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랄 만한 최첨단의 수사를 보여주는 <CSI 과학 수사대> 같은 TV 드라마를 굳이 보지 않더라도 범죄 수사에 있어서 과학적 증거 수집과 분석은 이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수사 활동이 되었다. 1950년대에 씌어진 <경관 혐오>만 보아도 머리카락과 약간의 피부 조직에서 도출해 내는 살인자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프로파일링 기법을 보여준다.
유전자 검사 등으로 인해 이제 황금기 시절의 단골 레파토리였던 시체 바꿔치기 같은 수법은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된 지금. 그래도 아직 범행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훌륭한 증거는 역시 "지문"이 아닐까.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범죄 수사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지문 감식은 추리 소설 안에서도 종종 여러가지 방식으로 언급되고 사용되어 왔다.
19세기 말을 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셜록 홈즈 시리즈 <노우드의 건축업자 : 셜록 홈즈의 귀환>.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경찰에 의해 지문이 주요 증거로 지목되고 있다.
1913년에 발표된 근대 추리 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인 <트렌트 최후의 사건>에서는 아예 화가인 아마튜어 탐정 트렌트가 자신의 "비기(秘技)"로써 지문 감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 시절만 해도 경찰의 공식 수사 기법은 아니었던 듯 하다.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이 갖가지 트릭이나 속임수의 용도로 사용되기 십상인 추리 소설에서 "지문이 찍혔으니 이 자가 범인이다"는 트렌트의 수사는 오히려 황당하기도 했다.
현대물로 넘어와서 살펴 보자면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모스 경감 시리즈인 <제리코의 죽음>.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피해자 이외의 것으로 밝혀진 지문이 사건 해결과 얽혀 아주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역할을 한다.
주민 등록증 교부시 전국민의 열 손가락 지문을 날인 받아 관리하고 있는 대한 민국. 일각에서는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개인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범죄 수사와 예방,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의 보호는 항상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IT분야에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나는 최근 주로 하는 일이 "임배디드 시스템(embedded system)" 관련 일들이다.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소형 전자제품(휴대폰, MP3 플레이어, PDA 등등)에 독립적으로 들어가 있는 CPU와 시스템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개발 보드"라는, 제품의 기능은 제공되지만 모양은 덜 갖추어진 상태의 물건을 들고 일을 하게 된다.
회로가 연결된 녹색 기판(컴퓨터 안에 박혀있는 갖가지 녹색 판자떼기와 비슷한)이나 임시 방편으로 만들어진 어설픈 플래스틱 케이스를 손에 들고 궁싯거리다 보면, 늘쌍 나의 지문이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히는 것을 보게된다. 그럴때마다 항상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지문들을 스을쩍 문질러 지운다. 그리고 사라진 지문을 보며 흡족해 한다. 이건 분명히 미스터리 소설의 부작용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