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에 빠진 철부지


어제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 중 셋이서 함께) 소주 3병을 마셨다. 그런데 아이들이 재미삼아 들려준 얘기들은 소위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나온 또래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런 '철부지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고 아이들을 조금 다독여(?) 주었다.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속 구절들이 떠오른다. '철부지들'을 부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두려워해야 할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얼마나 큰 오류인가 싶다. 이래저래 철부지들이 여기저기서 너무 설쳐대는 꼴이 요즘 온통 화제인 듯하다. 그들의 얘기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지를 상상해 보면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나로서는 그들의 얘기가 내 귀에 자주 담기는 것조차 불편하다.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한다면 너무 괴퍅한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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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결핍,투쟁

우리는 풍요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인생이, 결핍과 투쟁의 와중에 있는 인생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판단에는 매우 엄밀하고 근본적인 이유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그것을 거론할 때는 아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들을 열거하는 대신, 모든 세습귀족의 비극에 등장하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귀족이 뭔가를 상속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인생 조건들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부와 특권을 소유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부와 특권은 다른 사람, 다른 인간, 곧 그의 조상이 남긴 거대한 갑옷이다. 그래서 그는 상속자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갑옷을 걸쳐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세습 '귀족'은 자신의 삶을 사는 걸까, 아니면 선조 귀족의 삶을 사는 걸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는 타인의 삶을 재현해야 하며, 따라서 타인도 자신도 아닌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그의 삶은 불가피하게 진정성을 상실하고 순전히 다른 삶을 재현하거나 꾸미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가 관리해야 할 과다한 재산은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삶을 위축시킨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싸움이며 노력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부딪치는 어려움은 나의 활동과 능력을 일깨워 활용하게 해준다. 만일 대기가 내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내 몸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흐물흐물한 유령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습 '귀족'의 인격은 삶의 노력과 활용 부족으로 점차 모호해진다. 그 결과 옛 귀족 가문 특유의 어리석음만이 남는다.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그 내부의 비극적 메커니즘 - 모든 세습귀족을 어쩔 수 없이 퇴보하게 만드는 - 을 그려낸 적이 없는 어리석음이다.

 

 

 

자만에 빠진 철부지

삶의 본질 그 자체와 접촉하지 않는 것이 위험요소이자 문제의 근본이다. 인간의 삶 중에서 등장할 수 있는 가장 모순적인 삶의 형태가 '자만에 빠진 철부지'이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실제로 '부모 슬하의 자녀'는 이런 환상을 갖는다. 우리는 그 까닭을 잘 알고 있다. 가족 내에서는 어떤 큰 잘못을 범해도 전혀 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세계는 상대적으로 인위적이기에, 사회나 외부 세계에서는 자동적으로 파국적이고 피치 못할 결과를 초래할 행위들이 묵인된다. 그러나 '철부지'는 집밖에서도 집안에서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보며, 돌이킬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 해도 좋다고 여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오류인가!

* 가정과 사회의 관계는, 크게 보면 국가와 국제사회의 관계와 같다. '철부지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명백하고 대규모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일부 국가들이 국제사회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진하게도 '민족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국제주의에 대한 맹종에도 반대하긴 하지만, 아직 덜 성숙한 국가들의 일시적인 '철부지주의'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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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8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숱한 중학생들을 만나면서,
딱 그 시기에 힘과 체력은 남아돌고, 아직 판단은 미성숙하며, 머리는 다소 굵었고, 사회적 처신은 서투른 이 녀석들이 아무 생각없이 저지르는 만행들을 보고,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적 가치나 규율에 대해서 이해시켜야 하는게 첨에는 참 힘들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인데, 감을 잡지 못하고 있네요, 아직.

그런 철부지로 성인까지 주욱 자라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아마 저도 그렇지 않을까 두려워지기도 해요, 가끔. 옛날에는 당연히 성인이었던 나이대가 지금은 청소년이나 마찬가지로 구분합니다.
법적 청소년이 만24세까지더군요.

oren 2013-12-18 13:33   좋아요 0 | URL
요즘의 중학생들은 정말 '두려운 철부지들'이지요. 법적 청소년이 만24세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마녀고양이 2013-12-18 16:32   좋아요 0 | URL
네, 청소년 기본법의 청소년은 만 9세에서 만 24세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