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학 : 하나의 논박서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영계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니체는 이 책 [도덕의 계보학]과 [선과 악의 저편]을 거의 같은 시기에 썼다. 이 두 책을 저술하는 동안 '힘에의 의지' 체계를 완성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니체가 '힘에의 의지'체계를 완성 할 수 있었던 근거는 허무주의의 극복이다.


2. 니체의 허무주의(Nihilismus)는 소외다. 인류 문명을 통해서 왜 허무주의가 지배적이 되었는지 묻고 동시에 허무주의의 극복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다각적으로 모색한다. 니체의 고찰에 따르면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가치는 형이상학적인 기독교 도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적인 기독교 도덕이란, 간단히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적(허무주의적)인,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삼은 도덕이다. 도덕의 기원은 기독교 사제들의 역할에 직접적으로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3. 니체의 도덕 비판을 쉽게 정리해보면 모든 것을 비우고,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기다. 그리고 그 곳에 새로운 창조적 가치 원리들을 채워넣자는 것이다. 니체는 '군주도덕'과 '가축도덕'이라는 단어를 들어 대비시키고 있다. '가축도덕'을 기독교 도덕, 천민의 도덕 등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본다. 


4. 여기에서 기독교에 대한 해석을 현세의 그것에 대입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든다. 중세의 기독교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쨌든 니체는 제대로 된 도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선 창조적인 군주도덕에 의해 전도되고 해체되며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5. '가축도덕'은 '고통'을 회피하고 부정하지만 '군주도덕'은 '고통'에 과감히 맞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과감히 고통에 맞서는 삶의 모습을 '영원회귀'라고 표현했다.


6. 니체가 '악의 원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열세 살 소년일때부터 였다고 한다. 조숙하기도 해라. 니체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사람들이 '가슴 속에 반은 어린 아이 장난을, 반은 신을'가지는 나이에 최초의 문학적인 어린아이 장난과 최초의 철학적 습작을 이 문제에 바쳤다고 한다. 


7. 니체는 어려서 예술, 특히 음악에 재능을 보였는데 열 살 때 다성(多聲)의 무반주 악곡인 모테토를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열 다섯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한다. 니체는 자신이 열 두 살 때 영광으로 가득한 신을 보았다고 적기도 했다.


8. 도덕의 원천에 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는 파울 레 박사의 [도덕 감정의 원천](1877)이었다고 한다. 니체는 이 책처럼 모든 문장, 모든 결론을 마음으로 배려하면서 읽은 것은 결코 없을 것이라 한다. 


9. 니체는 '좋다'(Good)는 판단은 '좋은 것'을 받았다고 명백히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러한 판단은 '선한 인간들'자신에게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판단은 모든 저급한 사람, 저급하게 생각하는 사람, 비속한 사람, 천민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자기 자신과 아울러 자신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곧 첫 번째 순위로 느끼고 정립하는 고귀한 사람, 강한 사람, 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그리고 높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부언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격차의 파토스로부터 가치를 창조하고 가치의 명칭을 부각하는 권리를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말은 어렵지 않은데 솔직히 그림은 잘 안 그려진다. 


10. "좋은 그리고 나쁜', '선한 그리고 악한'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가치들은 지상에서 수천 년간 계속된 가공할 만한 긴 싸움을 이끌어 왔다. 그리고 역시 오래전부터 두 번째 가치가 아주 확실하게 지배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도 싸움이 끝난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장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11. 니체는 '금욕적 이상'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고 묻고 있다. 스스로 답하길, 예술가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거나 너무 많은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편 철학자들이나 학자들에게는 높은 정신성의 가장 유리한 선행(先行)조건들을 위한 후각과 본능 등과 같은 어떤 것을 뜻한다고 한다. 성직자들에게는 고유한 성직자의 신앙, 그들의 최상의 힘의 도구, 힘에 대한 '최고의'면허도 뜻한다.


12. 금욕적 이상의 예를 리하르트 바그너를 통해서 보고 있다. 바그너가 그의 말년에 순결에 경의를 표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한다. 바그너는 어떤 의미에선 항상 순결에 경의를 표했는데, 금욕적 의미에서 최근에야(니체 시점에서) 비로소 순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시 묻고 있다. 만일 어떤 예술가가 자신의 반대로 급변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3. "바그너는 바로 자신에게 걸맞은 귀한 방식으로 우리로부터, 또한 자신으로부터, 무엇보다도 우선 비극으로부터 작별하려고 했다는 것, 말하자면 비극적인 것 자체에 대해서, 이전부터의 전적으로 전율할 만한 지상의 진지함과 지상의 비참함에 대해서, 금욕적 이상의 반(反)자연 안에 있는 궁극적으로 극복된 가장 조야한 형식에 대해서 지나치게 넘쳐흐르는 최고의 방자한 희극시를 가지고 작별하려고 한 사실을 우리는 추측하고 원하기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14. '금욕적 이상'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본다. 인간에게서 금욕적 이상을 제외하면, 인간은, 동물로서의 인간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상에서 인간의 현존은 아무런 목표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이것은 대답이 없는 물음이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는 결여되어 있다. 모든 위대한 인간의 운명 배후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만 후렴으로 울린다. 니체는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엄청난 균열이 인간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금욕적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대체로 병든 동물이었다.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답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이 인간의 문제였다.


15. 이상하게 니체와는 별로 친해지지 못했다. 내겐 어려운 사람이다. 그러나 더 늦기전에(총기 있을때)자주 만나봐야겠다. 조만간 블로그에 니체의 방을 따로 하나 꾸며주고 싶다. 자주 만나다보면 이해되어질 사람 같기도 하다. 니체가 이 책 서문에 남긴 말은 내게 위로가 되기도 하고, 숙제가 되기도 하다.

 

 "생각건대, 이 저술이 어떤 사람에게 이해하기 힘들고 귀에 거슬린다고 할지라도 그 책임이 꼭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우선 이전의 내 저술들을 읽었으며 그때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내가 가정하는 것을 전제할 경우 이 저서는 충분히 명백한 내용을 가진다. (......) 이 논문의 앞에는 하나의 잠언이 있고, 논문 자체는 이 잠언의 주석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술로서의 읽기를 연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바로 가장 잘 잊힌 한 가지 일이 무엇보다도 먼저 필요하다. 그리고 그처럼 잊혔기 때문에 내 저술들의 '독서 가능성'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현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 되새김질..."  

 

니체가 1887년 7월에 쓴 글이다. 여전히 '현대인'보다는 '소'가 많지 않을까?

그럼 내겐 작으나마 위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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