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명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에는 각기 성격이 다른 3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기괴하고, 서정적이고, 팬터지합니다.


지옥변(地獄變)

호리카와 성의 영주와 광기서린 화가와 그 딸이 주요인물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모든 일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세밀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성안의 뭇 백성들은 호리카와 성의 영주를 마치 부처님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공경하고 있군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지옥변] 병풍화를 그린 요시히데(良秀)라는 화공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림 실력으로 따지면 겨룰 자가 없는 이름 높은 화공이지만, 세인들에겐 하도 성격이 괴팍하고 비열한데다가 탐욕스럽고 염치없고 게으르고, 오만불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군요. 온갖 안 좋은 것은 다 갖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가 끔찍히 사랑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의 외동딸입니다. 아비를 닮지 않고 붙임성도 있고 예쁘고, 일찍 어미를 여의어 그런지 배려심도 있고 어른스럽고 영리해서 마님뿐 아니라 많은 시녀들에게 귀염을 받고 있습니다. 아, 이 딸은 지엄한 영주의 시녀로 들어가 있군요. 소설의 화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영주가 이 시녀 그러니까 요시히데라는 화가의 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듯 하다고 하네요. 뭐 딱히 그렇다고 하긴 뭐하지만 아뭏든 그 아이에게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 합니다. 


영주는 화가에게 [지옥변]병풍을 그리게 합니다. 그 그림을 묘사한 대목이 제법 길게 설명되어 있는데, 대단하군요. 화가가 진짜 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그린 듯 매우 치밀해서 보는 이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기절하기 일보 직전상태였답니다. 마치 자신들이 그 지옥불에 휩싸이는 느낌을 받은 모양입니다. 


순서가 좀 바뀌었습니다만, 이 고집스러운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기 전, 자신의 그림중 하이라이트인 불에 탄채로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가마의 모습이 진척이 되지 않자 영주에게 요청을 합니다. 불타는 가마를 직접 봤으면 하는 요청을 합니다. "가마 안에는 아리따운 귀부인 하나가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어지러이 날리며 고통에 차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아아, 그것을, 그 가마 안의 귀부인을 도무지 저는 그릴 수가 없습니다." 웬일인지 영주가 쾌히 응낙을 하는군요. 다음 이야기는 글로 옮기기 참으로 편치 않은 대목이지만, 이야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드디어 가마를 태우는 날, 글쎄 가마안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무참히 쇠사슬에 묶여 가마 바닥에 있는 여자는 이런, 화가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화가가 반은 정신이 나간 채로 가마를 향해 달려가려했지만, 이미 가마는 불길에 휩싸입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왜 그 영주는 화가의 딸을 그 가마에 태운채로 그렇게 보냈을까요. 화자는 그래도 영주를 옹호하고 있군요. 세간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원한이 되어(소설 중간에 영주가 그 딸을 어찌해보려다가 실패하는 대목이 잠깐 스치듯이 지나갑니다)그랬다는 소문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렇게 말을 돌리는군요.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듯 합니다. "그러나 영주님의 생각은 오로지 가마에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병풍화를 그리려는 화공의 비뚤어진 근성을 혼내줄 심산이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정말로 저는 영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 후 달포 정도 지나 드디어 [지옥변] 병풍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동안 광인 요시히데를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병풍이 완성된 바로 그 다음 날 자신의 방 들보에 새끼줄을 걸고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 속에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요. 그 시절 막강한 권력가인 영주의 행태를 고발하려고 했을까요?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무모한 욕심을 부린 것을 탓하려고 했을까요? 제가 느낀 점은 소설의 화자가 부러 영주를 옹호하는 듯한 표현을 했지만, 아마도 그 반대 였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저의 생각을 먼저 표현하고 싶어서 일부러 옮긴이 김명주 교수의 작품해설을 안 읽었지요. 이제 읽어보니 저의 느낌과 같은 부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옮긴이의 해설입니다. "그러나 특히 작품에서 무엇보다 주의해서 읽어야 할 점은 서술자의 태도다. 즉 이 서술자는 소위 '신뢰 할 수 없는 서술자'에 속하는데, 그 서술법에 휘둘리지 않고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서술자는 영주의 가신으로 주군을 위하여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접근하기 쉬울 것이다."

하긴, 저는 화자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옮긴이가 이야기하는 '서술자'가 영주에 대한 이야기를 거창하게 늘어 놓을 때부터 눈치채긴 했습니다.  옮긴이의 해설 중 한 대목입니다. "예술의 승리인가 패배인가의 문제, 딸과 영주와 아버지의 욕망의 삼각 구도에 대한 정의, 그리고 딸을 범한 자가 영주인가 아버지인가에 대한 답도 주어져 있다."


쓰다보니 리뷰가 길어져서 나머지 두 편은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합니다.

무도회(舞踏會)  메이지 천황의 생일날(1886년 11월 3일)이 모티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약 1700명이 연회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참석했을 만한 사람은 상위 0.000001%쯤 되었겠지요.  당시 열 일곱살 난 어느 명문가의 딸 아키코(明子)가 주인공입니다. 

아키코는 일찍부터 프랑스어와 댄스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이 그 실전의 날인셈이지요. 정식으로 무도회장에 가는 것은 그 밤이 처음이었다고 하네요. 그 자리에서 프랑스 해군 장교와 춤을 추게 됩니다. 스치는 듯한 인연의 밤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아키코는 중년을 넘긴 노부인이 되었지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해군 장교는 실존인물이라고 합니다. [국화 부인]이라는 책을 쓴 피에르 로티라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아키코라는 여인은 한사코 그가 알고 있는 그 장교를 '쥘리앵 비오'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녀의 가슴 속엔 그 장교의 그 때 그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니까요.


갓파(河童)  작가 스스로 '걸리버풍 이야기'라고 했답니다. 정신병동에 수용되어 있는 환자 제23호가,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막 해대는 이야깁니다. 이 사람이 어찌하다가 갓파나라에 가게 됩니다. 갓파는 동물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니고, 아뭏든 그렇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지하에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언어와 문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환자 제23호는 얼떨결에 그곳에서 상당기간 체류하다가 다시 인간세계로 올라오게 되지만, 많이 힘들어하는군요. 그 갓파의 세상, 지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갓파의 철학자가 쓴 [바보의 말] 중에서 옮겨 봅니다. '바보는 언제나 자기 외에는 누구도 바보라 생각한다.' , '우리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뿐이다.' , '자기를 변호하는 것은 타인을 변호하는 일보다 곤란하다. 미심쩍은 자는 변호사를 보라'. 아마도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적은 것 같습니다. 


저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일본내에서 이 작가를 부르는 명칭이 다양하다고 합니다. 이지파, 국민 작가, 청춘의 작가 등등. 시시비비가 뒤따르지만, 가장 많이 듣는 칭호는 '일본 근대문학의 챔피언'이라고 합니다. . 타고난 수재형에다 학자형. 도쿄 대학교 영문과 졸. 대학 재학 중 작가로 데뷔. 작가로서의 생은 비록 10여 년에 불과 하지만, 140여 편이라는 많은 작품을 남김. 단편 소설의 명수. 36세 되던 여름날 새벽 자택에서 자살. 현재 그의 이름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인 작가상의 타이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李箱)이 이 작가에게 문학적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고 하네요. 옮긴이는 저자가 이상에게 '문학적 세례'를 주었다고 표현합니다.  이상의 [날개] 서장에 나오는 '박제된 천재'가 바로 아쿠타가와라는 것은 정설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