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 문학 전집 (전 50권)
① 그리스 신화, 호머 이야기
알라딘에는 이 책을 기억하시는 언니, 오빠, 형님, 누님들이 많으실것 같다. *^^*
우리집에 있던 전집은 1972년도 판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형과 누나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들여놓은 것이니까. 붉은 색 케이스가 있는 하드커버본으로, 책 표지는 주홍색이었다. 혹시 자료 사진이라도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 보았으나, 헌책방에서 거래 되고 있는 이 전집의 후속판으로 보이는 것들은 기껏해야 80년대 후반에 나온 판들이더라.
아동문학 전집이라면 당연히 이솝이야기나 안데르센 동화 등이 앞쪽에 위치해 있어야 할 거라는 통념을 깨고 이 문고의 1번과 2번은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와 일리어드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호머 이야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문고의 1,2번을 장식했던 그리스 신화나 일리어드는 사실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좀 거시기한 내용들이었다. 삽화에는 수시로 남여의 나체가 등장했고(고대 그리스 사람들과 신들은 다 벗고 다니는 줄 알았다), 내용도 온통 질투, 복수, 속임수, 간통, 형벌, 죽음 등으로 점멸해 있지 않은가. 오이디푸스 신화 같은 이야기도 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1,2번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생각하는건, 내가 그 책들을 흥미를 갖고 열심히 읽음으로 인해 질투, 복수, 간통, 속임수 등을 배운것이 아니라 어설프지만 어느정도의 "교양"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다. 어린 시절 이후 그리스 신화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독서가 남긴 흔적으로 나는 신화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 슬쩍 아는 척 할 수 있는 깜냥은 갖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선정적인 분위기가 감지되면 무조건 어린애들의 눈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재고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봐도 되지만 어린애들은 안돼! 라는 생각은 모든 문화 예술을 압박하고 탄압하는 파시즘적 이념의 출발선이다. 일반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면 10살만 되어도 책이나 매체를 통해 얻어지는 정보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느정도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의 반인륜적인 범죄가 일어날 때 마다 툭하면 매체 탓을 하는 당국자나 언론들이 많다.(얼마전 있었던 전방에서 일어났던 참사의 장본인이었던 김일병도 "게임광" 운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보다 주요한 근본 원인은 그들이 접했던 만화나 게임이 아니라 그네들의 인성을 결정하는 데 더 큰 영향을 주는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 등 사회 전반의 시스템 문제가 아니었을까. 더 깊이 파고들어봤자 당국자들인 자신에게 이로울게 없으니 애먼 매체나 탓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아,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다시 돌아 오자.
글씨를 막 깨친지 얼마 되지 않은 6~7살 짜리 사내 아이였던 나는 특히나 2번인 <호머 이야기>에 열광했다. 책에 있던 컬러 화보에 뿅 갔기 때문이다. 전집의 각권에는 두장의 컬러 화보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맨 앞에, 하나는 중간에.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호머이야기의 첫번째 컬러 화보는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결투 장면이었다. 아킬레스는 전차를 타고 있고, 헥토르는 땅위에 서서 창을 든채 아킬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마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그리스 병사들이 그려진 중간 화보도 멋있었지만, 앞장의 포스만큼은 아니었다. 본문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던 나는 날마다 호머 이야기를 빼들고 화보 속의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선망하였다. 그들의 창과 그들의 투구, 그들의 갑옷...
<호머이야기>를 제대로 다 읽은것은 언제쯤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렇게 매달렸던 탓인지, 일리어드의 내용은 충실하게 내 머리속에 각인 되었다.
파리스의 황금사과와 아킬레스의 용맹, 아가멤논의 야심, 헥토르의 번뇌, 오딧세우스의 지혜. 그리고 전쟁 내내 계속되는 신들의 간섭과 알력.
내 인생에서 삼국지 보다 먼저 접한 전쟁 서사시 <일리어드>.
나의 그리스 고전에 대한 어설픈 교양(이라고 할 정도도 안되지만)은 그 시절에 쌓은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