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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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동영상을 만들 때마다 느끼는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름난 문학작품일수록 유튜브에 동영상을 만들어 올릴 때는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사실도 거듭 느낀다. 자칫하면 작품에 담긴 내용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오독했으면서도 그걸 도리어 자랑스레 떠벌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영상이 아니라 활자화된 글이라면 나중에라도 대처하기가 아주 쉽다. 아무 때나 자신의 오류를 발견하는 즉시 흔적도 없이(!) 자신의 문장들을 고치거나 없애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상은 한번 업로드한 이후에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기가 몹시 어렵다. 그 영상을 송두리째 삭제하기 전까지는.
수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명망(?) 있는 유튜버가 올려 놓은 동영상에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게 분명해 보이는 '형편없는 오독'을 발견할 때에는 쓴웃음이 나온다. 구독자들의 수준이 유튜버를 따라 형성되는지는 몰라도, 그런 동영상에 덕지덕지 달린 수많은 댓글 중에서 따끔한 비판 한 마디 없는 걸 보면 더욱 씁쓸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나름대로 상당한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어떤 영상을 살펴 보고는 쓴웃음보다는 안타까운 마음부터 앞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 자체를 바꿔 놓은 정도는 실수나 애교로 봐줄 수 있다손 치더라도, 등장인물들 사이의 '만남' 자체를 뒤죽박죽으로 순서를 뒤바꿔 놓은 부분은 너무 엉성해서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여주인공인 안나가 갑작스레 모스크바로 친정 오빠와 올케 언니를 만나러 오게 된 계기, 올케 언니를 만나기 앞서 기차역에서 우연히 브론스키부터 먼저 만난 경위, 안나가 키티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무도회에 갔다가 도리어 브론스키에 매혹되어 키티의 훼방꾼으로 뒤바뀐 아이러니, 안나가 자기도 모르게 브론스키에게 매혹된 자신의 모습에 당혹해 하며 서둘러 모스크바를 떠나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가지만, 귀가행 기차 안에서 또다시 브론스키를 만나 점점 더 그에게로 빠져드는 모습 등등을 (작가가 그려놓은) '사실임직한 순서 그대로' 정확하게 해설하지 않고도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이 가능할까.
우리의 여주인공(!) 안나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난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니고 브론스키 백작이 가장 먼저였다. 그런데도 안나가 모스크바에서의 볼 일을 다 끝내고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가는 길에 기차역에서 '처음으로' 브론스키를 만났다고 해설하는 동영상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은 일일까. 등장 인물들 사이의 '만남의 순서' 자체를 뒤바꿔버린 '세계 최고의 문학작품 해설 동영상'이 이미 수 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에 의해 수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검색 상위 노출의 혜택'을 꾸준히 누릴 듯한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알라딘의 책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안나 카레니나』는 어쨌든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 가운데 하나다.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남긴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 위선, 질투, 신념, 욕망, 사랑 등 인간의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 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소설이다. 동시대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는 평가와, 러시아 출신 소설가인 나보코프로부터 '톨스토이 스타일의 정점'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 알라딘 책소개 중에서
이런 걸작 소설에 대한 '작품 소개'를 한답시고, 리얼리티가 생명인 소설에서 '리얼리티 자체'를 뒤바꿔 버리면 어떡하란 말인가. 톨스토이가 그토록 강조했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너무 배치되는 게 아닌가.
이런 불편한 얘기는 이쯤 하고, 차제에 다시 한번 『안나 카레니나』의 문학적 위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도 이번에야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나의 나이브한(?) 생각보다는 훨씬 더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일부러 직접 만들어 본) 다음의 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204/pimg_7798831132436152.jpg)
놀랍게도 『안나 카레니나』가 영미권 유명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로 뽑힌 것이다. 『마담 보바리』 가 뜻밖에도 2위였고, 『전쟁과 평화』가 3위였다. 나는 <최고 작품 20선>에 뽑힌 작품 가운데 세 작품(7위, 10위, 19위)만 빼놓고는 다 읽었는데, 이 가운데 몇몇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로 바꾸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콕 집어내듯 어떤 작품을 빼고 어떤 작품을 대신 집어넣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밝히고 싶지 않다.(너무나 개인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판단이고, 내 생각에 선뜻 동의해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작품의 명성에 걸맞게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영화화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기회에 살펴 봤더니, 안나 카레니나 역을 맡았던 여배우들은 과연 쟁쟁했다. 그레타 가르보(1935년), 비비안 리(1948년), 소피 마르소(1997), 키이라 나이틀리(2012년)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소피 마르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작품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만들 때 주로 사용했던 이미지들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으로 나섰던 2012년작 영화를 많이 참고했는데,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 상상했던 안나의 이미지와는 조금 벗어나지만, 뜻밖에도 안나의 내면 연기를 아주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일 아쉬운 건 '레빈의 시골 생활'을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점이다. 레빈이 여름철마다 농부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풀베기에 열중하는 장면, 애완견과 함께 멧도요를 사냥하는 장면 등등은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명장면인데도 불구하고, 작품 소개 동영상에서는 그걸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24분짜리 동영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이미지 컷은 대략 200장 가까이 소요됐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204/pimg_7798831132436171.jpg)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204/pimg_7798831132436172.jpg)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그림도 따로 만들어 봤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0204/pimg_7798831132436176.jpg)
이 작품을 해설하면서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의 비교 설명도 조금 덧붙여 봤다. 톨스토이의 다양한 이미지도 찾아 보고, 『전쟁과 평화』의 육필 원고, 『안나 카레니나』의 육필 원고 이미지까지 찾아 넣었다.
이렇게나 열심히(!) 동영상을 만들어 올렸지만, 업로드한 지 무려 24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조회수'는 고작 50회 남짓이다. 도대체 왜 이토록 『안나 카레니나』에게 무관심한 걸까. 이 또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탓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위안으로 삼아 본다. 바이러스는 참으로! 밉다!!
유튜브 동영상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3rMl-7frv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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