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시선 - 초판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김현승 지음, 장현숙 엮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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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시력(詩歷)사십 년이면 일생의 三分之二에 해당하는 세월이다. 나는 이 동안에 일제 말기의 칠팔 년간을 빼어놓고는 줄곧 詩를 생각하고 시를 썼다. 시를 사랑하고 시를 괴로워하면서도 시에게서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생명을 거두는 날까지 나는 또 이러한 시를 쓸 것이다. 나의 생애에서 시를 빼어 버리면 나의 일상생활은 빈 껍질과 같은 것들이다."     - 序文 일부


2. 가을의 시인, 고독의 시인, 기도의 시인으로 대표되는 다형(茶兄)김현승 시인을 만나봅니다. 

이 책은[金顯承詩全集]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인의 詩가 모두 실려있습니다. 발췌한 시집은 [새벽교실] [김현승 詩抄] [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날개] [마지막 지상에서]외에 시집 미수록 작품이 20편이 추가됩니다.


3. "새벽 / 세상이 쓴지 괴로운지 멋도 모르는 새벽 / 종달새와 노래하고 / 참새와 지껄이고 / 시냇물과 속삭이고 / 참으로 너는 철모르는 계집애다 / 꽃밭에서 이슬을 굴리고 / 어린 양을 풀밭에 내어놓고 / 숲 속에 종을 울리는 / 참으로 너는 부지런한 계집애다 / 시인은 항상 너를 찍으려고 작은 카메라를 / 가지고 다니더라 / 내일은 아직도 세상의 고뇌를 모른다 / 그렇다면 새벽 너는 금방 우리 앞에 온 내일이 아니냐? / 나는 너를 보고 내일을 믿는다 / 더 힘 있게 내일을 사랑한다 / 그리하여 힘 있게 오늘과 싸운다."       - '새벽' 


4. '새벽'을 철모르는 계집아이로 비유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를 수 밖에 없지요. 새벽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예측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내일도 오늘 같길 바랄뿐이지요. 그 오늘이 참으로 힘든 날이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일은 아직도 세상의 고뇌를 모른다'는 것이지요. 작정하고 고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니 마음을 놓아야겠습니다. 시인의 마음처럼 더 힘 있게 내일을 사랑해야겠지요.


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 구비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가을의 기도' 전문


6. 시인의 詩중 많이 알려져 있는 詩입니다. '겸허한 모국어'를 생각합니다. 일제 시대를 거친 시인에겐 母國語가 애틋합니다. 같은 무렵에 발표된 '내가 나의 모국어로 시를 쓰면'에선..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모국어로 시를 쓰면 / 새들은 가지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마도 그 때 / 같은 제목을 노래하였던가 봐요."


7. 그런데, 시인은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기도하더니..다시 '호올로 있게 하소서'합니다. 아마 그 대상이 그 누구보다도 '내 안의 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에 내 안의 나를 보듬어 안아주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너무 지나친 '自己愛'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구비치는 바다,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온 나의 영혼은 다시 겸허함의 자리에 차분하게 앉아 있어야겠지요. 마른 나무가지 위면 어떻습니까. 그 자리가 내 자리라면 감사해야겠지요. 


8. 이 책을 엮은이 장현숙 교수는 김현승 시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 사상과 양심을 고수하고자 노력했던 우리 시단의 대표적 종교시인이자 명상시인이었으며, 휴머니즘과 이미지즘의 시인이기도 했다. (....) 시인의 시 작품들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딪혀야 했던 인간적인 외로움과 고독과의 치열한 사투 속에서 여과된 눈물의 결정체였으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보석이었던 것이다."


9.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 단단하게 마른 / 흰 얼굴 // 그늘에 빚지지 않고 /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 단 하나의 손발 // 모든 神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 이 마른 떡을 하룻밤 / 네 살과 같이 떼어주며 // 結晶된 빛의 눈물 /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쓸지 않는 / 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 피와 살 //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懷柔에도 / 더 휘지 않는 /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 굳은 열매 / 쌉쓸한 자양 / 에 스며드는 / 에 스며드는 /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  '견고한 고독' 전문 (1965. 10)


10. 약 3년 후 '견고한 고독'은 '절대고독'으로 옮겨집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 내 언어의 날개들을 / 내 손 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 나는 내게서 끝나는 / 아름다운 영원을 /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 더 나아갈 수 도 없는 나의 손 끝에서 / 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詩와 함께"  - '절대고독'  전문 (19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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