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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 5월 '영양 산나물 축제'때 고향인 영양에서 가져온 홍보 소책자
'文香(문향)의 고장 · 淸靜(청정)의 寶庫(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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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책자에 실린 지도
- 도산서원, 퇴계종택, 이육사 문학관, 주실마을(조지훈 생가), 지훈 문학관, 감천마을(오일도 생가)
두들마을(이문열 생가), 정부인 장씨 예절관 등등 인근에 둘러볼 곳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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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고향 감천마을과 그 주변
- 고향인 감천마을은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새로 난 덕택에 영양읍내와는 4km정도로 가까워 졌지만,
어릴 땐 구불구불하던 비포장도로인 신작로를 따라 6km 정도의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엔 마을에 있던 감천분교에서 4학년까지 다닌 후 5학년부터 읍내로 진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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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학을 사랑했던 문인의 추억을 따라.....'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7988311359023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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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볼 만한 곳들(두들마을, 주실마을, 감천마을, 서석지)과 지역축제(산나물축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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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사마을로 유명한 주실마을과 조지훈 시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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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실마을 풍경
-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식 날 국어선생님이 매우 어려운 여름방학 숙제를 내주셨던 게 기억난다.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등등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엔 그런 책들이 없었고, 마침 내 짝궁이 주실마을에 사는
조○○였기에 그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기네 집에는 그런 책들은 수북하게 있으니 빌리러 오란다.
그래서 어느 더운 여름날 아침 일찍 우리 마을에 살던 친한 친구 한 명과 함께 '단편소설집'을 빌리러
우리 동네에서 주실마을까지 걸어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침 일찍 우리 마을을 나섰던 것 같았는데,
책을 빌려 나눠들고 우리마을까지 되돌아오니 날이 저물어가던 기억이 난다.
걷기에 제법 불편했던 신작로길이었고 편도로 15km는 족히 되었을 거리인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당시엔 그 정도는 걸어갔다 오는 게 너무나 당연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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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감천마을과 오일도 시인 소개
- 입향시조(入鄕始祖)로부터 400년을 대대로 살아온 우리 고향과 집안 할배인 오일도 시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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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향 마을의 풍경
- 실제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의 우리 마을 사진이 담긴 소책자를 보고 감탄했는데,
경북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여전히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좋다.
측백수림앞 반변천은 여름철엔 멱 감는 장소로, 겨울철엔 썰매 타는 장소로 애용했던 곳인데,
지금은 공원과 소나무숲도 조성해 놓았고 낚시를 즐기기에 좋은 장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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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두들마을과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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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두들마을의 모습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7988311359027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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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지바우('정자바위'의 사투리)의 풍경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7988311359027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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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가 자리잡은 곳은 산자락 같지만 실제로는 깊은 강물을 낀 절벽 위이다.
(정자와 산자락 사이를 가로 지르는 강물엔 쏘가리와 메기 낚시를 즐길 만큼 물이 깊고, 강폭도 수십미터에 이른다)
어릴 때 여름철이면 정자 아래 절벽에서 깊은 소(沼)를 향해 줄지어 몸을 내던지며 물놀이를 즐겼고,
동네 청년들은 가끔씩 야밤에 산너머 다른 동네의 '닭'을 훔쳐와 삶아 먹으며 놀던 곳이기도 했다.
- 나이 드신 마을 어른들이 전해 주시던 옛 얘기에 의하면,
일제 시대때 오일도 시인이 낙향했을 땐 가끔씩 글 잘 짓는 인근의 문인들을 여럿 불러놓고
'시'와 글도 짓고 풍악도 울리면서 나름대로 '선비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단다.
- 정자가 바라보이는 풍경은 마침 내가 태어나서 중3 때까지 살던 생가와는 불과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내가 살던 집의 흙돌담 뒤쪽으로 밭이 몇 뙈기 있고 난 후, 신작로를 건너면 사진 속의 밭과 정자가 이어진다.
우리가 살던 집은 아버님께서 일일이 깊은 산속의 소나무를 베어 와서 지은 집이라는데,
어릴 땐 초가집이었다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 초반에 기와를 얹었었다.
그 집은 80년대 중반 무렵 자식들이 셋이나 서울로 진학하는 바람에 결국 부모님께서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떠나 오시면서 350만원을 받고 팔았는데 시골엔 아직도 그 때 집을 사신 분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
- 이제 조만간 추석이 되면 해마다 그랬듯이 마을을 둘러싼 이 산과 저 산에 자리잡은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억센 수풀길들을 헤치고 다니며 일일이 벌초를 하려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태어나서 꿈을 먹고 자랐던 아름다운 고향 그 곳에 가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어릴 때 내가 살았던 집'과 홍시를 수시로 따먹던 담장 옆 감나무도 둘러보고,
감천분교가 있던 학교 뒤 언덕에 올라서서 정지바우를 비롯한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까마득한 그 옛날의 마냥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가보는 시간들이 있어서,
아직도 늘 '고향'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가슴이 설레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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爐邊(노변)의 哀歌(애가)
오일도(吳一島)
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무 잎 하나도 안남았겠다.
季節(계절)의 凋落(조락), 잎잎마다 새빨간 情熱(정열)의 피를 마을 아이 다 모여서 무난히 밟겠구나.
時間(시간)조차 約束(약속)할 수 없는 오오 나의 破鍾(파종)아 鬱寂(울적)의 夜空(야공)을 이대로 默守(묵수)하려느냐!
구름 끝 熱叫(열규)하던 기러기의 한줄기 울음도 멀리 사라졌다, 푸른 나라로 푸른 나라로ㅡ
고요한 爐邊(노변)에 홀로 눈 감으니 鄕愁(향수)의 안개비 자옥히 앞을 적시네.
꿈속같이 아득한 옛날, 오 나의 사랑아 너의 乳房(유방)에서 追放(추방)된 지 이미 오래라.
거친 비바람 먼 沙漠(사막)의 길을 숨가쁘게 허덕이며 내 心臟(심장)은 찢어졌다.
가슴에 안은 칼 녹스는 그대로 오오 路傍(노방)의 죽음을 어이 참을 것이냐!
말없는 冷灰(냉회)위에 秩序(질서)없이 글자를 따라 모든 생각이 떴다ㅡ 잠겼다ㅡ 또 떴다ㅡ
ㅡ앞으로 흰 눈이 펄펄 山野(산야)에 나리리라 ㅡ앞으로 해는 또 저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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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1935년 《시원(
詩苑)》 제1호에 발표.
애수와 영탄으로 망향의 정을 읊은 명시(
名詩)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어둡고 괴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인의 자연관조의 정서가 슬픔과 허무를 자아내고 있다.
시인의 비애를 가을의 조락에 의탁, 정열적 리듬과 분위기를 빚어낸 한국의 대표적 낭만시의 하나이다.
- 출처:두산백과사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