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플루타르크의 저서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967쪽)
- 나는 몽테뉴의 저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심한 본 것을 나는 몰래 빼앗아 온다."
한 공장
인간의 행동을 검토하는 자들은, 그 행동을 하나의 동일한 전체 모습으로 맞추어 보려고 할 때 가장 당혹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동들은 이상하게도 대개 서로 모순되어, 도무지 그것이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351쪽)
내 사색의 목표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사색의 목표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살펴보고 연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에 적용해 보기, 또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자신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쓸모가 많지 않은 다른 학문에서와 같이, 내가 내 배움의 깊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배운 바를 남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실수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만큼 어려운 묘사도 없으며, 그만큼 유용한 일도 없다. 이것을 밖에 내놓으려면, 그만큼 더 맵시 있게 잘 그려서 더 질서 있게 정리해야만 한다. (399쪽)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세상 사람들은 늘 서로 상대편을 쳐다본다. 나는 내 눈을 내 속으로 돌리며, 시선을 거기에 처박고, 그 속을 부지런히 둘러본다. 모두들 자기 앞만 쳐다본다.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밖에 일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고찰하며 검토하며, 나를 맛본다. 다른 자들은 그들이 잘 생각해 본다면,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늘 앞으로 간다.
아무도 자기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페르시우스)
나는 내 속에서 굴러다닌다. (727∼728쪽)
우리의 병폐
우리의 병폐는 우리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우리들 속에 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병들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병을 고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일찍부터 자신을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 가서 그 많은 상처와 병폐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문에 우리는 철학이라는 대단히 감미로운 약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약들은 치료되고 난 뒤에 밖에는 유쾌한 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 약은 쓸 데에도 유쾌하며, 동시에 병을 고쳐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네카가 편지글에서 한 말이다. (759쪽)
우리 따위
우리의 개인 생활을 자신에게밖에 보여 줄 데가 없이 살고 있는 우리 따위는, 주로 우리들의 행동을 검열하기 위해서 우리들 속에 모범을 세우고, 그것으로 행동을 심사하며, 거기에 따라서 우리를 칭찬하기도 하고 정제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를 판결하기 위해서 내 법률과 재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데보다도 거기에 호소한다. 나는 남의 의견을 잘 따라서 내 행동을 억제한다. 그러나 내 의견에 의해서밖에는 행동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믿음직하고 착실한지 신앙이 깊은지, 아는 것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에 매이지 마라. 그대 자신의 판결에 매여라. "그대가 자신에게 하는 판단을 그대는 사용해야 한다."(키케로) - "양심이 자신에게 해 주는 악덕과 도덕의 증명은 한층 더 막중하다.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키케로) (887∼8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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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와 똥
그런데 웬말인가? 내가 사물들을 사실보다 다르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참을성 없음을 한탄한다. 무엇보다도 이 참을성 없음은 옳은 자에게서건 그릇된 자에게서건 매한가지로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형태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은 속 좁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항상 있는 어리석은 수작을 가지고 짜증내며 분개하는 것보다 더 심하고 고질적이며 괴퍅한 일도 없다. 이런 심정은 주로 우리 자신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날 철학자(헤라클레이토스를 말함)는 자기를 고찰하는 동안 눈물을 흘릴 기회가 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7현(七賢)의 하나인 뮈손은 티몬이나 데모크리토스에 지지 않는 기분으로 있었는데, 누가 왜 혼자서 웃고 있느냐고 묻자, "내가 혼자 웃고 있는 것이 우스워서"라고 대답하였다.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수작을 나는 날마다 말하고 대답하는 것인가! 그러니 남의 생각을 따라서는 얼마나 더 자주 할까! 내가 그 때문에 꿍꿍 앓고 있다면 다른 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게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그리고 뻔뻔스럽고 부끄럼이 없는 그들의 일에 놀란다.
나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누구건 비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아무도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말은 우리의 판단력이 당장 문제에 오른 자를 공격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내적 비판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속의 악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악덕에는 그 근본이 덜 모질고 덜 악질이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자비로운 봉사이다.
그런데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그도 역시 그 결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격에 맞는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하여튼 알려 준 일은 진실하고 유익하다. 우리 코가 멀쩡하다면 우리 똥은 그것이 우리 것인 만큼 더 구려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와 자기 아들과 다른 한 사람이 어떤 폭력이나 부정 행위로 죄를 지었을 경우, 자기가 맨 먼저 재판소에 가서 형 집행인의 손으로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둘째는 자기 아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에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 교훈은 그 어조가 매우 고매한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 양심이 하는 처벌에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1029∼10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