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내가 알라딘을 시작한 2001년 무렵부터 

여기의 비밀번호는 늘 그의 이름이었다. 

자판은 영어키로 둔 채 

한글로 치는 그의 이름은 

칠때마다 내게 말 하는 것 같았다. 

그를 잊어서는 안돼. 

그를 지워서는 안돼. 

어쩌면 그가 니 인생의 마지막 사랑인지도 몰라. 

그래서 

비록 화면에 글자로 나타나지 않는 

*********** 

이런 형태의 비밀번호였지만 

여기 들어올때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누르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아프기도 했었다. 

 

오늘 비밀번호를 바꿨다. 

이제 그의 이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저 내가 외우기 쉬운 것으로. 

또 이메일이랄지 다른 모든것에 걸려있는 

똑같은 그 비밀번호로 바꾸었다. 

비밀번호를 하나로 통일하면 

비밀번호를 잃어버렸습니까? 따위를 클릭할 일은 없다. 

수 많은 아이디를 잊었으면 잊었지 

똑같은 비밀번호. 그 단 한 개를 잊긴 힘드니까. 

 

내가 비밀번호를 바꾼 이유는 

그를 잊어서가 아니다. 

그를 지워서도 아니다. 

단지 

내가 어느 날 부터인가 

그의 이름을 치면서도  

더이상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줄 알았다. 

죽을때까지 못 잊을 줄 알았다. 

아니, 죽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나는 

그를 떠올리면 괴롭고 힘들줄 알았었다. 

그런데 8년만에 

내 안에서 그는 깨끗하게 도려내져버렸다. 

기억은 나지만 

그 기억이 더 이상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니 

그건 도려내진거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살다보니 

어느 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랄 밖에...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씩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건너건너 들리는 그런 소문으로의 그가 아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것을 생각하며 사는지 

아주 가끔은 궁금하다. 

그렇지만 그 궁금함 때문에 

아프지는 않다. 

더이상. 그렇다.  

 

십년도 못 가는 내 사랑 

십년도 채우지 못하는 내 마음 

십년도 유지할 수 없는 내 그리움 

참 가볍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걸 

이제야 알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럴수도 있는건가?  

한해에 대통령이 두 분이나 돌아가실 수 있는 건가? 

아마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무지막지하게 슬프더니 

이젠 슬프지조차 않다. 

하도 기가 막혀서 

하도 희한해서. 

 

코스모폴리탄에서 

8개의 연애 고민을 보내왔다. 

다들 학생들이라서 그런가? 

주로 고민들이 비슷비슷했다. 

난 취업했는데 그는 학생이에요. 

혹은 그녀는 취업했는데 난 학생이에요. 

그들은 서로 환경이 달라졌음에, 

또 공통분모가 사라졌음에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앞으로 점점 더 많은 환경이 서로 달라질 것이고 

공통분모는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말이다.  

 

책이 이제 정말로 나오긴 나올 모양이다. 

첫번째 책을 계약하고 거의 석달만에 낸지라 

난 모든 책들이 다 그렇게 후딱후딱 나오는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벌써 7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며칠 전  

겨우 표지 시안이 나왔다. 

다섯개나 나왔는데 

디자인을 전공한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시안이 5개나 된다는 것은 

디자이너가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중 두 개 정도 쓸만하고 

나머지는 그냥 보내보는 거란다. 

즉 강력한 한방이 없다는 얘기. 

그래도 좋다. 

촌스럽지만 않다면 

그리고 이 책값에 이 종이질에 표지가 말이되냐? 싶지만 않다면 

괜찮다. 

이렇게 말 하는 것은 

오늘 1만 2천원의 가격을 달고 있지만 

정말 대강대강 만든 (책의 내용이 아닌 어디까지나 하드웨어적 의미에서) 

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연한거지만 

그 책은 나 재밌게 보라고 보낸 책이 아니라 

일하라고 보낸 책이었다. 

  

잘 아는 기자에게 간만에 전화했더니 

이제 막 파리에서 휴가를 보내고 왔단다. 

아참, 그는 더 이상 기자가 아니다. 

프리를 선언했으니까. 

근데 프리가 되고 나서 더 잘나간다. 

더 바쁘고 돈도 훨씬 더 많이 번다. 

그래서 자신이 잡지사에 있는동안 

얼마나 평가절하되었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했는지 

아주 뼈저리게 느낀단다. 

파리 갔다와서 부럽다고 하니 

'절반은 일했는걸 뭐' 한다. 

그게 실은 더 부럽다는거 

그녀는 알라나? 

 

저녁무렵 기분이 무척 안좋았다. 

뭣때문인지 이유없이 마구 화가 났다. 

그런데 달달한 아이스 카페 모카 한잔과  

라이스 칩 두 봉지를 먹고 나니 

씻은듯이 나아졌다. 

화의 원인은 결국 빈 위장 때문이었나? 

갑자기 내가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배고프면 인정하고 먹으면 될것을 

다이어트 중인것도 아니면서 화내기는... 

 

다음달 18일에 홍대에서 와우북 페스티발이 있단다. 

내 연애 오프 더 레코드도 나오기에 

나는 19일날 참석한다. 

누군가가 내 책을 사는걸 직접 본 적이 없기에 

몰래 숨어서 보면 

살짝 신기할것 같다.  

그리고 좀 고마울것 같다. 

아니 많이 고마울것 같다. 

담당자는 내게 말했다. 

'우리 그때  남은 2쇄 다 팔고 얼른 3쇄 찍어요' 

그래. 나도 3쇄 찍으면 좋겠다. 

어떤 작가들은 책 낸지 한달만에 5쇄도 찍고 6쇄도 찍지만 

어떤 인간은 1년이 훨 지난 이 시점에서야 

겨우 3쇄를 바라볼 수 있다. 

뭐. 내 탓이니 할 말은 없다만 

그냥 그렇다는 소리다.   

팔린 양에 비해서 

여기저기서 찾아주는 곳이 많아 고맙긴 하다만 

책이 많이 나갔다면 

나는 훨씬 더 고마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요즘 내 주변인들은 다 트위터를 한다. 

싸이는 이제 한 물 간건가? 

다들 트위터 얘기만 한다. 

특히 내가 아는 모 작가와 모 디자이너는 

트위터 광이다. 

나도 합류해야하나 잠시 고민스럽다. 

 

컴퓨터를 바꿀때가 되었다. 

이외수 선생께서 맥킨토시를 적극 추천하셨다. 

정말 맥을 살까? 

그래도 아범이 아직은 편하지 않을까? 

근데 맥이 예쁘긴 확실히 예쁘지. 

선생께서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전 세계 5% 사용자 때문에 악성코드 만드는 인간들이 별로 없다나?  

살때 사더라도 

모바일 연애상담 서비스가 시작되면 

그때 사야지. 

지금은 좀 느려도 상관없지만 (사실 욕나오게 느리다.)

48시간 이내 답변해야 한다는 으름장이 적혀 있는 계약서를 보면 

좀 빠른 컴퓨터로 바꾸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낮에 PD가 경품으로 나가는 화장품 셋트 교환권을 슬쩍 챙겨주었다. 

좀... 

기뻤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 빠진다던데 

그게 좀 걱정이긴 하다. 

 

손글씨를 하도 안썼더니 

오늘 뭔가 메모를 하나 적는데  

완전 괴발새발 이었다. 

안그래도 악필인데 

이젠 나도 못 알아볼 지경에다 

쓰면서 그 모양새에 마음이 다 저릴 지경이니 

좀 심각하긴 하다. 

천재는 악필이라던데 

다 뻥인가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떤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할때면 생각한다. 

역시 겪어보지 않고서 거기에 대해 뭐라뭐라 떠드는 것은 다 헛소리 혹은 개소리 였구나. 

이해한다는 말, 난 알 것 같다는 말. 

거기다 나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 부터 니가 그래서 되겠냐는 말까지 

아... 그동안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지. 

뭐든 지가 다 알고 뭐든 다 겪어본 사람처럼 

남의 일에 그렇게 감놔라 배놔라 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든다. 

일상이 힘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래도 힘들다라고 하는 일들 중 대부분은 견딜수 있지 않을까 하고 

제일 기본적인 일상이 힘들어져버리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무너질지도 모른다. 

다만 그 힘이 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질때인지는 각자 개인의 역량(?) 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다리는 일은 이제 지겹지 않다. 

그런데 기다린다는 사실은 여전히 지겹다. 

고생 끝에는 대충 낙이 온다는데 

그게 아니라 벌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이사를 싫어하는데 

요즘들어 자꾸 이사를 가고 싶다. 

아마도 이 공간이 

끝내 내 공간처럼 착 감겨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내게 그렇게 감겼던 공간은  

2000년도에 살던 원룸이었다. 

요즘 자주 거기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내가 쓸고 닦고 어여뻐할 수 있는 공간은 

딱 원룸 정도가 한계인가보다.  

더 큰 공간은 내게 무리다. 

 

바이올린을 하는 친구가 계단에서 떨어져 

두 발목이 말 그대로 똑 하고 부러져버렸다. 

사람많은 대학병원에서는 잔인하게 한날 한시에 두 다리를 모조리 다 수술해주었다. 

그리고 2주 후에 나가란다.  

내가 막 거품을 물자 그녀는 말했다. 

'사실 내 연습실 근처에 정형외과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휠체어 타고 왔다갔다 하면서 

나는 레슨을 하면 어떨까 생각중이야' 

무서운년. 그 와중에도 돈 벌 생각을 하다니. 

하긴 강의 하는 것 보다 레슨이 더 짭잘할테니 누워있어도 삼삼했겠지. 

그런 독한애들을 보면 

난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기도 하고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못 할것 같기도 하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예전 사진들을 펼쳐봤다. 

거기에는 

좀 촌스럽지만 분명히 젊은 내가 있었다. 

젊으니까 예쁘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뭐. 

지금보다는 나은게 사실이니 가슴아프지 않을수가 없다.  

보톡스와 주름살 땡기는 수술. 

이젠 다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세월이 안겨준 포용력이군 흠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좀 거시기 하지만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analei 2009-07-2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사진, 예쁜거 맞아요.
 

 나는 기계치다. 따라서 기계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허나 그러면서도 세탁기, 냉장고, 컴퓨터, 식기세척기, 에어컨, 핸드폰, 무선전화기, 로봇청소기, 오디오 등등 수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다달이 월세를 내는 셋방에서 전세로의 탈출을 그토록 꿈꿨던 것은 제발이지 저것들을 모조리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면서 사용설명서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사에 드는 비용보다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사용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자괴감이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철저한 준비 끝에 절대 헤매지 않으려 저 기계들이 멀쩡하게 움직이거나 돌아가는데 필요한 한 다발의 선들을 용도별로 따로 담고 표시까지 해 두었지만 결국은 이사 전에는 딱 맞아 떨어졌던 선들이 한 움큼이나 남아서 ‘대체 어떤걸 연결 안한 거야’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이런 때에 사용 설명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이나 사용 설명서를 들고 씨름을 한 끝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용 설명서는 기계를 만든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기계가 얼마나 복잡하고도 위대한 것인지 (더불어 그걸 만든 자신은 얼마나 더 위대한지)를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안내서라는 것을 말이다. 갖은 복잡한 말과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쓰인 그 안내서를 보고 있노라면 아마 누구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안내서로는 절대 그 기계의 작동을 도모할만한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사를 한다면 저 기계들을 다시 조립하려고 애 쓰는 게 아니라 이참에 싹 바꾸어서 소비의 미덕을 실천하는 동시에 기계 설치는 구입처의 엔지니어들이 와서 사용설명서 따위는 절대 펴보지 않고 척척 연결하는 기인열전이나 관람하는 게 백번 옳은 일이다.

언젠가 이 고민을 당시 공대를 전공한 남자친구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돌이들이 문장력이 좀 부족하지’

문장력? 문장력이라고? 누가 사용설명서에서 괴테나 헤르만헤세를 만나기를 기대했나? 그도 아니면 하루키의 시니컬함과 빌 브라이슨의 위트를 기대했단 말인가. 나는 그저 사용 설명서 그 본연의 의미대로 기계를 사용함에 있어 도움을 받고자 했을 뿐이다. 사용 설명서를 만든 엔지니어들이야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용어도 설마 그걸 만드는 일 보다 더 복잡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기계를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원을 꽂고 약간의 조립 끝에 사용을 하라는 건데 뭘 못 알아듣는다고. 근데 그게 우리 같은 일반인 (어쩌면 일반인에서 좀 모자라는 나 같은 인간) 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사용설명서 같은 건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나처럼 사용 설명서 기피증 환자를 위해 사용 설명서를 요약해놓은 초 간단 사용 설명서(?)가 존재한다. 드디어 그들도 고급 사용자 (즉 사용 설명서를 모두 이해함은 물론이고 거기에 간단한 응용까지 가능한 천재들) 와 저급 사용자 (사용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하란대로 다 했는데도 기계는 전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기적으로 사용 설명서를 들고 씨름을 해야 하는 경우에 종종 놓이곤 한다. 그건 바로 핸드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초우량 IT강국이 아닌가. 유치원 별님반인 내 조카도, 틀니를 해야 하고 돋보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 보는 우리 할머니조차 핸드폰을 갖고 있으니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닌) 핸드폰 보급률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이제 집 전화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핸드폰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핸드폰이 점점 진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용 설명서에 관한 이해력 저하로 되도록 기계는 한번 사면 다시 그 어려운 사용 설명서를 펼 일이 없도록 폐기처분하기 직전까지 사용하곤 하는데 핸드폰만큼은 그게 어려웠다. 이 기계는 정기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해 줘야만 한다. 내가 최근에 핸드폰을 바꾼 이유는 남들이 자꾸만 내게 80바이트가 넘는 문자나 이미지 전송 따위를 해대기 때문이었다. 내 핸드폰은 워낙 구형인지라 80바이트 이상의 문자가 도착하면 ‘멀티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라고 알려 줄 뿐. 그 멀티 메일의 내용은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미지 전송 따위는 당연히 안 될 밖에. 그래서 별 수 없이 핸드폰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맙소사 사용 설명서가 무려 173 페이지나 된다. 얼마 전 책을 내려고 원고를 보냈더니 출판사에서 350페이지나 된다며 300페이지 정도로 줄이기를 원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173페이지라니. 대체 이 작은 핸드폰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내가 숙지해야 할, 혹은 읽어도 모를 용어들이 얼마나 산재해있을 것인지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주요 부분을 정리하기 위한 노트와 더 중요한 부분을 표기하기 위한 형광펜을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일단 내 핸드폰의 사용설명서는 간단하고도 형식적인 환영 인사 (우리 핸드폰의 질 높은 서비스를 만나게 되었으니 영광인줄 알아 이것들아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나서 바로 협박을 시작했다. 자기네 회사에서 공급된 휴대폰의 ESN을 제거, 변경 혹은 다른 번호의 복제 입력은 불법 행위로서 관련법규 형법 제 347조에 의거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는 처벌대상이 됨을 유의함과 동시에 이러한 불법적인 시도로 인해 휴대폰의 소프트웨어가 손상되어 더 이상 쓰게 되지 못할 경우 그건 전적으로 소비자 니 책임 이라는 얘기였다. 오... 그러니까 이 휴대폰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최고 10년 동안 감방에 갇히거나 내 통장 잔액보다 훨씬 더 많은 2천만 원의 벌금을 낼 수도 있단 말이지? 허나 다행인 것은 나는 ESN이 뭔지도 모르니 그걸 제거하거나 변경 혹은 복제 입력 따위는 절대 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로서 내가 이 핸드폰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2천만 땡겨 달라거나 사식을 부탁할 염려는 덜었다.

그 다음 장에도 협박은 계속되었다. 핸드폰을 남에게 함부로 빌려주지 말라던가 혹은 자기네 회사 이외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했을 경우 고장이 나건 폭발을 하건 휴대폰이 트랜스포머처럼 살인 기계로 변신을 하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말과 함께 빨간색으로 ‘사용자 안내문 - 제작자 및 설치자는 당해 무선설비가 전파혼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명안전과 관련된 서비스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데 이건 아직까지도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서 심폐 소생술을 할 때 주먹 대신 핸드폰으로 심장을 치지 말라는 소린지 아니면 누군가가 내 핸드폰으로 무인도에 갇혔다며 살려달라고 말할 때 전파혼신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건 헛소리로 간주하고 무시하란 얘기인지 도무지 접수가 안 된다. 그리고 이 사용설명서를 읽다가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건설현장, 군사지역, 주유소, 가스누출 위험지역, 화학 약품 보관소 배의 갑판 등에서는 모두 휴대폰을 사용하지 말란다. 나는 오직 비행기 안이나 병원에서나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놈의 나라는 연말만 되면 온 도로가 다 공사중인데 그때는 거의 핸드폰은 무용지물이 되겠군) 이런 협박들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구성품 확인하기. 즉 내가 산 휴대폰을 누군가 미리 뜯어서 베터리등을 슬쩍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페이지가 나온다. 그 다음은 휴대폰에 딸린 명칭들이다. 보니 총 16개이다. 전화번호도 3개 이상 못 외우는 인간에게 16개의 휴대폰 각 부분의 명칭들이라니. 근데 이건 약과다. 아직 시작도 안했다. 그 후에 이어지는 내부 버튼 설명은 무려 12개이고 측면 버튼 설명은 3개이다. 거기다 터치 버튼 사용법이 5개이다. 대체 언제 끝이 나나 싶어 목차를 보니 168개이다. 173페이지에 168개의 목차라. 아마 이걸 돈 주고 팔았다면 초판 1쇄도 다 못 팔았을 게 뻔하다. 

문득 이 핸드폰보다 조금 더 간단한 기계들의 사용 설명서가 몇 페이지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사용 설명서들만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서 핸드폰보다 더 사용이 간단한 기계들의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냥 켜면 뉴스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줄 알았던 TV가 무려 40페이지 (사용자를 더욱 헤깔리게 하기 위해 이건 페이지 순서가 1,2 이런 식이 아닌 1-2 1-3 으로 표기되어 있다.) 토스터기는 무려 83페이지 (빵 하나 굽는데 저 정도의 사용 설명서를 독파해야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밥솥은 24페이지다. (내 밥솥은 아마도 갈비 굽기 모드나 잡채 만들기 등도 되는 모양이다. 아니고선 끽해야 밥 하나 가지고 24페이지씩이나 설명할 리가 없다.)

그 중 하나를 골라 펼쳐 보았다. 내가 가진 에어컨의 사용 설명서 25 페이지에서는 열대야 숙면운전 작동순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대야 버튼을 눌러 열대야숙면운전을 선택하세요. 입면모드-숙면모드-기상모드 순서로 3단계 냉방운전이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3단계 냉방운전의 순서는 열대야숙면운전 선택 시 3단계 온도와 바람의 변화에서 보다 자세하게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난 에어컨을 단 이후로 열대야 숙면운전 모드 따위는 한 번도 사용 해 본적이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말이다. 나 같은 인간들 몇 명과 공학박사, 문학박사, 엔지니어 및 인류학자 몇 명이 모여 사용설명서 사용법 같은걸 만들면 어떨까? 사용설명서를 위한 백과사전이라던가 사용설명서 사용법 100일 완성 같은 책을 내면 좀 팔릴 것 같은데...아니면 안철수 연구소 같은 곳과 손을 잡고 사용설명서 사용법 자동 해석 프로그램 같은걸 개발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세상에 나같은 어리버리한 인간들이 넘쳐흐른다고 가정하면 아마 남은 평생 나는 돈방석에 앉아서 사용 설명서 전용 메이드 같은걸 두고 살 수도 있겠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세상에 더 이상 복잡한 기계 같은 건 나오지도 말고 필요하지도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떠안고 있는 사용설명서의 해석 및 적용에만도 남은 평생을 다 써야 할 지경인데 여기다 더 새로운 것이 추가된다면 난 아마 평생 사용설명서를 해석하느라 정작 그 기계는 사용조차도 못 해보고 내 인생을 종쳐야 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자 그러면 나는 이만 173 페이지에 목차만 168개에 달하는 내 핸드폰 사용 설명서나 읽어야겠다. 어찌 되었건 이걸로 멀티메일이라는 것도 보내거나 받아보고 무려 카메라도 달려 있으니 못난 얼굴이나마 한번 찍어봐야 쓰지 않겠는가? (근데 아뿔싸. 내가 기존에 쓰던 핸드폰과 다른 메이커의 핸드폰이라 멀티메일은 고사하고 한글 찍는 법도 모르겠다. 당분간 80바이트 이상의 문자를 보낼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 이 글은 새로 연재를 시작한 글입니다. 아마 타이틀은 불만제곱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소 불만이 많은 인간인지라 1년정도 소재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했었는데 벌써부터 다음주에 뭘 마감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9-06-1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사용설명서가 100페이지가 넘어가면서부터 할수없이 하드웨서 사용설명서와 소프트웨어 사용설명서를 분책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어느 쪽을 봐야 자기가 원하는 내용이 있는지 헷갈려 하길래, 2장짜리 초간단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구요, 그 중에서도 가장 문의가 많은 기능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는 1장짜리 매뉴얼을 새로 또 만들었지요. 즉 매뉴얼의 매뉴얼의 매뉴얼이 만들어진 셈이죠.
그런데도 여전히 사용법 설명 AS가 줄어들지 않아 결국 새로운 선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에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 하는 기능이나, 조작이 어렵다고 사용하지 않는 기능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가는 중입니다 -.-V

플라시보 2009-06-19 15:26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음..이런 계통에서 일하시나봐요^^ 아..우린 왜 그렇게 사용 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사용 잘 하라고 어서 사용해보라고 만든 책인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죽기 전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니. 하긴 맨 끝장을 보면 '이건 고장 아니여요' 하는 란이 있는데 그건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안그럼 매번 A/S 센터에 전화했을듯.^^ 그나저나 설명서 만드는 입장에서도 애로사항이 많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어려워하니까.. 일단 기계 설명이나 사용은 말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흐흐.

1sosh 2009-06-19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휴대폰 바꿀때마다 그날 하루는 최소한 메뉴얼 보면서 기능공부를 하고했죠 ㅋㅋㅋ
기계들중에서 그중에 휴대폰종족들은 날마다 새로운 모델들이 나오고 가격들은 점점더 제자리인 월급봉투와 이제 별 차이를 못느끼고 뭐 그럽디다 ㅋㅋ
작가님 휴대폰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시는거죠?? ㅋㅋ 축하?드립니다^^
불만제곱 ㅎㅎㅎㅎㅎ

플라시보 2009-06-19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g Oxy님. 흐흐. 그래서 좀처럼 휴대폰을 안바꾸죠. 가격도 뭐랄까 너무 터무니없이 비싸더라구요. 정말인지는 모르겠는데 휴대폰 파는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요즘은 휴대폰 튼튼하게 안만든다고. 왜냐면 주기가 2년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한 4년 정도 고장 안나게 만든다나요? 더 이상 튼튼해봤자 사람들은 분명 2년 안에 갈아치운다고.. 정말 휴대폰처럼 사람들이 끝도 없이 갈아치우는 기계도 없을겁니다.
불만 제곱은 제가 그냥 지은 이름인데 그냥 갈지 아니면 그쪽에서 바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나름 귀엽다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흐흐.
 

연예인들에게는 이른바 굴욕 사진이란 게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걸 지못미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지못미의 뜻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란다. 나는 요즘 들어 정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한때 나의 영웅이었고 내 정신의 일부분이었으며, 팍팍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도록 내버려 두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예능 늦둥이라는 소리를 듣고, 화려했던 과거를 조롱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론 세상이 변했고, 또 대세를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은 그걸 원했을까? 혹시 밥벌이라는 절박함 앞에 마지못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웃기는 사람으로 소모되다가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노래를 부른다 해도 아무도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걸 택했다. 우리가 다운로드 받아서 음악을 듣고, 앨범을 사는 대신 홈피에 배경 음악 정도로나 그들의 음악을 소모하는 동안.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미사리에서 추억의 콘서트를 하거나 아니면 TV에 나와 제 스스로 망가지는 길 뿐이다. 오히려 과거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요모양 요꼴 이라는 식의 웃음은 더 커진다. 이제 우리에게 그저 노래만 잘 부르는 사람 혹은 음악을 잘 만드는 사람 같은 건 더 이상 필요치 않은지도 모른다.

요즘 잘 나가는 가수들은 가수로 인기가 조금 오르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개그맨 뺨치는 입담을 과시하거나 아니면 TV 드라마에서 연기를 한다. 어쩌면 그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서가 아닌, 단지 연예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TV에만 나올 수 있다면 자신이 무엇으로 소모되던, 어떤 종목으로 어필하건 상관이 없는지도.

허나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그들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재주밖에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말로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음악을 택했고, 아마 가능하다면 평생 음악을 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보라. 그들 중 누가 처음처럼 음악을 지금까지도 하며 사는지를.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무대도, 또 노래만 부르며 살 수 있는 수입원도 보장되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자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랬어야 했다. 우리가 적어도 그들의 음악을 사랑했다면, 그들에게 그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제공했어야 했다. 음반을 사건 콘서트 장에 가건. 그들이 만든 작품을 즐기는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음악은 다운받으면 그만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새로운 노래를 가지고 나오면 그 음악에 관한 얘기가 아닌.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십에만 더 귀를 기울였었다. 어쩌면 이제 그들은 그런 우리들에게 진절머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피땀을, 재능을 공짜로만 즐기려는 우리들에게 나는 그들이 여전히 우리를 팬으로 생각하는지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형태로 된 것들에게는 대가를 지불한다. 하지만 음악이나 영화 혹은 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그런 대가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들을 직업인의 차원으로만 봐도 일반인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 있어야 먹고 살 텐데, 그건 그냥 그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저 그가 TV에 나와 웃겨주기를. 숨겨진 과거에 대한 폭로에 가까운 얘기들을 해 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들을 음악인 혹은 예술인으로 불러 줄 수 있을까?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사지에 몰려 마지못한 발악인데 우리는 그걸 보며 비웃고 있다. 과거에는 그렇게나 잘난 척 콧대를 세우더니 너도 별 수 없이 물벼락을 맞고 복불복을 해야 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단지 얼굴이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과거를 웃음거리로 팔아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물론 그런 얘기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안일했다고, 이렇게 불황이 오기 전에 그들 스스로 각성을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를 해야 했었다고. 일면 맞는 얘기들이다. 그들 중 분명 자신이 새운 왕국의 찬란함에 눈이 멀어서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왜 그런 그들을 고소해하는가. 직장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된 사람에게는 아무도 그러지 않으면서 우리는 유독 그들에게만 가혹하다. 그들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한낮 오락거리이다. 그들에게는 청춘을 바친 인생의 한 부분이건 말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음악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결혼 생활이 어떻고, 그때 사귄 여자 친구 중에서 연예인이 몇 명이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혹여 음악 얘기라도 하면 아직도 그때의 꿈을 깨지 못한 바보 취급을 하면서, 그 질김을 비웃는다. 나는 누군가의 꿈을 그리고 한때의 시간들을 이토록이나 철저하게 만인들에게 농락당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소위 얼굴이 팔린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게 당연해져버리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들의 음악에 그렇게나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그들의 음악으로 인해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서.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런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아니 적어도 원하지 않는 곳에 나와서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의 삶을 지탱시킬 힘조차 실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간혹 TV에 나오면 나는 우울해진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내 자신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도 전부 다 아프다.

그런 날이 다시 올까? 그들이 다시 음악으로 우리에게 얘기를 들려주고, 우리가 그 얘기들에 감동하는. 손톱만한 MP3로 다운받지 않은. 그들이 열심히 만든 곡들로 채워진 CD를 모두 사서 듣고. 그래서 그들이 제대로 된 음악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리그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

멀티 플레이어 혹은 팔방미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그들이 마치 국영수도 체육도 미술도 다 잘해야 하는 우리의 불쌍한 아이들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적어도 원치 않는 자들에게는 그저 잘 하는 것만이라도 열심히 제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 이 글은 제가 연재하고 있는 곳에 썼던 원고입니다.  

 

요즘 윤종신이라는 가수가 무척 잘 나가는것 같더라구요. 쇼오락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을 하는건 물론이고 꽤 인기있는 시트콤 드라마에서도 비중있는 역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가 한물 간 가수 컨셉을 취하고 있는 그 시트콤에서 결국 돈 때문에 트로트를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그랬습니다. 윤종신이 했던 발라드가 위이며 트로트가 아래라는 얘기가 아니라 돈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얼굴을 숨겨가면서 창피해하면서 하다가 그것이 대박이 나니까 반짝이 옷을 입고 출연을 하는 것으로 나오니까요. 결국 가수 자신도 음악은 돈이고 따라서 돈 되면 창피할 것도 부끄러울것도 (원래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없다고 생각하는게 너무 이상하더라구요. 그럼 여태 그가 발라드를 했던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이었을까요? 음악을 사랑한 순간은 없었던것일까요? 교복을 벗고로 시작되던 그 많은 노래들은 전부 그에게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에 소중한 노래였던 것이겠죠. 그런데 이제 그것들로 더이상 돈벌이가 되질 않으니 예전 영광을 못 잊고 맨날 '나 연예인이야' 하는 철딱서니 없는 인물로 등장해서 과거를 팔아먹는 것이겠지요. 물론 제가 윤종신이라는 가수에게 생활비를 보내줄것도 아니고 그에게 음반을 내어줄 수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먹고 사는지는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과거를 희화시키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했던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입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드 2009-06-1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김태원 생각 났더랬는데,
윤종신은 뭐, 회발언(여자는 회와 같아서 신선할때 잡아야 한다) 이후, 만정이 떨어졌어요. 학창시절 좋아했던 가수이긴 한데, 여러면에서 물음표가 생기는 인간입니다.

플라시보 2009-06-17 22:37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네. 요새는 김태원씨도 예능 프로그램에 그들이 말하는 예능 늦둥이가 되어 자주 등장하시더군요. 매우 톡특한 말투와 함께..(특히 UFO발언은 정말이지 재밌더군요) 그러네요. 세상은 한때 기타와 노래 만드는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적어도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던 사람에게 이제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입담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네요. 윤종신은...음...그런 발언을 했단 말이죠? 여자가 회와 같다? 그럼 남자는 뭘까요? 꿈틀거릴때 고기를 낚기 위해 꿰매어 달아야 하는 지렁인가? 암튼 실망스런 발언이 아닐 수 없네요. 그다지 정있었던건 아니지만 저 역시 하이드님처럼 만정이 다 떨어집니다요.

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라디오 스타에 한때 그 존재 만으로도 수많은 팬들을 까무라치게했던 이현우, 김현철, 윤상 등이 출연한 방송을 보았더랬습니다. 이현우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현철. 그리고 특히 윤상의 경우 워낙 좋아해서 제발이지 저기서 입담을 과시해서 예능계의 떠오르는 샛별(?) 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답니다. (뭐 윤상의 입장에서는 그런류의 TV출연이 꼭 필요했기에 나왔는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이드 2009-06-18 01:42   좋아요 0 | URL
덧붙이면 '여자는 회와 같아서 일단 신선해야하고, 쳐야 한다' 고 했었네요. 거기에 게스트는 '신선하지 않아 버렸는데, 다른 남자가 찌개 끓여 먹으면 부럽다' 며 둘이 낄낄거렸죠. 무려 공중파 라디오 '두시의 데이트' 에서요. 이건 아마 중징계 먹었고, 이전에도 위험수위 오르락내리락 하는 여성비하 발언 종종 했더랬어요. 티비에서 볼 때마다 씁쓸하다는..

전 오늘 며칠전 주문한 CD 도착했어요. 은근히 컴퓨터에 음악 넣고 하는거 귀찮아해서, CD가 젤루 편하다는. 윤상, 김현철, 이현우(전 이치 라디오 좋아하거든요. 다큐를 좋아하고, 환경을 아끼는 바른생활 사나이-), 유희열(은 별로지만) 네들은 요즘의 예능에 빠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행히도 말이죠.

조선인 2009-06-1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편의점 택배를 이용하는데, 얼마전 실수로 회사를 지정했어요. 포장 뜯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눈이 똥그래져서 요새도 CD 사는 사람이 다 있네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지 뭐에요.

플라시보 2009-06-17 22:39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 역시 CD를 사는 사람입니다. 실은 아주 돈이 없던 시절에는 컴퓨터로 다운을 받아서 듣기도 했는데요. 그나마 입에 풀칠은 하고 살게된 요즘은 무조건 사서 듣습니다. 음악성이 좋네 나쁘네 욕을 하려면 적어도 음반은 사주고 욕을 해야 하는데 다운받아서 들으면서 그게 니들의 음악적 수준이 낮아서 도저히 돈주고는 못산다고 말하는건 좀 이상한것 같습니다. 수준이 안되어도 돈주고 사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음악으로 밥은 먹고 살게 해 주어야 그들도 음악적 수준을 높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음악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정상적인 룰이 만들어지는거라 생각하거든요. (가수가 입담으로 먹고 살거나 연기, 혹은 얼굴로 먹고 사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플라시보 2009-06-18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정말 중징계감이네요. 회라서 신선해야 하고 신선할때 쳐야한다는 발언도 놀라운데 그걸 듣고서 신선하지 않아 버렸는데 남이 찌개 끓여 먹음 부럽다니요. 아...정말 막던지는구나 싶은 사람은 김구라 한사람만이 아니었나봐요. 아마 이들의 엄마는 여자가 아니고 이들의 아내와 딸들도 여자는 아닌가봅니다.

1sosh 2009-06-18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티형?생계형?예술가(음악가)들이 점점더 늘어가는 예능공화국,
노래를 잘한다고 음악을 잘 만든다는 그들은 이제 그 공화국안에 살고있다,

[작가님 연재하고 있는 글은 어디서 볼수 있는건가요??이곳에서만 볼수 있는건가요?? 작가님 글도 좋지만 여기 댓글들 읽느라 배꼽 떨어져 나갑니다 ㅋㅋ]
[★*5 강추소설들 마이리스트에 업그레이드는 혹시 안하세요??ㅎㅎ]

플라시보 2009-06-1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g Oxy님. 그러게요. 이젠 가수가 노래만 잘 하는 (그리고 약간의 외모를 갖춘) 시대는 간것 같습니다. 다른것도 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나봅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글은 다음에서 S다이어리나 블루버닝을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책은 연애 오프 더 레코드 라고 알라딘에서 검색하시면 찾을 수 있구요.^^)
마이리스트 업그레이드는 좀 해야 하는데... 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좀 해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조만간 해 보겠습니다.^^

1sosh 2009-06-19 02:37   좋아요 0 | URL
조만간 부탁드립니다^^ 캄사합니다~~ 엔드 연애,오프더 레코드는 진작에 보았죠...... 두번째 책 준비중이라 들었는데요..아직인가요?? 그리고 제가 대화명을 바꾸어서 아마도 까먹으신것 같은데요^^ 일전에 그러니깐 작년쯔음에 메일도 보냈던 팬입니다,,^^ (itumok)라고 ㅋㅋ 여름잘 보내시구요.....

플라시보 2009-06-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앗앗. 그러시군요. 저는 몰랐더랬습니다. 갑자기 아이디가 바뀌어서요. 호홋. 두번째 책은 실은 지난 4월쯤에 원고는 다 완성이 되었는데요. 출판사 사정상 자꾸 출간이 미뤄지더니 어제 전화가 와서는 이메일 보냈으니 왕창 수정해주시고 (이달 말까지..맙소사. 새로 연재도 하나 하는데...) 8월 중순 출간을 목표로 달려보잡니다. 음...아직 책 제목을 결정하지 못해서 그것도 고민이네요. 그리고 리뷰는 올려뒀습니다. 강추 소설은 아니지만 최근 읽은걸 정리해두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