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걸음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트기 전 어둠의 기록

 

하늘빛이 동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시간적 이미지는 바로 동 트기 전 그 어둠의 시간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죽었으나 산 사람처럼

 

살아 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사로잡고 있구나!    - 마르크스, 『자본론1』서문에서

 

“마르크스도 신은 아니지!” 마르크스가 서두를 연다. 쇠 우리 안에 갇혀 노란 횃대 위에 앉아 깡마르고 기다란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말라빠진 기다란 두 팔도 축 늘어뜨린 채 마치 늙은 매 같은 ‘너’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이런 말을 던진다. “마르크스는 이미 우리에게 숱한 고통을 안겨줬어!”

 

이 소설의 서술자(화자)는 ‘너’는 누구인가? 그의 존재감을 파악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소설은 쇠 우리 안에 갇힌 서술자가 쏟아 내놓는 언어의 기록이다. 월요일 오전, 시내 제8중학(우리나라의 중고등과정) 고3 교실이 묘사된다. 직무에 충실한 물리교사 팡푸구이가 수업 중에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교단 위에 엎어졌다. 학생들이나 교사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장례미용사 리위찬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여인이다. 카리스마와 팜프마탈의 소유자다. 그녀의 남편 장츠추 역시 제8중학 물리교사다. 팡푸구이와 장츠추의 집은 서로 얇은 벽하나 사이를 두고 이웃해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닮았다. ‘아름다운 세상’ 장례미용사 리위찬은 어렸을 때부터의 행적이 그려진다. 알뜰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경제 감각이 있는 여인이기도하다. 그녀는 어려서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리위찬의 어머니는 비록 지금은 병상에 누워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지내지만, 한창때는 온 도시를 주름잡던 풍류미인이었다. 이 모녀 사이엔 공통의 비밀이 있다. 역시 소설에선 한 역할을 단단히 하는 왕 과장(나중에 부시장이 됨)이다. 이미 그에겐 예쁘고 상냥한 아내와 천진난만하고 활발한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녀는 왕 과장을 공유한다. 그 반대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저자는 공직자와 권력자들의 성적으로 심히 부적절한 관계를 도마 위에 올린다.

 

일찌감치 장례 미용직에 배치된 리위찬은 처음엔 그 일이 몹시 마땅치 않은 듯 했지만, 이내 적응이 되어 특급 장례사로 시의 모범 노동자로 나아가선 ‘삼팔홍기(三八紅旗)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 부녀연합회가 ’4대 현대화‘에 이바지한 여성에게 수여하는 명예로운 칭호-의 기수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장례미용사를 스토리 전면에 내세웠을까.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설을 하지 않는 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나는 장례미용사가 전체적인 스토리를 리드해가는 이유를 작가가 현재와 과거의 중국의 모습 중 감추고 싶은 모습이 많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하긴 어느 나란들 감추고 싶은 역사의 시간들이 없기야하겠냐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중국의 현실은 여전히 덮어두고 싶은 일들, 포장해야 할 일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충분히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매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서방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할까. 딱딱하게 굳은 이미지의 공산당 간부의 모습일까? 아니면 리위찬처럼 때로는 사람을 혼미(昏迷)하게 만드는 모습일까? 리위찬은 죽은 자를 산자처럼, 아니 그 이상 더 미화(美化)된 상태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최근 그녀의 작품 중 내세울만한 것은 어렸을 적 그녀에게 성(性)을 지도해줬던 왕부시장이다. 업무 중 급사(急死)한 배불뚝이 부시장을 좀 더 격무에 시달리다 순직한 이미지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다. 배도 얼굴도 홀쭉하게 만든다. 이 기술은 후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계속 죽은 사람으로 있어야 해

 

물리교사 팡푸구이의 죽음은 제8중학뿐 아니라 도시의 모든 인민교사들에게 동정과 존경을 받는다. 그의 죽음이 스스로 의도한바가 아니었지만 마치 우리의 전태일을 통해 노동자들의 인권밭에 생명력이 부여된 것처럼 팡푸구이를 통해 교사들의 직무여건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인민들은 “교사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져라! 중년 교사들의 봉급을 인상하라!”고 외쳤고, 돈 잘 버는 기업과 부유한 개인들에게 의연금을 걷어 ‘중년 교사를 위한 건강기금’을 설립하자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팡푸구이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팡푸구이가 아주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다보면 늘 돌발적인 사건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기 십상이지. 이렇게 틀어진 계획은 운명의 변화를 야기하고, 역사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날마다 모든 개인의 신상에, 모든 가정에, 모든 나라에 일어나고 있어. 마르크스주의자는 우연성과 필연성으로 이런 현상들을 해석하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운명과 하늘의 뜻으로 이런 현상들을 해석하고..”

 

정신이 든(살아난) 팡푸구이는 장례식장 냉동고에서 탈출한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온몸에 석회를 뒤집어쓴 채 집으로 향한다. 문을 두드린다. 온 몸이 하얀 남편이 창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그의 아내 투샤오잉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귀신이야!”. 그리고 기절한다.

 

결국 집에도 못 들어갔다.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갈 데라고는 이젠 한 곳 뿐이다. 동료 교사 장츠추의 집이다. 그의 아내는 시의 모범 노동자이며 장의사의 특급 장례미용사로, 이름은 리위찬이다. 작가는 이미 리위찬의 존재를 앞서 여러 번 언급했음에도 마치 처음인 듯 그녀를 소개하며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팡 선생님, 당신 죽은 거 아니었어요?" 장례미용사가 놀라서 물었다. ”내가 선생님을 냉동고에 들여놓았잖아요?“ 장츠추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팡 선생, 자네 죽은 거 아니었어?“ 이쯤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죽은 줄 알았더니 다시 살아났다. 더 이상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나. 에헤라디야~ 하고 말면 이야기도 끝이다. 문제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소설의 무대가 사회주의체제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당신이 죽었대도 좋고, 죽지 않았대도 좋아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대도 좋고, 처음부터 죽은 게 아니었대도 좋아요.” 그녀(리위찬)가 말했다. “어차피 선생님 사정이니까. 하지만 시에서는 선생님이 죽은 줄 알아요. 장의사에서도 선생님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학교에서도 죽었다고 생각하고, 투샤오잉(팡푸구이의 아내)과 팡룽,팡후(아이들)도 선생님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선생님은 살아 있을 수 없어요.”

 

결론이 묘하다. 살아 있을 수 없다니. 그럼 제대로 죽으란 이야긴가. 확실한 것은 현재 상황에 팡푸구이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야말로 전국적인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있다. 팡푸구이가 죽음으로 자신은 물론 주위사람들 모두가 덕을 본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가족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다.

 

 

페이스 오프

 

밤새 그들(팡푸구이, 장츠추, 리위찬)은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결론을 뽑아낸다. 팡푸구이가 그 자리에 함께 있긴 했으나, 그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바로 옆인 자기집에 가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을 뿐이다. 장츠추 부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고비이자, 대목인관계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장례미용사는 장츠추와 비슷하게 생긴 팡푸구이의 얼굴을 약간 매만져(그런데 사실 약간이 아니었다) 장츠추 대신 제8중학 물리교사로 보낸다. 장츠추는 교사 월급에 목을 매고 사느니 진작부터 장사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했으니 장사꾼이 되어 돈을 번다. 두 사람이 번 돈을 합한 다음 둘로 나누어 두 집안의 생활비로 쓴다. 부엌에 팡푸구이를 위해 침대를 하나 놓는다. 팡푸구이는 투샤오잉과 계속 동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등이다.

 

어찌보면 황당한 결론이지만, 어쨌든 세 사람에겐 최상의 합의점이었다. 그러나 희극처럼 시작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될 줄은 세 사람 모두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나 혼자 결정해서 시행해야 할 일은 혹시 잘못 되더라도 나 하나의 실책이나 피해로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럿이 어우러져 결론을 내린 경우 역시 잘 못된 방향으로 나갈 경우에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다. 서로 상대방의 탓으로 돌릴 가능성이 많다.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다.

 

어쨌든 팡푸구이는 동료교사인 장츠추의 얼굴을 카피한다. 장례미용사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집에서 성형수술을 한다. 그녀가 메스를 댄 것은 단지 죽은 자와 산자의 차이다. 아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얼굴이다. 얼굴을 칭칭 감았던 붕대를 풀고 맞닥뜨린 팡푸구이와 장츠추는 서로 심한 당혹스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그 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세 사람 모두 상상조차 못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팡푸구이는 그의 아내 투샤오잉에게 비록 얼굴은 바뀌었지만 '내가 당신 남편이야!'하고 몇 번을 대시했으나 거듭 히스테릭한 반응만 왔을 뿐이다.

 

이 외에도 많은 사건과 인물들의 갈등이 때로는 돌직구로 때로는 매우 서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가히 언어의 예술사다.

 

 

자,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하나. 분필. 소설의 서술자는 쇠 우리 안에 갇힌 채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그는 팡푸구이도 될 수 있고, 장츠추도 될 수 있다고 한다. 소설에선 이어지진 않았으나 후에 팡푸구이의 페이스 오프가 탄로 나면서 지엄한 당과 순진한 인민을 우롱한 죄로 쇠 우리안에 갇혀 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서술자가 오로지 분필만 먹는다는 것이다. 일체의 음식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분필만 먹는다. 청자들은 이야기를 계속 듣기 위해 끊임없이 서술자에게 분필을 공급한다. 색색가지 분필을 먹은 서술자는 그 값을 하기 위해 역시 색깔 있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쏟아낸다. 분필은 판서(板書)용이다. 식용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결국 문자로 기록된다는 것은 그가 하는 말이 곧 언어가 아닌 문자라는 것이다. 이는 이 소설의 작가 모옌이 관모예라는 본명이 있지만,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이란 필명을 쓰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 즉, 서술자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둘. 리비도.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19금에 가까운 리비도 기운이 덮여있다. 독자에 따라선 자칫 성애(性愛)소설로 비쳐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가가 매우 서운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도입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킬러)의 도발적인 성욕(카페에서 처음 본 남자에게 ‘당신 그것 쓸 만하냐 묻는다.’.)을 접하면서 ‘이런, 이런 책이었어?’하고 책을 덮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작가가 그려내는 리비도는 부와 권력집단의 부도덕하고 절제되지 못하는 성(性)을 고발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들의 원초적인 감정과 욕구가 리비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셋.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 지금 중국의 지도부는 급속히 전개되는 자본주의 시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저 좋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금력(金力)또한 권력(權力)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예의 주시하면서 염려하고 있다. 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진 않지만 정치와 경제력의 결탁이 일부 집단에게만 부의 축적이 이뤄진다는 경제적 불균형도 그려진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영원한 레지스탕스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저서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늘날 중국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 중 하나.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의 목표는 (새로운 지배층인)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 지도자들은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이 담보하는) 안정적 위계질서 없이는 자본주의의 불안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떠한 길을 택하게 될까? 더 일반화하자면, (구)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영자로 재부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적대감이 부르주아 계급 없는 관리자 체계를 지향하는 최근 자본주의의 추세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 과거 스탈린의 말대로 "조직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넷. 교육현장에 대한 염려. 이 문제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비춰진 교사들의 처우문제와 교육현장은 그래도 우리가 좀 낫지 않나 싶다. 오죽하면 학교를 때려치고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들은 줄줄이 강물로 뛰어들고 있다.

 

다섯. 열세 걸음. 책을 읽기 전에 진작부터 제목에 마음이 머물렀다. 왜 열세 걸음일까? 열세 걸음밖에 못 나간 것이 아니라, 열세 걸음이나 걸어 간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13이란 숫자가 길(吉)한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답이 나오겠거니 했다. 여덟 걸음에 답이 나왔다. 참새 시리즈의 한 꼭지 같은 글이 실려있다. “...만일 참새가 열세 번째 걸음을 내딛는 걸 보았다가는 앞서의 모든 행운이 죄다 곱절의 악운으로 바뀌어 자네 머리 위로 뚝 떨어져 내린다지 뭔가!”

 

멈춰야 할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다. 현재 중국은 광속도 정도가 아니라 마하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작가는 이 점을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디 중국의 상황에만 대입시키랴. 우리는 너나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는 분위기다. 시력 시야 모두 시원찮은 양무리가 앞서가는 양의 꼬리만 보며 모두 절벽 끝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다더니 딱 그 짝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 내가 살고 남도 살리는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나는 이리 달려가고 있나 자주 점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담게 된다.

 

여섯. 기다림과 문 두드림. ‘하늘빛이 동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말을 다시 옮긴다. 소설의 결말엔 마음이 아프다. 좀 더 기다렸으면 어땠을까. 좀 더 지혜롭게 서로 마음을 모아 봤으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다. 얇은 베니어판 한 장 이웃해있지만, 먼 그대로 살아가는 그네들의 삶이 애달프다. 지독한 어두움은 새벽하늘과 바통 터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왜 생각 못했을까. 좀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텐데..

 

문 두드림. 소설의 초반(페이스 오프 전까지)엔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는 ‘문 두드림’이 있다. 독자의 의식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고 있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그리하고 있다. 이 역시 우리 살아가며 필요한 부분이다. ‘깨어있음’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현재 중국의 활동 작가 중 모옌과 함께 옌렌커를 주목하고 있다. 비슷한 나이(옌렌커가 세 살 아래)인 두 작가의 공통점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써야 하고 읽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건필을 빈다. 그저 나는 열심히 읽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