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보수, 수구 세력이 수십년간 줄기차게 불러왔던 노래의 제목은 '상호주의'였다. 북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목표는 '북진 통일'이라고 노래 부르며 '평화 통일'을 논했다는 이유로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형시켰던 이승만 정권 시절이나 체제 경쟁이 극심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 비하면 그나마 전향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상호주의'란 것이 양보와 타협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늘쌍 조건과 제약을 앞세우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광복 60돌을 맞아 그들의 '상호주의'는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북한 대표단의 전격적이고 파격적인 현충원 참배를 둘러싼 이들 수구보수의 태도에는 자신의 생존권이 걸린 절박함이 느껴진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히 북 대표단의 현충원 참배가 즉각 남측 정부 대표단의 김일성 묘소 참배 요구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북측의 참배를 둘러싸고 그 의의를 논하기에 앞서 "도데체 왜?"라며 북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에 바쁘다.

<동아일보>는 “이런 ‘북한 눈치보기’가 북한의 자신감과 오판을 키워줌으로써 진정한 남북 화해·협력에 대한 남한 내부의 광범위한 합의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며, 우리들의 스타 조갑제 옹은 "대한민국의 혼을 빼려는 저주의 굿판과 분열의 깽판…"이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국가 보안법 폐지, 장기수 북송 문제 등에 대해 한결같이 "상호주의"를 앞세워 가며 대승적인 양보와 선 화해 정책에 강력히 반대 해 오던 그들이 북측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가당착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자유 민주주의 체제 유지(?)에 온힘을 다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정작 체제에 대한 자신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항상 북한의 이념공세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자신들이 그토록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본주의에 대해 왜 그리 자신이 없을까? (이것은 사실 그들의 연극이다. 민중의 공포심을 자극해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변화화는 국제 정세와 남북 관계의 진전에 따라 "북진통일"에서 "상호주의"로 간판을 슬쩍 바꾸기는 했지만, 그들의 본심은 여전히 "북진통일"을 외치던 5~60년대의 냉전적 시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들은 결코 화해와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남북의 긴장관계와 위기 조성에 그들의 밥그릇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수구세력은 분단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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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hand 2005-08-1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어찌보면 조선일보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보다는 갑제옹의 무대뽀가 더 순수(???)해 보이기도 합니다.

파란여우 2005-08-16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갑제와 지만원.참 특이한 양반들이죠. 뇌 구조가 어떤지 궁금해져요

oldhand 2005-08-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지만원.. 음.. 할말이 없습니다. -_-;;

로드무비 2005-08-1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통쾌하고 샤프한 글!^^

oldhand 2005-08-1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로드무비님 과찬이셔요!^^

로드무비 2005-08-1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남 씨는 잘 계시쥬?=3=3=3

oldhand 2005-08-18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핫. 해남이.. 물론 잘 지내고 있을거에요. 광주에 사는지라 얼굴은 자주 못 보지만, 지난번에 갔을 때 보니 거의 "동네 유지" 던걸요. ^^
 

1.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 문학 전집 (전 50권)

① 그리스 신화, 호머 이야기

알라딘에는 이 책을 기억하시는 언니, 오빠, 형님, 누님들이 많으실것 같다. *^^*

우리집에 있던 전집은 1972년도 판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형과 누나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들여놓은 것이니까. 붉은 색 케이스가 있는 하드커버본으로, 책 표지는 주홍색이었다. 혹시 자료 사진이라도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 보았으나, 헌책방에서 거래 되고 있는 이 전집의 후속판으로 보이는 것들은 기껏해야 80년대 후반에 나온 판들이더라.

아동문학 전집이라면 당연히 이솝이야기나 안데르센 동화 등이 앞쪽에 위치해 있어야 할 거라는 통념을 깨고 이 문고의 1번과 2번은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와 일리어드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호머 이야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문고의 1,2번을 장식했던 그리스 신화나 일리어드는 사실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좀 거시기한 내용들이었다. 삽화에는 수시로 남여의 나체가 등장했고(고대 그리스 사람들과 신들은 다 벗고 다니는 줄 알았다), 내용도 온통 질투, 복수, 속임수, 간통, 형벌, 죽음 등으로 점멸해 있지 않은가. 오이디푸스 신화 같은 이야기도 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1,2번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생각하는건, 내가 그 책들을 흥미를 갖고 열심히 읽음으로 인해 질투, 복수, 간통, 속임수 등을 배운것이 아니라 어설프지만 어느정도의 "교양"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다. 어린 시절 이후 그리스 신화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독서가 남긴 흔적으로 나는 신화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슬쩍 아는 척 할 수 있는 깜냥은 갖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선정적인 분위기가 감지되면 무조건 어린애들의 눈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재고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봐도 되지만 어린애들은 안돼! 라는 생각은 모든 문화 예술을 압박하고 탄압하는 파시즘적 이념의 출발선이다. 일반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10살만 되어도 책이나 매체를 통해 얻어지는 정보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느정도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의 반인륜적인 범죄가 일어날 때 마다 툭하면 매체 탓을 하는 당국자나 언론들이 많다.(얼마전 있었던 전방에서 일어났던 참사의 장본인이었던 김일병도 "게임광" 운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보다 주요한 근본 원인은 그들이 접했던 만화나 게임이 아니라 그네들의 인성을 결정하는 데 더 큰 영향을 주는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 등 사회 전반의 시스템 문제가 아니었을까. 더 깊이 파고들어봤자 당국자들인 자신에게 이로울게 없으니 애먼 매체나 탓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아,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다시 돌아 오자.
글씨를 막 깨친지 얼마 되지 않은 6~7살 짜리 사내 아이였던 나는 특히나 2번인 <호머 이야기>에 열광했다. 책에 있던 컬러 화보에 뿅 갔기 때문이다. 전집의 각권에는 두장의 컬러 화보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맨 앞에, 하나는 중간에.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호머이야기의 첫번째 컬러 화보는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 장면이었다. 아킬레스는 전차를 타고 있고, 헥토르는 땅위에 서서 창을 든채 아킬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마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그리스 병사들이 그려진 중간 화보도 멋있었지만, 앞장의 포스만큼은 아니었다. 본문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던 나는 날마다 호머 이야기를 빼들고 화보 속의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선망하였다. 그들의 창과 그들의 투구, 그들의 갑옷...

<호머이야기>를 제대로 다 읽은것은 언제쯤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렇게 매달렸던 탓인지, 일리어드의 내용은 충실하게 내 머리속에 각인 되었다.
파리스의 황금사과와 아킬레스의 용맹, 아가멤논의 야심, 헥토르의 번뇌, 오딧세우스의 지혜. 그리고 전쟁 내내 계속되는 신들의 간섭과 알력.
내 인생에서 삼국지 보다 먼저 접한 전쟁 서사시 <일리어드>.

나의 그리스 고전에 대한 어설픈 교양(이라고 할 정도도 안되지만)은 그 시절에 쌓은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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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8-11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일찍 보셨군요.. 울 집에서 저 전집을 들여놓은게 제가 4학년 무렵이지 싶은데....^^

야클 2005-08-12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비교됩니다. 난 아직도 못읽은 책을 여섯살때 보시다니. -_-;;

oldhand 2005-08-1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 다 형과 누나 덕분이지요. 막내들이 그런 면에서는 유리한것 같아요. ^-^
야클님 :: 아동판으로 보는거하고 완역판은 하늘과 땅차이잖아요. 그리고 여섯살때 본건 본문이 아니라 그림 뿐이에요. ^-^

oldhand 2005-08-1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성경이야기인지 성서이야기인지가 있었지요. 아마 3번이었던 것 같네요. 1번과 2번은 제가 워낙 열심히 봤던 거라 기억이 남거든요. 이솝 이야기도 5번 이내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셰익스피어 이야기도 상당히 앞 번호였던 것 같구요.. ^^

로드무비 2005-08-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번이 <15소년 표류기>였나요?ㅎㅎ

oldhand 2005-08-18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핫, 그렇지 않아도 다음 글에 나올 책들중에 <15소년 표류기>가 있는데요. ^_^
 

"우리가 지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건가요?"

"뭐에 대해? 핸드백? 그건 그렇지! 우린 절대로 그걸 못 찾을 거야. 자네 은행 잔고를 전부 걸어도 좋네."

"걸어 봤자 잃을 것도 없어요."

풀이 죽은 루이스가 웅얼거렸다.

- 사라진 보석 P.113 中

어찌 이 콤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스 경사는 추리 소설속에 무수히 명멸한 수많은 왓슨 중에서 단연 가장 귀여운 왓슨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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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1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스 귀엽죠. 여기에 반대적인 인물이 툴툴거리기 잘하는 아치 굿윈이 아닌가 싶네요. 네오 울프의...

상복의랑데뷰 2005-08-1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스와 왓슨의 공통점은 친구를 좋아한다는 점이죠 ^_^

oldhand 2005-08-1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굿윈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왓슨이지요. 아치도 역시 귀여운 면이 많긴 한데 루이스랑은 성격이 많이 다르지요. ^^
친구에 대한 높은 애정도를 가진 두 사람이지만, 루이스의 모스에 대한 감정이 왓슨의 그것 보다 조금 더 복잡(?)한것 같습니다.

panda78 2005-08-1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굿윈도 자기 혼자 추리하고 빗나가면 툴툴대고 하는 게 너무 귀엽더라구요. ㅎㅎ 근데 루이스는 진짜 최고로 귀여워요. ^^ (루이스의 아내가 모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나와있는 부분을 읽어보니, 루이스의 모스에 대한 감정은 왓슨의 그것 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 같아요. ^ㅂ^

oldhand 2005-08-1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스는 그리고 처음엔 모스 보다 나이가 많은 걸로 설정되었을 정도로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약간 초기 설정이 바뀐것도 같습니다만) 중년의 나이라는 것이 또 압권이지요. 손녀를 볼 나이에 그런 귀여운 모습을! >_<

하이드 2005-08-11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맞어요. 모스 경감이 좀 챙겨주면 막 빛이 나잖아요. 좋아서.
아치 굿윈도 너무 좋은데, 당췌 렉스스타우트의 책을 더 볼 길이 없네요.

oldhand 2005-08-1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렉스 스타우트... DMB에서 더 내 주지 않는 다면 고려중인 출판사도 없는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종종 같은 패키지로 묶이는(대표적인 대중 작가라는 이유로) E.S. 가드너 보다는 훨씬 중독성 있는(매력있는) 작가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만두 2005-08-1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이 너무 많아서 엄두가 안나는가봐요 ㅠ.ㅠ

panda78 2005-08-1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 가드너랑 렉스 스타우트를 같이 묶는다고요? 무지 안 어울리는 조합같은데.. ^^;
DMB말고 다른 데서 좀 괜찮은 번역으로 이쁘게 내 주면 좋을 텐데..

oldhand 2005-08-1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 그렇죠? 작품이 너무 많긴 합니다. ^^ 네로 울프 시리즈는 더도 안 바라니 장편 3권 정도만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판다님 :: 렉스 스타우트 작가 소개할때 보면 종종 "가드너와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대중 작가로의 입지를 다져서 인지. 작풍이나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요.

oldhand 2005-08-12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전의 대가가 쓴 책이 출판된다는 뜬 소문을 들은것도 같은데요. 혹 그게 해문의 렉스 스타우트일까요? 해문은 모스 경감 내는 동안은 새 기획은 없을것 같기도 한데,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기대를 해볼까요 그럼? ^o^
 
옥문도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97년 쯤이었을까. <소년 탐정 김전일>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 <관시리즈>를 읽던 때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년 탐정 김전일>은 완벽한 본격 퍼즐 미스터리를 추구한 거의 최초의 만화였다. 연재 만화에서도 이렇게 공들인 독창적 트릭(물론 표절의혹이 짙은 트릭들도 있지만 말이다)이 등장할수 있다니 미스터리에 관한 한 일본의 토양은 참으로 풍성하구나라는 부러움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인공의 이름이 왜 김전일 일까 라는 의문.
김(金)은 분명히 한국의 성씨인데. 김전일이 한국인 3세쯤 된다는 설정은 책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랬다. 추리 소설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당시 "요코미조 세이시"와 "긴다이치 코스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김전일"이 "긴다이치"라는 특이한 성씨의 하나라는 것도. (만화 속에서 김전일을 "전일아"라고 부르는건 좀 심하다.. "긴다이치"를 "다이치"라고 부르기도 하나?)

<혼징 살인사건>으로 세상에 모습을 알린 긴다이치 코스케.
그로부터 9년 후,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동원되어 남태평양 전선을 전전하던 긴다이치는 전쟁이 끝나고 고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귀향선에서 병사한 전우의 부탁으로 전우의 고향인, 에도 시절 죄수들을 유배했던 "옥문도"라는 기분나쁜 이름을 가진 섬에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칭" 그의 손자가 늘 그러하듯이 의문의 연속 살인 사건에 직면한다.

리스트와 순위 매기기 좋아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나라 일본. 1986년 일본의 유명 잡지인 <문예 춘추>에서는 자국 내 각계의 추리 소설 매니아들로부터 설문을 받아 "일본 추리 소설 100편"을 선정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47년 작인 <옥문도>는 당당 1위에 올랐다. 이 리스트가 국내 추리 독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 <옥문도>는 전설이 되었다. 일본 추리소설들이 많이 소개되던 80년대. 대부분의 작품들은 사회파 추리소설들이었다. 상대적으로 그보다 앞선 시기에 활약했던 본격 추리 소설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은 거의 소개되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 애호가들의 궁금증과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드디어 <옥문도>가 국내에 출판 되었다.

<옥문도>는 1947년에 발표된 "본격 추리 소설"이다.
본격 추리 소설은 그 매력 만큼이나 한계가 명확한 장르이다. 올 봄 국내 초역된 1948년 작인 일본 본격 추리 소설의 대표작 <문신 살인 사건>을 읽고 난 후 들었던 생각은 "10년만 일찍 내가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하는 진한 아쉬움이었다.(문신 살인 사건이 나빴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소설은 아주 "웰 메이드"한 훌륭한 본격 추리 소설이다.) 그만큼 범죄의 트릭과 명쾌한 탐정의 해결에 전념하는 본격 추리 소설은 미스터리에 닳고 닳은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본격 추리 소설들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황금기 시절의 작품들에 비해 추가적인 요소들을 이식한다. 그것은 탐정이나 등장 인물의 생생한 캐릭터들일 수도 있고, 자극적이고 철저하게 연극적인 소재와 트릭일 수도 있고, 문학적인 문체와 독특하고 탄탄한 구성일 수도 있다.

나온지 60년이 다 되가는 본격 추리 소설이라는 한계와 긴 시간 애타게 기다려 왔던 전설에 대한 기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일독(一讀)이었다. 당시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의 특징이기도 한 직접적인 작가의 목소리가 소설의 첫 부분을 장식 하는 등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와 묘사 등 책장을 넘기기에 좀 서걱거리는 면이 없지 않았다.
직역에 가까운 번역도 읽기에는 다소 퍽퍽하다. 그러나 <옥문도>에 있어서는 이러한 번역이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충실한 각주도 소설의 분위기를 익히기에 도움이 되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과연 이러한 스타일의 번역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어떻게 전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의 어려움도 이 소설의 국내 소개가 이다지도 늦어진 것에 대한 한 원인이 아닐까.

<옥문도>는 뛰어난 추리 소설임에 틀림없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힘있는 본격 미스터리는 흔치 않다. 사건은 거침없이 진행되며, 독자들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도 벅차지만 사건의 여러가지 요소들이 소설 곳곳에 잘 배치되어 있어서 차근 차근 재독을 하게 되면 그 맛이 더욱 우러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살인이 연달아 발생하고 가족이 살인의 재물이 되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위험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피해자, 연속 살인 사건이 이뤄지는 동안 수수방관하는 탐정.
하드보일드나 현대 미스터리 소설들의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상황들, 등장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에 대한 개연성 등에는 크게 구애 받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소설은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김전일의 할아버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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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0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은 나왔을때 보는게 가장 좋은데 그게 안되니 감안하고 봐야죠^^;;;

oldhand 2005-08-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래도 고전을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지요. 제가 이 책을 읽을때 좀 어수선했던지라 더 집중을 못한것이 좀 아쉽네요.

panda78 2005-08-05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징은 생각만큼 좋질 않아서 이 책 읽을까 말까 했는데.. ^^; 안 읽고 못 배기겠군요.

oldhand 2005-08-05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충실한 작품이다 보니 하드보일드나 현대 범죄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좀 별로일수도 있을것 같아요.

야클 2005-08-0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다 읽었는데 oldhand님 리뷰 보고 나니까 리뷰 쓸 엄두가 안납니다.

oldhand 2005-08-0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맛깔난 야클님의 리뷰가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대요. 제 리뷰야 말로 딴소리만 하는 허접한.. -_-a
 

놀랄 만한 최첨단의 수사를 보여주는 <CSI 과학 수사대> 같은 TV 드라마를 굳이 보지 않더라도 범죄 수사에 있어서 과학적 증거 수집과 분석은 이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수사 활동이 되었다. 1950년대에 씌어진 <경관 혐오>만 보아도 머리카락과 약간의 피부 조직에서 도출해 내는 살인자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프로파일링 기법을 보여준다.

유전자 검사 등으로 인해 이제 황금기 시절의 단골 레파토리였던 시체 바꿔치기 같은 수법은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된 지금. 그래도 아직 범행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훌륭한 증거는 역시 "지문"이 아닐까.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범죄 수사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지문 감식은 추리 소설 안에서도 종종 여러가지 방식으로 언급되고 사용되어 왔다.

19세기 말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셜록 홈즈 시리즈 <노우드의 건축업자 : 셜록 홈즈의 귀환>.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경찰에 의해 지문이 주요 증거로 지목되고 있다.

1913년에 발표된 근대 추리 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인 <트렌트 최후의 사건>에서는 아예 화가인 아마튜어 탐정 트렌트가 자신의 "비기(秘技)"로써 지문 감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 시절만 해도 경찰의 공식 수사 기법은 아니었던 듯 하다.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이 갖가지 트릭이나 속임수의 용도로 사용되기 십상인 추리 소설에서 "지문이 찍혔으니 이 자가 범인이다"는 트렌트의 수사는 오히려 황당하기도 했다.

현대물로 넘어와서 살펴 보자면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모스 경감 시리즈인 <제리코의 죽음>.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피해자 이외의 것으로 밝혀진 지문이 사건 해결과 얽혀 아주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역할을 한다.

주민 등록증 교부시 전국민의 열 손가락 지문을 날인 받아 관리하고 있는 대한 민국. 일각에서는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개인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범죄 수사와 예방,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의 보호는 항상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IT분야에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나는 최근 주로 하는 일이 "임배디드 시스템(embedded system)" 관련 일들이다.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소형 전자제품(휴대폰, MP3 플레이어, PDA 등등)에 독립적으로 들어가 있는 CPU와 시스템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개발 보드"라는, 제품의 기능은 제공되지만 모양은 덜 갖추어진 상태의 물건을 들고 일을 하게 된다.

회로가 연결된 녹색 기판(컴퓨터 안에 박혀있는 갖가지 녹색 판자떼기와 비슷한)이나 임시 방편으로 만들어진 어설픈 플래스틱 케이스를 손에 들고 궁싯거리다 보면, 늘쌍 나의 지문이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것을 보게된다. 그럴때마다 항상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지문들을 스을쩍 문질러 지운다. 그리고 사라진 지문을 보며 흡족해 한다. 이건 분명히 미스터리 소설의 부작용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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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7-2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부작용... 심각하죠... 수술하러, 별것도 아닌 1시간짜리 눈 수술하러 들어가며 코마가 생각나서 무서웠답니다 ㅠ.ㅠ

하이드 2005-07-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이런 페이퍼를 쓰는것 자체가 역시 또 미스터리 소설의 부작용 같네요. 금자씨 보면서, 피 닦아내는 것 보고, 저거 뭐더라 막 칙칙 뿌리면 다 나타나는데. 그랬다니깐요. 얼마전 본 CSI에서는 범인이 경보장치 있나 보려고 벽에 귀댔다가 지문, 아니 귀모냥으로 범인 찾아내는 것도 봤는데. 저야말로 요즘 CSI 보니라 부작용이 심각합니다요.

줄리 2005-07-2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두 뉴스에서 어떤 범죄가 나오든 그 뒷배경을 상상하고 경찰들이 어떻게 증거를 잡을까 저 나름대로 추측하며 흐뭇해 하는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지요. 저두 CSI, Law and Order 팬이거든요 ㅎㅎ 올드핸드님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파란여우 2005-07-2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사설탐정 본성을 확인하는 뻬빠입니다.
전, 지난해 간단한 처치를 받으면서도 존 그리샴의 소설이 생각났어요...다신 안 읽어~~

oldhand 2005-07-2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 수술하러 들어갈 때에는 원래 별거 별거 다 생각나기 마련입니다만은.. 무서우셨겠네요. ^^
하이드님 :: 영화나 드라마 같은거 보다 보면, 아.. 저거 저러면 안되는데.. 그런 생각 많이 들죠? 역시 병인가 봐요. 하하.
줄리님 :: 제 서재에서 줄리님을 뵙네요. 먼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경찰청 사람들이 그래서 인기가 좋았었나 봐요. 저는 CSI는 많이 보지 못했구요.. 형사 콜롬보는 정말 재밌게 봤었더랬어요..
파란여우님 :: 사설 탐정 본성이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 본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5-07-29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더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oldhand 2005-07-2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갈수록 범죄율은 증가하고 있으니 아이러니죠..

야클 2005-07-29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굉장히 어려운 일하시는군요. 뭔가를 만들어 내시는 분들은 존경스러워요. ^^

oldhand 2005-07-2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일은요. 요새는 이 동네가 3D 업종이랍니다. 근무시간 길고 소득은 적고.. 야클님이야 말로 훨씬 전문직에 종사하고 계시는걸요. ^^

oldhand 2005-07-3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 추리 소설들을 읽다가 오랜만에 황금기 고전물을 읽어보면 적응이 잘 안되긴 하죠. 역시 고전 본격물은 추리 소설을 접하기 시작하는 초창기에 열심히 읽어두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