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함......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장관들이 생겨났음을 밝힌 책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

현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물자체로서 의지는 하나다. 이것을 인식해야 비로소 자연의 모든 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탄할 만하고 지극히 명백한 유사성과, 동시에 주어지지는 않더라도 결국 동일종의 변종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같은 종족의 유사성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화성, 세계 모든 부분의 본질적인 연관, 방금 고찰한 그들 각 단계의 필연성, 이런 것들을 명백하게 깊이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유기적인 자연의 산물이 갖는 부정할 수 없는 '합목적성'의 내적 본질과 의의를 올바르고 충분하게 통찰할 수 있게 된다. (679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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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온갖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숲속에서는 새가 노래하고 곤충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축축한 땅속을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번잡스러운 땅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한 개개의 생물은 제각기 기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서로 매우 다르며 매우 복잡한 연쇄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런 생물이 모두 지금 우리 주위에서 수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한 법칙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생식'을 수반하는 '성장', 거의 생식 속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는 '유전', 생활의 외적 조건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작용에 의한, 또 용불용에 의한 '변이성', 생존경쟁과 나아가서는 '자연선택'을 초래하고, 마침내 '형질의 분기'와 열등한 생물을 '멸종'시키는 높은 '증가율' 등이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자연계의 싸움에서, 또 기아와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항, 즉 고등동물의 산출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480쪽)

 - 다윈, 『종의 기원』(1859년), <제14장 요약과 결론>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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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사실상 모든 기관은 하나의 보편적인, 즉 단 한번 만들어진 의지표명, 즉 개별자가 아니라 종(種, Spezies)의 고정된 하나의 동경, 하나의 의지작용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모든 동물 형상은 상황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생명에의 의지의 한 동경이다. (9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완전히 잘못

우리는 우선 "세계는 인식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래서 또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세계의 '핵심'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자연에 질서와 무늬를 넣은 것은 지성이어야 한다는 자연신학적 사상은, 단순한 오성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우리에게 동물적 자연에서만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전적으로 세계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원리로서, 즉 가장 늦은 근원의 산물로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은 결코 세계 현존의 조건이었을 수 없으며 지성계(mundus intellegibilis)가 감성계(mundus sensibilis)에 선행할 수도 없다. 지성계는 감성계로부터만 재료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자연을 산출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성을 산출했다." 그러나 물론 의지가 모든 것을 실현하고 그 각각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현상이라고 지칭하면서 도처에서 근원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바로 그로 인해 목적론적인 모든 사실은 그 사실들이 발견되는 존재 자체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94쪽∼95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의 절약 법칙'은 어떤 여분의 기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법칙은, 다른 한편으로 어떤 동물에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방식이 요구하는 기관이 부족하지 않았고, 모든 기관은 가장 다양한 기관들조차 조화를 이루며 전적으로 특별히 규정된 생활방식을, 그 동물의 노획물이 있는 영역을, 추적을, 승리를, 그 노획물을 분쇄하고 소화시키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합쳐져서, 동물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위하려는 생활방식이 그 동물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었으며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그 상황이 바로, 생활방식과 그 외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구조에 선행하고 그에 맞게 모든 동물이 형체를 얻기 전에 자신의 도구를 선택하는 식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 전에 자신의 모든 도구, 즉 산탄총, 산탄, 화약, 사냥 포대, 사냥칼, 의류를 그가 죽이려는 사냥감에 적합하게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엽총을 갖고 있으므로 야생 암퇘지를 쏘는 것이 아니라, 야생 암퇘지를 잡으러 나섰으므로 새총이 아니라 엽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러나, 그 증명을 보충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이 부가된다. 즉 많은 동물에게서 그것들이 아직 성장하는 동안에는 의지의 지향이 그 지향에 필요한 신체 부분이 있기도 전에 표현되며, 따라서 그 신체 부분의 사용이 그 현존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린 숫염소, 숫양, 송아지는 아직 뿔을 갖기도 전에 맨머리로 들이받는다. 어린 수퇘지는 자신의 행위가 의도하는 결과에 상응할 어금니가 아직 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둘러싼 측면을 들이받는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침으로 무장한 곤충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표명했다. "그것들이 투지를 가지므로 무기를 갖는다"(『동물의 부분에 관하여(de partibus animalium)』, 제4권, 6장). 나아가 그는 (12장에서) 대체로 "자연은 그것의 활동을 위해 기관들을 만들지만 기관들로 인해 활동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 결과는, 모든 동물의 구조는 그 의지에 따른다는 것이다. (98쪽∼100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

그러나 알을 부수고 나오는 어린 닭이 왜 동일한 수의 두개골 뼈를 가져야 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해부학적 요소가 한편으로는 생명에의 의지 일반의 통일성과 동일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물의 원형들이 다른 원형에서 불러일으켜졌으며(『여록과 보유』, 제2권, 91절), 따라서 종족 전체의 기본 유형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해부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연적 자연성질"로서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 형태의 변화 가능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목적에 맞는 자연성질"이라고 부르며(아리스토텔레스, 『동물의 부분에 관하여』,제3권, 2장), 이로부터 뿔 달린 가축에게서 위 앞니의 재료가 뿔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 왜냐하면 낙타와 사향노루처럼 뿔 없는 반추동물만이 뿔 있는 것들에서는 없는 위 앞니를 갖기 때문이다.(116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

여기 골격에서 설명된, 동물이 목적과 외적 생활 관계들에 대한  구조의 정확한 적합성뿐 아니라 동물의 내부 작용에 있는 경탄할 만한 합목적성의 조화는 다른 어떤 설명이나 전제를 통해서보다, 동물의 신체는 표상으로서 직관된, 따라서 뇌에 있는 공간, 시간, 인과성의 형식에서 직관된 자신의 의지 자체일 뿐이라는, 그래서 의지의 단순한 가시성, 객체성일 뿐이라는,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확인한 진리를 통해서 불분명할지라도 가장 잘 이해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정 아래에서는 신체에 종속되었거나 신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종 목적을 위해, 즉 그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공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안에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과도한 것, 결여된 것, 목적에 모순되는 것, 불충분한 것, 그 방식이 불완전한 것도 발견될 수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은 그 필요한 만큼 정확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여기서는 장인, 작품, 재료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극도로 완벽한 걸작이다. 여기서는 의지가 먼저 의도를 갖고 목적을 인식하고 그다음에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물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의욕이 직접적으로 목적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성취다. 그래서 먼저 억제되어야 할 이질적인 어떤 수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의욕, 행위, 성취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적으로서 거기에 서 있으며 인식의 등잔 불빛에서 꾸며진 인간의 작품과 비교될 수 없다. (117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칸트의 위대한 학설의 의미

의지 작용의, 즉 이 진정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근원적 통일성과 불가분성은 이제 부분들의 병존과 기능들의 연속으로 분산되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은 상호 간의 수단과 목적으로서 서로 돕고 지지하기 위해,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결합된 것으로서 표현된다. 이것을 그렇게 통찰하는 오성은 부분들의 질서와 기능들의 조합이 깊이 숙고된 것에 경탄한다. 오성은 (자신의 인식형식이 최초로 초래한) 다수성으로부터 되찾아진 근원적 통일성을 발견한 그 방식을 당연히 또한 이 동물 형태가 발생한 방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합목적성이 오성에 의해 비로소 자연에 보내진다는 칸트의 위대한 학설의 의미다. 그에 따라 오성은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기적을 놀라 바라본다. ······ 자연신학적 논증은 오성 안에 있는 세계의 현존을 그 실재 현존에 선행하게 한다. 그리고 그 논증은, 세계가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면, 세계는 그것이 있기 전에 표상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칸트의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가 표상이라면 그것은 합목적적인 것으로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합목적적인 것은 최초로 우리의 지성에 나타난다. (121쪽∼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

나의 학설로부터 당연히,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자연, 즉 결코 속일 수 없고 천재처럼 순진한 자연은 자신을 꾸밈없이 표명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의 불을 점화할 뿐이며, 그다음에 그것의 재료는 밖에서, 형식과 운동은 자신으로부터 조달하여 우리 눈앞에서 자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경험적으로도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122쪽)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36년),〈비교해부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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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9-1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글 올리신 걸 이제야 알았답니다.
이거 인쇄해서 의자에 편안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깊게 음미해야겠군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도 그렇게 읽었답니다. 나중엔 책을 사고 말았지만요. ㅋㅋ

oren 2012-09-18 10:37   좋아요 0 | URL
pek님께서 반가운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제 답글이 너무 늦었네요.
pek님께서도 쇼펜하우어를 무척 좋아하시죠?

제가 윗 글을 통해 많은 내용을 옮겨놓은 책『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pek님께서 혹시라도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내용이 무척이나 흥미로우면서도 '자연과학과 철학'을 함께 다루는 멋진 책인 데다가, 책의 내용도 쉽고 부피도 가벼워 금방 읽을 수 있답니다.(제가 읽어본 쇼펜하우어 책 가운데 이 책을 가장 빠르게 읽었던 것 같아요. 이보다 더 얇은 책으로는『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라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의 책도 있는데 그건 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 논문'이더군요. 내용은 물론(?) 어려워서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보다 더 어렵다고도 평가받는 책인데, 그의 철학의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는 책이어서 '건너뛰기'할 수도 없는 책이긴 합니다.)

한가지만 덧붙여 말씀드리면,『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의 소개글 가운데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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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는 당시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를 빠짐없이 기술하면서 이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페크pek0501 2012-09-20 16:36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에 감사 드립니다.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은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쇼펜하우어 인생론>을 가끔씩 반복해서 읽는 정도랍니다. 이 책이 그의 저작 중 세 번째로 읽는 책인데, 과거에 읽었던 두 권의 책 내용과 겹쳐지는 부분도 많답니다.
님이 말씀하신 책은 겹치지 않을 것 같으나 좀 벅차게 느껴지네요. ㅋㅋ
서점에 갈 기회가 될 때 찾아보겠습니다. 부담스러울 땐 직접 본 다음에 사는 게 최고...ㅋ
이 분야에 대해선 오렌 님이 계셔서 마음 든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