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우리의 고유한 삶의 가장 내부에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러면 우리 안에서 외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지성성의 침투가 가장 적은 부분에 집중해 보자.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우리의 고유한 삶의 가장 내부에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 때 우리가 다시 잠기게 되는 곳은 순수 지속 안이다. 거기서는 과거가 언제나 전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현재로 끊임없이 살찌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리 의지의 용수철이 그 극한까지 당겨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인격을 자신에 대해 격렬히 수축시킴으로써 우리는 빠져나가는 과거를 모아 담고, 그것을 밀집되고 불가분인 채로, 그것이 들어옴으로써 창조될 현재 속으로 밀어 넣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균형을 잡는 순간들은 매우 드물다. 그 순간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와 일체를 이룬다. 그리고 그 때조차도 우리는 결코 완전히 우리 자신일 수가 없다. 우리의 지속의 감정, 즉 우리 자아가 자아 자신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는 정도차를 받아 들인다. 그러나 그 감정이 깊고 그 일치가 완벽할수록 그것들에 의해 우리가 다시 위치하는 삶은 지성성을 넘어서면서 그것을 흡수한다. 왜냐하면 지성의 본질적 기능은 같은 것을 같은 것과 연결하는 것이고, 지성의 틀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되는 사실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성은 밖에서 취한 외관들 그리고 가능한 기지(旣知)의 것과 유사한 관점들로 새로운 상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실재적 지속의 실재적 순간들에 단번에 힘을 행사하는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 상태는 지성성을 말하자면 <가능적으로> 포함한다.13) 그러나 그 상태는 불가분적이고 새롭기 때문에 지성성을 뛰어넘으며, 그것과는 공통분모로 측정할 수 없는incommensurable 것이다.(301∼303쪽)
13) (역주) 여기서 <가능적으로>라는 표현을 강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고관한 시론』에도 의식 상태를 이루는 질적 다양성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가능적으로> 수를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이제 우리는 긴장을 풀고 가능한 한 과거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현재 속으로 밀어 넣는 노력을 중단해 보자. 긴장이 풀어져 완전히 이완되면 더 이상 기억도 없고 의지도 없을지 모른다. 그 말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절대적인 수동성으로 떨어지는 일도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완의] 극한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 시작하는 현재로 이루어진 존재를 엿보게 된다-거기에는 무한히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성 이외에 실재적 지속은 더 이상 없다. 그것이 물질의 존재인가? 아마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분석해 보면 요소적 진동들로 용해되며, 이것들은 아무리 짧은 것이라 해도 아주 약하고 사라져 가는 지속에 속하는 것이지 무(無)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존재가 첫 번째 방향으로 향하듯이 물리적 존재는 이 두 번째 방향으로 향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304쪽)
우리가 순수 지속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의식하게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 존재의 다양한 부분들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전 인격이, 끝없이 미래를 잠식하면서 그 속에 삽입되는 한 점에, 또는 차라리 한 뾰족한 날 위에 집중되어 있음을 느낀다. 자유로운 생명과 행동은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 반대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어 보자. 행동하는 대신에 꿈꾸어 보자. 우리의 자아는 단번에 흩어진다. 그 때까지 자신이 우리에게 전달해 준 불가분적인 충동 속에서 응축되어 있는 과거는 수천의 기억들로 분해되고 이 기억들은 서로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된다.그것들은 응고됨에 따라 그만큼 상호침투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의 인격은 그렇게 해서 공간의 방향으로 다시 내려온다. 게다가 그것은 감각 속에서 끊임없이 공간과 나란히 진행한다.(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