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네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9∼10쪽)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

 

 

 * * *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집어들고 여기 저기를 펼쳐 보다가 오늘은 문득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예전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스쳐 지나갔을 게 분명한 어느 대목에서 갑자기 딱 멈추고 말았다. 안톤 슈낙이 말한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때문이었다. 비록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편지를 단 한 통도 간직하고 있진 않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괜시리 울컥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37년생인 아버지의 학력은 국졸이 틀림없다. 중학교까지 다녔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아 본 최초의 편지는 아마도 1978년 봄쯤이었던 듯하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 안동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 한기에 겨우 두 번쯤 고향엘 다녀왔을 뿐이었다. 중간 고사 끝나고 한 번, 기말고사 끝나고 또 한 번. 그 사이사이를 메꿔주는 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께 드리는 문안 편지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화기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물론 내가 자취하던 주인댁의 안방에도 떠억하니 전화기가 있었지만, 그래봐야 우리 동네엔 동장댁에만 딸랑 한 대의 전화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 당시 전화기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전보처럼 긴급히 사용하는 비상 통신 수단에 가까웠다. 내가 동장님댁으로 '내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달려갔던 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고입 시험 합격 통지를 받을 때였다. 내 앞으로 전화가 와 있다는 동장님의 방송을 듣고 그 전화를 받으러 종갓집 못둑 위를 마구 내달릴 때 내 얼굴에 부딪혀 오던 차디찬 겨울 바람의 느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안동에서 3년을 보낼 동안에 내가 아버님과 주고 받은 그 많은 편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 덕분에 어느새 익숙해진 아버님의 필체를 다시 마주한 건 삼척에서 신병 훈련을 받을 때였다. 6주 동안의 신병 훈련은 대체로 견딜 만했지만 생각보다는 몹시 빡센 것도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내 생일이었던 6월 29일에 입대해서 여름 더위가 절정을 넘긴 8월 14일이 되어서야 신병 교육대를 빠져 나올 수 있었으니, 삼복 더위를 온통 거기서 다 보낸 셈이었다.

 

1983년 여름의 어느 밤, 삼척의 바닷가 후진 해수욕장에서는 보니 엠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가 흥겹게 흘러나오고, 밤바다를 훤히 밝히는 온갖 불빛들이 저 멀리서 산 아래 바닷가에서 아롱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에 우리 신병들은 이름도 모를 어느 야산의 훈련장에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아주 가혹한 '얼차례'를 받고 있었다. 야간 각개 훈련의 마지막 훈련이었는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철모 위에 원산 폭격'을 무려 1시간 가까이 받았던 것이다.(나는 악으로 깡으로 버텼지만, 결국 머리가 다 짓이겨져 그날 밤 의무대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나중에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야 반창고를 떼어냈고 이내 손바닥만 한 딱지가 앉았는데, 그 여파로 머리카락이 쏙 빠지는 바람에 한동안 발모제를 사다 발라야 했다.) 극한에 가까운 얼차례를 받고 난 뒤에 뒤따르는 카타르시스는 대개 '어머님 은혜'를 부르는 것이었다. 다들 첫 소절도 다 부르지 못하고 목이 메어 꺼이꺼이 울면서 그 노래를 겨우 따라 부르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그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훈련소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총기 수입까지 다 마치고 나서 잠깐씩 한가한 틈에 주어지는 '편지 쓰기 시간'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다들 효자 심정이 되는지, 볼펜만 붙잡으면 편지지를 너댓장씩 꽉꽉 채우며 온갖 참회의 심정들을 열정적으로 마구 쏟아냈더랬다. 매번 편지의 시작은 똑같았다. '아버님 전상서,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대소간의 어르신들도 두루 건강하시겠지요? ' 하는 투였다. 그때 부모님과 주고 받은 편지가 얼마나 구구절절했던지는 제대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들은 바로는, 내 편지를 받아보실 때마다 아버님께서 장문의 편지를 손수 어머님께도 읽어 주셨으며, 그 때마다 두 분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쓴 편지 때문에 부모님께서 눈물까지 흘리셨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더랬다. 군복무때 내가 쓴 편지가 몇 통이었는지, 내가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또 얼마만큼이었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편지들이 지금 단 한 통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그 옛날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고 받는 편지 때문에 우표값도 적잖이 들었던 듯한데, 까마득한 옛날의 소인이 찍힌 그 많은 편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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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2-3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oren 2018-12-31 14:28   좋아요 1 | URL
한 해 동안 겨울호랑이 님 덕분에 서재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겨울호랑이 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cyrus 2018-12-31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마지막 날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oren 2018-12-31 14:29   좋아요 0 | URL
cyrus 님께서도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에는 더욱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