의 선조로 받아들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쓴 『신국론神國論』에서 여자 예언자를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12세기 말경 랑 성당의 건축가들은 정면에 에리트리아 여자 예언자를 조각했는데, 그녀의 손에 쥔 신탁의 서책은 모세의 그것과 비슷하고 그녀의 발 아래에는 경외성서 시의 둘째 행이 새겨 있다. 그리고 4백 년이 더 지나 미켈란젤로도 구약에 등장하는 4명의 예언자를 완성케 하는 4명의 다른 여자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그녀를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올려놓기까지 했다.(297∼298쪽)

 

 

'원본에 보다 가깝게, 포용성은 보다 덜하게'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독서법만이 진실이었고, 그런 독서의 열쇠도 그와 그의 신봉자들에게 달려 있었다. 밀라노 칙령이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신양의 자유를 부여했다면, 니케아 공의회는 그런 자유를 콘스탄티누스의 신조를 따르는 사람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밀라노에서 각자 좋아하는 방식대로, 그리고 각자 읽고 싶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던 사람들은 채 12년도 지나지 않아 한번은 안티오크에서, 또 한번은 니케아에서 오로지 한 가지 독서만이 진실하다는 명령의 소리를 들었다. 종교 텍스트에 대해 한 가지 독서법을 요구하는 일은 만장일치 제국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개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원본에 보다 가깝게, 포용성은 보다 덜하게', 이거야말로 당시에 베르길리우스의 시 같은 세속적인 텍스트를 읽는 데 유일하게 허용됐던 정통적인 독서 개념이었다.(300∼301쪽)

 

 

찰스 1세의 경우

 

그런 예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예는 아마도 1642년 말인가 1643년 초 영국 내전 중에 옥스퍼드의 어느 도서관을 방문했던 찰스 1세의 경우일 것이다. 그를 즐겁게 해주려고 포클랜드 백작이 왕에게 '몇 세대 전까지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으로 널리 쓰였던 베르길리우스 점법으로 왕의 운명을 점쳐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왕은 『아이네이스』의 제4권을 들추고서 읽었다. "아마 그는 전쟁중에 호기로운 종족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고국을 등지고 망명길에 올라야 할지도 모르노라." 1649년 1월 30일 화요일, 찰스 1세는 국민들에게 배신자로 몰려 화이트홀 궁전에서 참수형당했다. 그리고도 약 70년 뒤에 로빈슨 크루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섬에서 여전히 그와 유사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성서를 펼쳤다. '절대로 그대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 내다버리지도 않으리라.' 그때 내가 읽은 구절은 바로 그 문장이었다. 즉각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말씀들은 나를 향한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신과 인간의 버림을 받은 존재로서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어찌 그 말씀들이 나에게 제시될 수 있겠는가?' 라고." 그리고 정확히 150년 후 토머스 하디의 소설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에서 밧세바는 볼드우드 씨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전히 성경을 펼쳤다.(304∼305쪽)

 

 

시가 가지는 모방적인 특징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베르길리우스 같은 작가의 예언적 재능이 초자연적인 재능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시가 가지는 모방적인 특징과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시구는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거리낌없이, 그리고 매우 강력하게 하나의 신호로 다가온다는 설명이다. 『썰물』에서 스티븐슨이 내세운 주인공은 외딴 섬에서 길을 잃고서는 너덜너덜해진 베르길리우스 책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아 보려 노력하지만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책장 속에서 '확고하거나 용기를 붇돋워 줄 목소리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은' 투로 대답하면서 주인공의 고향에 대한 환상만을 불러일으킨다. 스티븐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억압받던 유명한 고전 작가들은 우리와는 학교를 통해 가끔은 고통스럽게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점진적으로 우리 각자의 피 속으로 흘러 들어와 기억 속에 같은 민족처럼 자리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는 만토바나 아우구스티누스를 노래하고 있다기보다는 영국의 어느 장소나 독자의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305쪽)

 

 

베르길리우스의 위엄

 

콘스탄티누스야말로 베르길리우스에게서 기독교의 예언적 의미를 처음으로 읽어 낸 인물이었으며, 그의 독서법을 통해 베르길리우스는 모든 예언적 작가 중에서 가장 고명한 시인이 되었다. 제국의 시인에서 기독교적 공상가로 탈바꿈하면서 베르길리우스는 기독교 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의 공식 찬가가 있고 10세기가 더 흘러서도 단테를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베르길리우스의 위엄은 심지어 거꾸로 흐르기까지 했다. 중세의 라틴어 미사의 한 절에 담긴 이야기는 성 바울 자신이 그 고대 시인의 묘지에서 눈물을 흘리려고 나폴리로 여행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305쪽)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아득한 옛날 성 금요일에 콘스탄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의 단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으로 그 텍스트나 저자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의문을 풀어 주는 메시지로 바꿔 버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의미 변질은 텍스트 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 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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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S. 엘리엇의『황무지』와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from Value Investing 2014-10-28 15:02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앨프리드 테니슨,『율리시스』 * * *내가 T.S.엘리엇과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하워드 가드너가 쓴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지 싶다. 그 책 속에는 무척이나 난해한 시로 이름난『황무지』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했다. 우선 이 불후의 걸작시가 탄생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