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문도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 시공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97년 쯤이었을까. <소년 탐정 김전일>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 <관시리즈>를 읽던 때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시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년 탐정 김전일>은 완벽한 본격 퍼즐 미스터리를 추구한 거의 최초의 만화였다. 연재 만화에서도 이렇게 공들인 독창적 트릭(물론 표절의혹이 짙은 트릭들도 있지만 말이다)이 등장할수 있다니 미스터리에 관한 한 일본의 토양은 참으로 풍성하구나라는 부러움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인공의 이름이 왜 김전일 일까 라는 의문.
김(金)은 분명히 한국의 성씨인데. 김전일이 한국인 3세쯤 된다는 설정은 책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랬다. 추리 소설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당시 "요코미조 세이시"와 "긴다이치 코스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김전일"이 "긴다이치"라는 특이한 성씨의 하나라는 것도. (만화 속에서 김전일을 "전일아"라고 부르는건 좀 심하다.. "긴다이치"를 "다이치"라고 부르기도 하나?)

<혼징 살인사건>으로 세상에 모습을 알린 긴다이치 코스케.
그로부터 9년 후,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동원되어 남태평양 전선을 전전하던 긴다이치는 전쟁이 끝나고 고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귀향선에서 병사한 전우의 부탁으로 전우의 고향인, 에도 시절 죄수들을 유배했던 "옥문도"라는 기분나쁜 이름을 가진 섬에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칭" 그의 손자가 늘 그러하듯이 의문의 연속 살인 사건에 직면한다.

리스트와 순위 매기기 좋아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나라 일본. 1986년 일본의 유명 잡지인 <문예 춘추>에서는 자국 내 각계의 추리 소설 매니아들로부터 설문을 받아 "일본 추리 소설 100편"을 선정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47년 작인 <옥문도>는 당당 1위에 올랐다. 이 리스트가 국내 추리 독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 <옥문도>는 전설이 되었다. 일본 추리소설들이 많이 소개되던 80년대. 대부분의 작품들은 사회파 추리소설들이었다. 상대적으로 그보다 앞선 시기에 활약했던 본격 추리 소설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은 거의 소개되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 애호가들의 궁금증과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드디어 <옥문도>가 국내에 출판 되었다.

<옥문도>는 1947년에 발표된 "본격 추리 소설"이다.
본격 추리 소설은 그 매력 만큼이나 한계가 명확한 장르이다. 올 봄 국내 초역된 1948년 작인 일본 본격 추리 소설의 대표작 <문신 살인 사건>을 읽고 난 후 들었던 생각은 "10년만 일찍 내가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하는 진한 아쉬움이었다.(문신 살인 사건이 나빴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소설은 아주 "웰 메이드"한 훌륭한 본격 추리 소설이다.) 그만큼 범죄의 트릭과 명쾌한 탐정의 해결에 전념하는 본격 추리 소설은 미스터리에 닳고 닳은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주기 어려운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본격 추리 소설들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황금기 시절의 작품들에 비해 추가적인 요소들을 이식한다. 그것은 탐정이나 등장 인물의 생생한 캐릭터들일 수도 있고, 자극적이고 철저하게 연극적인 소재와 트릭일 수도 있고, 문학적인 문체와 독특하고 탄탄한 구성일 수도 있다.

나온지 60년이 다 되가는 본격 추리 소설이라는 한계와 긴 시간 애타게 기다려 왔던 전설에 대한 기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일독(一讀)이었다. 당시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의 특징이기도 한 직접적인 작가의 목소리가 소설의 첫 부분을 장식 하는 등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와 묘사 등 책장을 넘기기에 좀 서걱거리는 면이 없지 않았다.
직역에 가까운 번역도 읽기에는 다소 퍽퍽하다. 그러나 <옥문도>에 있어서는 이러한 번역이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충실한 각주도 소설의 분위기를 익히기에 도움이 되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과연 이러한 스타일의 번역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의 분위기를 어떻게 전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의 어려움도 이 소설의 국내 소개가 이다지도 늦어진 것에 대한 한 원인이 아닐까.

<옥문도>는 뛰어난 추리 소설임에 틀림없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힘있는 본격 미스터리는 흔치 않다. 사건은 거침없이 진행되며, 독자들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도 벅차지만 사건의 여러가지 요소들이 소설 곳곳에 잘 배치되어 있어서 차근 차근 재독을 하게 되면 그 맛이 더욱 우러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살인이 연달아 발생하고 가족이 살인의 재물이 되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위험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행동하는 피해자, 연속 살인 사건이 이뤄지는 동안 수수방관하는 탐정.
하드보일드나 현대 미스터리 소설들의 기준에서 보면 지극히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상황들, 등장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에 대한 개연성 등에는 크게 구애 받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소설은 본격 미스터리 소설이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김전일의 할아버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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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0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은 나왔을때 보는게 가장 좋은데 그게 안되니 감안하고 봐야죠^^;;;

oldhand 2005-08-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래도 고전을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지요. 제가 이 책을 읽을때 좀 어수선했던지라 더 집중을 못한것이 좀 아쉽네요.

panda78 2005-08-05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징은 생각만큼 좋질 않아서 이 책 읽을까 말까 했는데.. ^^; 안 읽고 못 배기겠군요.

oldhand 2005-08-05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충실한 작품이다 보니 하드보일드나 현대 범죄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좀 별로일수도 있을것 같아요.

야클 2005-08-0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다 읽었는데 oldhand님 리뷰 보고 나니까 리뷰 쓸 엄두가 안납니다.

oldhand 2005-08-0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맛깔난 야클님의 리뷰가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대요. 제 리뷰야 말로 딴소리만 하는 허접한..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