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선 - 초판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윤동주 지음, 노승욱 엮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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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序詩



이 詩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그리고 곧 부끄러워집니다. 한 점 부끄럼은 커녕 하늘의 별 만큼이나 오점 투성이인 나의 삶을 보며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여러 해 전 영화배우 출신의 모 국회의원을 사석에서 뵌 적이 있었지요. 나이가 드셨어도 여전히 매력 있으시고 멋스러움이 배여있는 그 분. 명함을 주시길래 받았습니다. 앞 면에는 그 분의 사진과 본명이 적혀 있었고, 명함 뒷 면에는 이 詩가 적혀 있었지요.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그 분에게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되어 안 좋은 소식이 연일 매스컴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분 한테 '주어진 길'을 가고 있으신지 궁금해집니다.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_ '새로운 길' 전문            1938. 5. 10


새로운 길을 찾고 떠나기엔 너무 옹색하기 만한 그 시절에 시인이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존경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게 반복되는 일상, 출 퇴근 길이지만 시인이 그려주는 것처럼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이라는 마음을 심어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새로운 뜻과 생각을 세우며 살아 가야겠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_ '별 헤는 밤' 후반    1941. 11. 5


그렇습니다. 그의 무덤 주위와 이름엔 파란 잔디 정도가 아닌 흐드러진 장미꽃이 피어 있겠지요. 이미 시인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되었지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쓰다듬어 주고, 촉촉히 적셔주고 있지요. 아무리 詩와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시인의 이름 석자는 잊지 않고 있지요. 아마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봄이 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 개나리, 진달래, 노 - 란 배추꽃, //

三冬을 참아 온 나는 /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  즐거운 종달새야  /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처라. //  푸르른 하늘은 / 아른, 아른, 높기도 한데...."   _ '봄'  전문    


봄이 혈관속에 시내처럼 흐른다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겨우내 움츠리고 고통스러웠던 몸 구석구석에 새 힘이 들어차는 기분입니다. 그 에너지는 생명력을 얻어 풀포기처럼 피어나는군요. 어느 이랑에서나, 어느 고통이나 어려움에서나 즐겁게 솟구치는 힘을 얻기 바라는 詩人의 바램을 내 것으로 만듭니다.


"年輪이 자라듯이 /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 가슴 하나 뻐근히 / 年輪처럼 피여 나간다."

            _ '달같이' 전문    1939. 9


 "바다도 푸르고 / 하늘도 푸르고  //   바다도 끝없고 / 하늘도 끝없고 //

  바다에 돌 던지고 / 하늘에 침 받고 / 바다는 벙글 / 하늘은 잠잠. "  

                         _ '둘 다' 전문


"넣을 것 없어 / 걱정이든 / 호주머니는 //

 겨울만 되면 / 주먹 두 개 갑북갑북."        _ '호주머니' 전문.




시인의 대부분의 시는 해방 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 30)가 간행됨으로써 비로소 한국 문학사에 소개됩니다. 그는 직접적인 문단 활동의 체험이 없다는 이유로 문학사 서술에서 제외되다가 김윤식, 김현의 [한국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문학사 범주에 편입됩니다. 그의 시가 위치한 1940년대의 문학사적 공간은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선포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구하던 일제강점기 중 가장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암흑기 속에서 창작된 윤동주의 시는 단순히 민족적 자긍심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고백의 시학을 독창적으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엮은이 노승욱).


이어서 엮은이는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고백은 복합적인 정체성으로 부터 말미암고 있다 합니다. 그는 시대적으로 식민지 청년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서 살아온 실향민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해집니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은 그가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를 이룬 고백의 시학을 구축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합니다.



꽤 여러 해전 중국 연변에 갔던 길에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중학교를 들렀었지요. 건물 한 켠에 마련된 시인의 초라한 기념관(기념실이라고 부를 수준)이 있었습니다. 기념관을 지을 기금을 모으는 모금함에 적으나마 정성을 담고 왔었습니다. 그 후 기념관이 어찌 되었나 검색해봤더니, 그 때와 다르게 건물도 말끔해지고, 학교 운동장에 있던 시비(詩碑)도 새로 세워졌군요. '윤동주 교실' 이라는 간판이 보이네요. 시인이 공부했던 책상 위엔 시인의 조각상이 놓여져 있다고 합니다.  연변에 다시 갈 기회가 되면, 꼭 들렀다 오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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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규암 김약연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42년에 도일. 일본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미션계 사립대학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과 입학. 1943년 일본 특수 경찰에 의해 '사상범'으로 몰림. 어처구니 없는 죄목을 들어 징역 2년이 구형 됨. 독방에 갇혀 [영일 대조 신약성경]을 보며 옥고를 견뎌 내던 중, 일제는 그를 생체실험의 도구로 잔인하게 짓밟음. '이름 모를 주사'를 매일 맞아야 했던 윤동주는 결국 외마디 소리를 높게 지르고 옥중에서 타계. 

1945년 2월 16일.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그의 나이 29세에 순교자적 생을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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