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결국 아버님과 영원히 이별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 그 고통스런 순간들은 누구나 한번은 이미 겪었거나 혹은 앞으로 꼭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제발 그 순간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빌어왔는지 아버님은 혹 아시는지요?

금년 3월 하순쯤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환자에게 고통일 뿐'이라는 얘기를 듣고 난 이후에는, 아버님을 찾아 뵈러 영월로 오가는 도로 위에서도 가끔씩, 아버님께서 건강하셨을 때 저희와 함께 했던 꿈결같은 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점점 더 깊어만 가는 병마에 맞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아버님을 위해 저희 형제들이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저희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만들었는지 아버님은 혹 아셨는지요?

그저 아버님께서 운명하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병마 앞에서 조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늘 식사도 잘 드시기를 바랬고, 그렇게 올해 여름과 가을, 더 나아가 올해 겨울까지도 또 무사히 넘겨서, 또다시 만물이 생동하는 내년의 새 봄을 다시 맞을 수 있기만을 그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것 말고는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침 5월 초순에 중간고사를 끝낸 제 아이들까지 데리고 영월로 내려가 아버님을 찾아 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아버님은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반갑게 손자와 손녀의 손도 잡아 주셨고, 이름도 불러주실만큼 괜찮은 모습이셨습니다. 식사는 물론이고 어머님께서 건네드리는 과일도 여느 건강한 사람 못지않게 얼마나 잘 드셨습니까? 그래서 유난히 휴일이 잦았던 5월 초순을 틈내어, 멀리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로 제가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님께서 혹여라도 이달 중에 위독한 상황을 맞게 될 지 모르겠다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님께서 지난 5월 15일 일요일 낮부터 갑자기 병세가 좋지 않다는 어머님의 연락을 받고, 급히 영월로 달려가 보니 아버님은 어느새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의식이 혼미한 비통한 모습이셨습니다.

병원 응급실 당직의사의 소견으로는 아버님께서 폐 기능 저하로 매우 위독한 상태이며, 이런 상태로는 '하루 이틀이 될지 혹은 일주일을 넘길 수 있을 지 예단하기 힘든 상태'라는 절망스런 얘기 뿐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동안 치료받아 오셨던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기에는 상태가 너무 위중하며, 그나마 가까운 원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모시는 게 최선이라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상태로 아버님을 구급차에 모시고 가슴을 졸이며 원주로 이동하여 곧바로 중환자실로 모셨으나, 이미 맥박과 체내 산소수치와 혈압 등 거의 모든 수치가 자꾸만 악화되면서 조금도 회복할 기미가 없었으며, 일요일 자정 쯤에는 중환자실 간호사로부터 '돌아가시게 되면 아버님을 어디로 모실지 미리 정하는 게 좋겠다'는 비통한 얘기를 듣고는 아버님을 떠나 보내드릴 순간이 이제 정말 바로 앞에 닥쳐 왔음을 절감하였습니다.

월요일 새벽 5시쯤에 모든 가족들에게 한 차례 더 면회가 허용되었지만 정오를 넘기기 힘들 거라는 얘기만 들었고, 아버님한테 가장 가까운 혈육인 고모님들께 급히 연락을 드리고 나서 빈소를 어디로 정할 것인지 알아보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아침 열시를 지나고 있었고, 잠시 뒤 중환자실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모두가 달려가 보니, 아버님께서는 조용히 임종을 앞두고 계셨고 끝내 평안하고도 고요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어찌 이토록 화창한 봄날에 그토록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렇게 서둘러 조용히 저희들 곁을 떠나가신단 말씀입니까? 의식조차 없을만큼 위독한 상태로 하룻만에 운명하셨으면서도 저희가 눈을 감겨 드릴 땐 왜 그리 아버님의 눈가에 눈물이 많으셨던가요? 누구보다 가장 마음이 아프셨을 어머님의 비통한 울음과 저희 형제들이 통곡하는 소리라도 들으셨던 건가요? 임종이 가까워 오면서 아버님의 손과 발은 이미 서늘해 졌지만, 끝내 심장의 박동을 멈춘 이후에도 아버님의 가슴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어서 제 가슴이 더욱 찢어지고 목놓아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동안 그토록 열심히 일하며 사셨고, 3년 전 담낭암 수술 이후로 내내 건강하시다가, 작년 늦가을에 간 조직에 나쁜 병이 재발한 이후에도 힘든 항암치료를 놀랄만큼 거뜬히 잘 참아 내시며 여태껏 잘 견뎌 오셨는데, 어찌 이렇게 빨리 저희 곁을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혹여나 그동안 아버님의 병간호를 하느라 많이 쇠약해지신 어머님을 걱정하시고 또 저희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힘에 겨워 할까봐 이렇게 빨리 가셨단 말입니까?

하룻밤 사이에 아버님을 잃은 건 어머님께는 물론이고 저희 형제들에게도 실로 감당하기 힘든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인들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아버님을 잃은 슬픔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지만, 막상 핏줄이 끊어지는 아픔이라는 게 이토록 가슴 아프고 하늘이 무너지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어머님과 우리 육형제들에게 유난히 큰 산과도 같이 한없이 든든한 분이셨고, 아버님은 특히 6남매중 외동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할머니로부터 끔찍한 사랑을 받았다고 들었으며, 아버님의 누이동생들인 저희 고모님들에게도 남달리 소중한 오라버님이셨고, 고종사촌들에게 인기가 참 많은 남다른 '외삼촌'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날 새벽부터 맨먼저 멀리서 한걸음에 달려오신 분들도 세 분의 고모님들이셨고, 고종사촌들도 부음을 듣고는 모두가 바쁜 일들을 다 제쳐두고 달려와서 눈물을 쏟아내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종사촌들이 아버님의 빈소가 마련된 첫 날 부터 장례를 마친 이후 초우제까지도 내내 함께 하면서 마치 아버님의 친자식들처럼 아버님을 모셨습니다.

이제야 둘러 보니, 아버님을 잃은 커다란 충격 속에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이튿날 입관식을 거쳐 삼일 만에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떠나, 노제를 지내기 위해 아버님께서 3년 동안 사셨던 영월 연당리를 거쳐, 경북 영양의 감천 고향 땅에 아버님을 모시고 난 뒤에, 한동안 그저 멍한 상태로 먼 산만 쳐다보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시 하루하루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온 지도 어느새 벌써 2주째에 접어듭니다.

평소에 신문 등을 읽다가 가끔식 고인이 된 분들을 위하여 쓴 '추모의 글'은 몇 번 읽어 봤으나, 막상 아버님을 잃은 제가 아버님에 대한 추모의 글이라도 써보려고 하니 왜 이리 좀처럼 글이 써지지를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라도 힘을 내서 아버님을 잃은 크나큰 슬픔이 흐르는 시간 속에 혹여 조금이라도 더 약해지기 전에, 자식으로서 아버님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또 아버님에 대한 추억도 새삼 떠올려 보고 싶어 이렇게 힘겹게 글을 써내려 갑니다.

아버님께서는 입향시조(入鄕始祖)로부터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조상 대대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아온 시골 고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묻혀 계신 수많은 선조님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논과 밭을 터전으로 삼아 흙을 일구며 살아오신 이 땅의 전형적인 농부 가운데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7,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또 교육열이 가세함에 따라, 저희 6형제 가운데 위로 3형제가 모두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자식들 셋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느라 자취와 하숙생활을 하게 되자, 아버님께서는 고향의 논과 밭, 심지어는 아버님께서 손수 지으신 고향의 집 마저도 과감하게 처분하시고, 1984년에 고향을 떠나 자식 교육과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상경을 하시는 결단을 하셨습니다.

1937년에 태어나신 아버님께서 오십이 가깝도록 오로지 농사만 지으시다가 그런 큰 결심을 하신 건, 농사만 지어서는 6형제를 제대로 뒷바라지 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교육적인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낯선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식들을 키워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저희들의 안태고향인 경북 영양의 감천이라는 곳이 워낙 오지에 가까운 산골 농촌마을이어서,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자연스레 도시의 고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저희 형제들은 안동과 대구 등지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다시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자취와 하숙생활을 번갈아 했던 저희들로서는, 우리집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니 실로 여러 해 만에 어머님께서 손수 해주시는 따뜻한 밥이 너무나 좋았고, 부모님은 물론 고향에 떨어져 살았던 여러 동생들과도 한 지붕 아래 다시 모여 살게 되어 정말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께서는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나는 것도 잠시 뿐,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아버님의 어깨는 한층 더 무거워졌음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시골에서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거의 다 처분해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변변한 집 한채 마련할 형편에도 미치지 못하였기에, 전세보증금을 주고 남의 집을 세를 얻어 살아야 하는 처지를 아버님께서는 자주 안타까워 하셨었지요. 그리고 아버님께서 얻은 일자리조차 의정부에 있어서 서울의 명륜동에서 출퇴근하기도 힘이 드셨고, 특히 농사일만 해오신 아버님께서 취직한 일자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인한 체력과 더불어 농사일을 하실 때부터 남다르게 부지런하셨던 아버님께서는, 저희 6형제가 모두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정말 억척스럽고도 성실하게 일하셨고, 그 덕분에 상경한 지 불과 7년여 만에 (졸업후 취직한 자식들이 비록 조금이나마 도와드렸지만) 보란듯이 전세를 살던 동네에서 어엿한 단독주택까지 마련하시며 몹시도 뿌듯해 하셨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면, 아버님께서는 시골에 계실 때에도 정말 부지런히 일하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농번기 때에는 겨우 날이 밝기 시작하는 새벽 어스름부터 이슬을 적셔가며 논밭 일을 하셔서, 저희 형제들이 등교시간을 앞두고 다함께 아침식사를 할 때 쯤이면 아버님께서는 벌써 세 시간에 가까울 만큼의 많은 일을 마치시고 난 뒤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 여름철에는 저희 형제들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밤 8시가 넘어서야 들판에서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소에게 먹일 풀을 지게에 잔뜩 지고 돌담장 너머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시던 모습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힘겹게 농사일을 해오셨는지는 제가 고향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 6개월여 고향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매일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논과 밭으로 나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 드리면서 새삼스럽게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20대 초반의 한창 나이인 저조차도 아침마다 일어나면 농기구를 움켜쥐었던 손마디 마디가 그렇게 아프고,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을 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데 부모님께서는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커가면서 농사일을 어느 정도 도울 때가 됐다 싶으면, 그때는 저희들이 고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는 바람에, 결국은 오로지 아버님과 어머님 두 분의 양 손과 어깨에만 의지한 채 그 모든 힘든 일을 다 하셨고, 어느 하루도 제대로 쉬는 날조차 없이 오로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그토록 고된 농사일을 해 오셨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입니다.

아버님께서는 1984년에 서울로 올라오신 뒤 2008년에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을 얻을 때까지도 직장생활을 계속 하셨습니다. 저희 6형제가 모두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난 뒤, 부모님께 매달 충분한 생활비를 보내 드리는 데도 불구하고, 아버님께서는 좀처럼 일하시는 걸 그만두시지 못하고 또 편안하게 쉬실 줄을 몰랐습니다.

2008년 이맘때 쯤인가 봅니다. 어버이날을 전후로 저희 형제들이 아버님께 사드렸던 음식과 술을 너무 많이 잡수시고 난 뒤에, 복부의 진통이 계속 느껴지는 걸 그저 단순히 '술병'인 줄로만 아셨다가 결국에는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임을 알게 되었고, 그 때는 이미 아버님의 연세를 감안하면 수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설사 수술을 하더라도 예후가 극히 좋지 않은 병이기 때문에 3개월 이상도 살기 어려울 수 있다는 병원측의 설명은 저희 형제들에게는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온갖 수소문을 다해 유명한 의사선생님들께 진료를 받고 또 수많은 검사를 거친 끝에 수술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주르륵 흘렸던 3년 전의 기억도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고, 분당 서울대병원에서의 10시간이 넘는 대수술 시간 동안 초조하게 수술 결과를 기다렸던 일들도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아버님께서는 그 힘든 수술의 고통들을 다 이겨내시고 결국 환하게 웃으며 퇴원하셨었습니다. 한 달 이상을 입원해 계시던 그 때가 아마도 아버님께서 겪으신 숱한 위험한 삶의 고비 가운데 대략 세 번째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후 아버님께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실 수 있는 방도를 찾아 강원도 영월의 대야리라는 곳으로 곧장 거처를 옮겨 모셨고, 저희 형제들이 주말마다 강원도 영월과 정선, 그리고 평창 등지를 샅샅이 돌아다닌 끝에, 부모님께서 편안하게 사실 수 있는 동네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외관상으로도 여느 도회지의 멋진 단독주택들 못지않게 잘 조성해 놓은 아담한 전원주택단지인 데다가, 무엇보다 새로 마련한 집은 대지가 넓어 텃밭으로 가꿀 공간이 넘칠 정도로 넉넉하였습니다. 2009년 봄부터 아버님께서 일궈놓으신 텃밭엔 지금도 여전히 온갖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아버님과 함께 집 둘레를 따라 심었던 청매실과 홍매실 나무에는 어느새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고, 대추나무와 엄나무들도 너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지난 겨울에 심어 놓으신 마늘도 얼마나 보기좋게 자랐는지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는 영월에서 3년 가까이 사시는 동안, 맑은 샘물을 길러 오기 위해 매일처럼 먼 산길을 오르내리시고, 또 집 앞의 넉넉한 텃밭으로도 모자라 동네 인근 야산에 있는 묵혀 있는 밭을 찾아다니시며 산나물도 캐고 도라지도 심으며, 또 그러한 내용들을 일일이 전원일기에 빼곡히 기록해 놓으실 만큼 재미있고 즐겁게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틈만 나면 가까운 강가로 나가 아버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물고기 잡는 일에도 빼놓지 않고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문득 아버님이 영원히 저희 곁을 떠나가신 지금에 와서 되돌아 보니, 아버님께서 건강하실 때 한번이라도 더 아버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드리고 또 좋아하시는 음식을 한번이라도 더 자주 사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 때문에 얼마나 후회가 사무치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고모님들과 더불어 부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일본에라도 함께 여행을 다녀올 계획울 세웠었는데, 어머님께서 갑자기 허리를 다쳐 입원하시는 바람에 그마저도 헛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만 지나고 나면 꼭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 산천을 두루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그마저도 이제는 모두 허사가 되고, 아버님께서는 이미 차디찬 몸이 되어 고향의 땅 속에 누워 계시니 그저 가슴이 저며오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버님의 너그럽고 인자하신 성품은 아마도 할아버지를 많이 닮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978년 겨울에 돌아가신 할아버님께서는 그 옛날 우리집을 거쳐 가는 사람들, 가령 탕건을 고치던 할아버지나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부탁하던 스님들, 혹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누구에게나 한 끼니의 식사를 대접하기를 그렇게 좋아하셨고, 또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시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을 만큼 인정이 많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심지어는 동네 아이들이 미치광이라고 놀려대던 거지에게조차 언제나 밥 한끼를 내주는 바람에, 철없는 저희들이 곁에 다가와 앉아서 밥을 먹는 거지가 너무 무서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아마도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늘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살피며 살라'고 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또 평소에 늘 저희 형제들에게 '순리대로 살라'는 말씀을 누차 강조하셨고, 또한 늘 저희들에게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도록 언제나 당부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저희 형제들로서는 단지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게 사는 것만 해도 이미 벅찬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보시기엔 아직도 저희 형제들은 여러모로 미숙하고 부족한 것도 많고 제대로 처신도 못하며 산다고 여기실 게 틀림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저희들이 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두루 살펴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임을 다짐합니다.

해마다 오월은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에라도 부모님을 꼭 찾아뵙게 되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꼭 1년 전만 하더라도 어버이날을 앞두고 영월로 내려와, 아버님과 어머님과 저랑 셋이서 밤늦도록 100원짜리 동전을 주고 받으며 '점백짜리' 고스톱도 실컷 치며 놀았고, 또 두 분을 모시고 단종문화제에 참가해 장릉과 청령포에 함께 다녀온 기억도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이제는 영원히 그런 5월과 그런 어버이날을 다시는 맞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버님께서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아계셨더라도 저희 6형제와 며느리들, 그리고 아버님께서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셨던 손자·손녀들이 아버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뭐라도 조금씩은 더 할 일이 많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빨리 저희 곁을 떠나 가셨으니 저희들은 아직까지도 그저 안타까운 현실이 믿기지 않을 뿐입니다. 다만 이제라도 아버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는 어머님을 더욱 잘 모시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마지막 유언 한마디 조차 남겨주시지 못했지만, 아버님의 마지막 소원은 '너희 엄마를 잘 모셔라'는 말씀이 틀림없었을 것임을 저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님!

무릇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란 언젠가는 모두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막상 아버님께서 이처럼 빨리 머나먼 길을 떠나가실 줄은 미처 몰랐기에, 아직도 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눈 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하룻밤 사이에 아버님이 저희들 곁을 떠나가신 5월 16일 낮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서울의 아산병원으로 모시던 그 날은 온 세상이 신록으로 물든 화창한 봄날씨가 너무나 서럽게 느껴져서 울음을 참기 힘들었는데,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온종일 비가 내리면서 마치  제가 흘릴 눈물을 대신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생전에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한없는 사랑이 오늘밤은 빗물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저희들 가슴 속에 절절히 타고 흘러 내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아버님의 그 강건하시던 육신이 살아 생전에 이루고 싶어하시던 그 모든 일들은 온전히 저희들의 몫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가슴으로 전해지고 느껴지던 그 따뜻한 사랑과 엄한 훈육과 당부와 염려들은 아버님이 비록 계시지 않더라도 저희들이 살아가는 동안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더욱 '순리대로 살고, 형제들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어머님을 더욱 잘 모시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아버님 영전에서 다짐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이승에서 평생 동안 그토록 열심히 일하셨으니 이제 저승에서는 부디 편히 쉬소서. 그리고 이승에서 겪었던 그 많은 육신의 고통들 또한 이제는 모두 내려 놓으소서. 그리고 아버님께서 못내 간직하셨던 근심과 걱정들이 남아 있으시더라도 이제는 그마저 다 내려 놓으시고 제발 편히 쉬소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님!

부디 평안히 영면하소서!




2011년 5월 31일 불효자인 들째아들이 엎드려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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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0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6-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 중에 계시는 줄만 알았는데, 그세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래도 지금은 아버님께서 고통 없이 편히 계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기운 잃지 마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버님께서 바라시는 오렌님의 모습일 겁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oren 2011-06-02 10:24   좋아요 0 | URL
stella님께서 남겨주신 위로의 말씀 덕분에 조금이나마 기운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마녀고양이 2011-06-1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동안 바빠서 몰랐습니다.
너무 늦은 날이 되었지만, 진심으로 위로를 올립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oren 2011-06-17 15:42   좋아요 0 | URL
벌써 한 달이 지난 일이 되었네요.
늦게까지 찾아 오셔서 위로의 글까지 남겨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2011-06-23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3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