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인간의 위치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막스 셸러 지음, 이을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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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치감각이라 이름 붙인다.

나름대로 위치감각을 내, 외적 감각으로 나누어본다. 내적 위치감각을 더듬어 찾는 중에 철학과 문화가 피어났다. 외적 감각은 좀 더 본능적이고 생물적이다.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온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팔과 다리의 위치감각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다. 따라서 재활치료를 하는 과정 중에 환자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팔과 다리를 똑똑히 바라보며 운동을 하는 것이 관건이다.

 

플라톤은 철학하는 것이 곧 ‘영원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명백한 이성주의는 ‘금욕적 이상’ 위에 근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책은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의 창시자인 막스 셸러(1874~1928)의 사상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철학적 인간학이란 의미상으로 볼 때 ‘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자 셸러는 오늘날 문제 제기되는 ‘철학적 인간학’이 종래의 인간론과는 다르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환언하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종래의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철학과 과학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매개로 해서 오늘날 새롭게 종합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존재 속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란 무엇인가?”

저자는 ‘인간’이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크게 세 개의 사상권(思想圈)에서 거의 항상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고 한다.  첫째, 아담과 이브, 창조와 낙원, 타락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유대교적-그리스도교적인 전통의 사상권이다.  둘째는 그리스-고대의 사상권인데, 여기서 세계 최초로 인간의 자기의식이 특수한 지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고양되었다.  세 번째의 사상권은 근대 자연과학과 발생심리학의 사상권인데, 이 사상권도 또한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라는 별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가장 후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학은 지금까지 서로 무관한 것들로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저자가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라 하지 않고 더욱 시야를 넓혀 우주에서 인간의 내적 사유를 이끌어냄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란 우리가 생명의 심적 세계 구조 전체를 자세히 음미해 볼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고 한다. 의식도 없고, 감각도, 표상도 없는 ‘감각 충동’이 심적인 것의 최하 단계를 이룬다. 식물은 그 유기적 구조의 재료를 무기물로부터 스스로 마련한다. 따라서 식물은 영양과 성장, 번식과 죽음만으로 그 생존을 마감한다.(식물에는 그 종에 특수하게 정해진 생존 기간이라는 것이 없다).

 

식물과 비교해서 동물은 어떠한가. 동물의 경우는 신경계통의 중추화가 증가하는 것과 함께 동물의 부분 반응간의 독립성도 증가하며, 이와 함께 동물의 신체는 기계적 구조에 점점 유사해져 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생명의 내적 측면의 첫째 단계인 감각 충동은 모든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나타난다 한다. “기관학적으로 볼 때 무엇보다도 영양배분을 통제하는 식물적인 신경계통이야말로 이미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인간의 내부에 들어있는 식물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식물적 신경계통을 위해 밖으로 향하는 힘의 작용을 통제하는 동물적인 신경계통에서 주기적으로 에너지를 빼앗는 것은 아마도 수면 상태와 각성 상태의 리듬을 조절하는 근본 조건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수면이란 상대적으로 식물적인 상태다.” 뇌사상태의 사람을 ‘식물인간’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각자의 내면 상태를 표현’해준다는 말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 속에 나의 내면의 상태가 표출되는 것이다.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내면적, 심적인 존재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능적’이라고 부르는 행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로 행동은 의미에 합당한 것이어야만 한다. 둘째, 행동은 어떤 확고하고 불변적인 리듬에 따라 진행되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어감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대로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발생학적 과정을 예로 들면서 인간이 나이를 들어감은 충동 생활의 강도가 약화되기 때문에(대체적으로) 감각은 ‘순수’감각의 자극 비례성에 가까워진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한다. 덧붙이면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습관의 노예가 되어간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적용되는 부분이다.

 

습관이라는 것도 모방과 모사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전통(Tradition)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 모방과 모사에서 형성된다한다. “전통이란 같은 종이 누려 온 과거 생활을 통해 동물의 행동을 규정하는 전혀 새로운 하나의 차원을 생물학적 ‘유전’에 첨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모든 자유 의식적인 ‘상기(Anamnesis)’와 매우 엄격하게 구별되어야만 하고, 또한 기호, 원전, 문서에 근거하는 모든 전승과도 매우 엄격하게 구별되어야만 한다.”

동안(童顔)이라는 단어가 인기 검색어에 포함되어 있다. 얼굴만 어려보이면 되는가? 물론 나이에 비해 더 들어 보인다는 사람들은 이 또한 스트레스일 것이다. 덕분에 강남의 성형외과나 일반 의원들이 안 좋은 경제상황에도 버티고 있다. 저자가 노화와 관련해 인간의 ‘쾌락’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특히 귀담아 들을 만하다.

 

“순전히 쾌락만을 목표로 삼는 생활태도는 분명히 개인생활이나 민족 생활에서 노화 현상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한 방울의 술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셔 버리는’는 오랜 술꾼과 호색적인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높고 낮은 심적인 만족의 기능을 충동적인 기쁨의 상황적 쾌락과 분리하는 것, 생명적인 만족이나 정신적인 만족 기능에 대해 상태적 쾌락이 만연해 있다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일종의 노화 현상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언제나 동물이상이거나 동물 이하 일 수 있을 뿐이지, 결코 동물이 아니라는 말이 참으로 정당하다고 하겠다.”

 

인간이 동물과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동물보다 두드러진 점, 비교도 할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에게 보다 겸허한 자세로 다른 생물들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저자는 동물은 지능과 관련해서보다는 감정적인 면에서 훨씬 더 인간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는 선물, 남을 기꺼이 도우려는 자세, 화해 및 이와 유사한 것을 이미 동물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인간의 감정적인 면은 더 피폐해지지 않나 반성해 볼일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정신’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고 한다. 나아가 정신이 유한한 존재 영역의 내부에 나타나는 활동의 중심체를 ‘인격(Person)’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정신적 존재’는 충동과 환경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환경으로부터 자유롭다. 저자는 이를 ‘세계 개방적(세계에 대해 열려 있는)’이라고 이름붙인다. 동물의 행동이 환경과 충동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풀려나 세계를 자유로운 사고의 상관자로서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셸러의 책을 한 권 읽고 그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저자의 사고의 폭이 무척 넓고 깊다는 것이다. 윤리학과 종교철학, 세계관학, 지식사회학, 철학적 인간학, 의학, 천문학 등이 상식수준이상으로 녹아 들어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는 균형감을 들 수 있겠다. 그래서 후세인들의 평가가 후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 “거상과도 같은 철학자”, “서양 철학을 공부하려면 누구나 셸러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

 

저자가 후반부에서 언급한 글을 특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이겨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자기 자신 속에 추악하고 타락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성향도 감내해야만 한다. 인간은 그러한 성향들에 대해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공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양심이 선하고 적절하다고 인정하고 또한 실천 할 수 있는 그러한 가치 있는 과업에 자신의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러한 성향들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미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서술한 것처럼, ‘악’에 대한 ‘무저항’ 이론 속에 위대한 진리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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