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이상형이 있다. 꼭 그런 사람을 만나 연애하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다들 이상형은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못 만나고는 순전히 운에 달린 거지만 일단 꿈꾸고 바라는 것은 있을 것이다. 참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형을 만나 연애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들어보면 다들 ‘내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어’ 혹은 ‘내 이상형과 완전 반대되는데 만나보니 정 들었어’ 이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서 연애를 하게 되었지 뭐야’ 같은 말은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상형은 말 그대로 이상인가보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그리고 좀체 일어나주지 않는.

나에게도 이상형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이상형이 너무 이상하다고 말하지만 난 솔직히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다. (내 스스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형이라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다만 내 이상형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흔한 스타일이지만 생각보다 그런 남자를 만나서 좋아하게 되고 연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일단 이상형은 외모에서 출발해보자. 얼마 전 재미있게 읽은 책 ‘브레인 룰스’에 따르면 시각적인 자극은 어떤 텍스트나 말로 하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이며 우리가 시각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시각을 통해서 먹을 것과 위협, 그리고 번식의 기회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라니 이상형에 있어 외모, 즉 시각적 만족을 주는 것을 가장 우위에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난 외모만 보지는 않는다구요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남자의 키를 보지 않는다고 말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왜냐면 대부분 키 큰 남자를 원하는 보통의 여자들과 달리 (심지어 누군가는 남자 키 180 이하는 루저라고 말 하지 않았던가) 다소 작은 키의 남자를 좋아한다. 굳이 센티미터로 말하자면 170이상 175 이하의 키여야 한다. 75이상으로 큰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남녀의 가장 이상적인 키는 마주 섰을때 여자가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뭍을 수 있는 사이즈라고 하지만, 난 그 사람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마주볼 수 있을 정도가 좋다. 70 이하의 키도 69 정도라면 괜찮지만 더 작으면 조금 곤란하다. 그러면 내가 단화만 신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쌍꺼풀은 없지만 작지 않은 눈, 예쁘다고 말 할 수 있는 눈을 가진 남자가 좋다. 남자의 눈이 너무 작거나 찢어져 있으면 아무리 보고 있어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을 가진 남자가 좋다. 내가 머리와 눈이 갈색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검은색 머리와 눈을 좋아한다. 헤어스타일은 되도록 평범하면 좋겠다. 뭔가 스타일이라고 말 할 것도 없는, 그냥 머리 자를 때가 되어 미용실에 가서 잘라주세요 하면 잘라주는 스타일. 하지만 무스나 젤 같은 걸로 스타일링을 하지 않은 머리가 좋다. 머리숱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고 머리카락은 뻣뻣하지 않아야 한다. 코는 그리 높지 않고 얼굴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는 코가 좋다. 콧구멍이 옆으로 퍼져 있거나 콧대가 낮은 건 싫지만 그렇다고 조각같이 날렵하고 높은 코도 별로. 다음으로 입. 입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면 입은 말 할 때의 모양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튀어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은, 방송가 사람들이 말하는 완벽한 발음을 하기에 딱 좋은 구강구조를 가진 게 좋으며 입술 색은 진하지 않아야 한다. 입술은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얼굴에 조화로운 입이 좋지만 굳이 두껍거나 얇은 입술 중에 택하라면 차라리 얇은 입술이 좋다. 말 할 때 입 꼬리의 한쪽 끝이 올라간다거나 모양이 일그러지는 건 싫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입술만 보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몸매. 나는 마른 남자를 좋아한다. 식스팩을 가진 것 보다는 그냥 근육 하나 없다 하더라도 스키니한 몸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모델처럼 마른 몸은 아니고 그냥 옷을 입혀놨을 때 좀 말랐구나 하는 정도면 좋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남자들 중에 벗겨 놓으면 통통해서 실망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팔 다리의 길이는 자신의 체형에 잘 맞게 조화로우면 좋겠지만 짧은 건 싫다. 팔 다리가 짧은 남자는 뭘 해도 약간 버거워 보이니까. 다른 여자들은 남자의 엉덩이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사실 나는 엉덩이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그저 짝궁뎅이만 아니면 된다. 그리고 손발이 예쁜 남자가 좋다. 가늘고 긴 손을 좋아하는데 그런 손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어쩐지 그림을 잘 그릴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다.) 전체적으로 흰 피부를 가진 남자가 좋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얼굴에 뭐가 많이 났거나 피부가 나쁜 남자는 싫다. 공부는 잘 했지만 예술가 기질이 있어 그냥 돈 많이 버는 직장에 다니는 게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게 보이는 이미지를 가진 남자가 좋다. 커피에 우유를 섞은 라떼처럼 커피와도 우유와도 잘 어울리는 남자면 좋겠다. 아, 그리고 목소리는 되도록 저음이면 좋겠다. 그래야 전화통화 할 때 근사하게 들리니까.

외모는 이쯤 하고 이제 다른 걸로 넘어 가 보자. 나는 뭔가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는 남자가 좋다. 그게 낚시건 등산이건 바둑이건 상관없다. 그저 혼자 시간을 보낼 때, 이 남아도는 시간에 할 일이라고는 TV를 보거나 전자오락을 하는 것 외에는 뭐가 있겠냐는 사람만 아니면 된다. 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도 좋겠지만 그냥 그 만의 취미가 있으면 좋겠다. 단 즐기는데 돈을 너무 쏟아 부어야 하는 취미를 가진 남자는 아니면 좋겠다. 자동차 튜닝이라든가 오디오에 미쳐있는 사람은 그 이외의 다른 곳에 쓸 돈이 없을 만큼 거기다 지나치게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남자가 좋다.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을 선물해주는 남자.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는 것을 반기는 남자가 좋다. 단 유혈낭자에 반드시 액션신이 있는 영화만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다.

음식을 잘 먹는 남자가 좋긴 하지만 미각이 없는 남자는 싫다. 까탈스럽게 음식 투정을 하는 남자만큼이나 미각이 둔해서 이것과 저것의 맛을 구분하지 않고 뭐든 입에 들어가 위만 채우면 된다는 스타일은 싫다. 미식가 까지는 아니어도 맛있는 음식, 특히 잘 먹는 음식이 있으면 좋겠고 어떤 요리에 있어서는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을 주문하는 정도면 좋겠다.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 남자는 괜찮지만 고기 없으면 밥을 못 먹는 남자는 싫다. 내가 육식을 잘 못 먹으니까 고기를 좋아하더라도 채소나 과일도 잘 먹는 남자면 좋겠다. 단 커피 맛은 좀 알았으면 좋겠다. 스타벅스나 라바짜나 자판기 커피나 커피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싫다. 커피에 관한 한 분명한 미각을 갖고 있으면 좋겠다. 와인도 마찬가지. 와인 리스트를 줄줄 외우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소뮬리에에게 자신이 원하는 맛 정도는 말할 수 있는 남자가 좋다. 나는 스위티 한 와인이건 드라이한 와인이건 아니면 스파클링이건 다 잘 마시니까 뭘 좋아하는지는 상관없다. 다만 와인은 오래전 레스토랑에 가면 돈가스를 시킬 때 따라 나오는걸 마셔본 이후로 내 돈 주고 마셔본 적은 없다는 남자는 싫다. 되도록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나 와인에 너무 해박한 지식을 갖고 마실 때 마다 탄닌이 어쩌느니 마치 꽃밭에 온 듯한 이 그윽한 향을 보라는니 하는 건 싫다.) 또 술을 잘 마시는 남자가 좋다. 주종에 관계없이 뭐든 잘 마시지만 자신이 특별히 선호하는 술은 있는 사람. 그리고 마시고 난 이후 주사나 뒷 끝 같은 게 없는 사람. 딱 기분 좋게 취할 정도로만 마시는 사람이 좋다.

자기애가 좀 있는 사람이 좋다. 너무 강하면 피곤하겠지만 혼자만의 시간, 공간을 즐길 줄 아는 남자이면 좋겠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 24시간 붙어 다녀야 하는 게 아닌,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남자가 좋다. 그리고 시시 때때로 전화해서 어디냐, 누구랑 있느냐, 몇 시에 들어 갈 거냐 묻지 않는 남자가 좋다. 왜냐면 내가 남자에게 전혀 그런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성격이니까. 한마디로 내가 하는 건 너도 해도 되고 내가 하면 안 되는 건 (이를테면 바람을 핀다든지) 너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남자가 좋다.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뭐라고 하는 남자는 싫다. 그냥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볼 때마다 끊으라고 종용하지는 않는) 거기다 ‘여자가’라는 단어를 붙이는 남자는 싫다. 친구가 많아서 나를 만나지 않아도 약속이 사람이 좋다. 너무 많은 친구들 때문에 한 달 내내 친구를 봐도 그 다음 달로 약속을 미뤄야 할 정도만 아니라면 말이다. 단, 자신들의 친구를 만나는데 나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 남자는 별로다.

만년 소년은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에 찌든 생활인은 싫다. 아직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고 믿고 행복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남자.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쯤은 바꾸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 마냥 착해빠져서 속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남자.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끓일 줄 아는 게 없다고 말 하지 않는 남자. 가족들과 친한 남자. 사람을 가려서 사귈 줄 아는 남자. 만약에 로또에 당첨이 되면 뭘 하겠냐는 질문에 스포츠카나 집을 사겠다고 말 하는 대신 아마존 평생 무료 이용권이나 전 세계 항공권 무료 탑승권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남자. 때에 따라 냉철함과 관대함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남자. 사랑 보다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 할 만큼 자기 일에 애정을 가진 남자. 단지 예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과 잘 맞지도 않는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남자. 세상과 계절의 변화에 무심하지 않은 남자. 꼭 보고 싶은 TV만 선택해서 보는 남자. 좀처럼 남과 다투거나 언쟁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일단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있으면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남자. 서글프지만 인간관계에 있어 약간의 가면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남자. 내 생일날 명품 백이나 화장품이 아닌 듀퐁의 라이터와 머니 클립을 선물할 줄 아는 남자. 내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액세서리를 하는지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주는 남자. 오타쿠적 기질이 과거에는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 이외에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남자. 상스러운 말이나 욕설을 하지 않고 예쁘게 말 하는 남자. 친해졌다고 해서 반말을 하지 않는 남자. 나이가 많다고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는 남자. 가끔은 섹시해지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이해하는 남자. 그래서 빨간 립스틱과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나갔을 때 쥐 잡아 먹었냐고 말하는 대신 ‘오늘은 분위기가 다른데요?’ 라고 말 해 줄 수 있는 남자. 건강을 위해 온갖 좋다는 식품은 다 챙겨먹고 약국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건강 염려증이 없는 남자. 밤에 야식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 아무리 친밀해져도 내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아 하거나 심지어 나 조차도 그렇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 남자. 사실은 예민하고 섬세하지만 그냥 고만고만하게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별로 그런 인상을 심어주지 않는 남자. 직업이나 지휘를 보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남자 (식당 종업원이나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등에게)

기념일에 풍선이나 초로 괴상한 이벤트를 하지 않는 남자. 선물을 고를 때 점원이 권하는 걸 아무 생각 없이 ‘그거 주세요’ 라고 말 하지 않는 남자. 나라는 인간 자체는 궁금해 하지만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는 남자. 믿음을 줄 수 있는 남자. 때로는 정직한 것 보다 하얀 거짓말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남자. 그리고 영원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쓰지 않는 남자. 언젠가는 이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남자. (이별을 준비하란 소리는 아니다.) 영원한건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남자.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는 걸  아는 남자. 아주 가끔은 여행을 가서 꼼짝도 않고 숙소에서 뒹굴뒹굴 하는 기쁨을 아는 남자. 내가 못 하는 것을 비웃거나 놀리지 않고 도와주는 남자. 그러나 결코 보호자처럼 굴지는 않는 남자.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눈을 쳐다보라고 말 하는 남자. 그리고 그 안에 어떤 말보다 어떤 약속들보다 더 깊은 진심이 보이는 남자. 이런 남자가 내 이상형이다. 쓰기 전에는 꽤 평범한 남자라고 생각하며 썼었는데 쓰다가 보니 약간 애매하게 되어버렸다. 아무튼 이런 남자를 만나는 그날. 나는 내 모든 연애를 잊고, 정리하고 그와 새로 시작하고픈 충동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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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長 曰, 

 

아는 기자 언니의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일하기 싫은 기자에게 편집장이 준 선물이라나? 으하하하 

정말 웃긴다. 

마지막에 '일하기 싫은 당신 중국 중원에서 답을 찾다' 뭐 이런 나레이션이 나올 것 같지 않은가? 

아무래도 '하기싫음 관두던가'는 이수근이 나레이션을 해야 할 듯.  

그래. 하기 싫음 관두면 된다.  

근데 관두지 못하기 때문에 저게 웃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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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친절한 편집장님이시네요.
CF에선 음을 안써주는데...ㅋㅋ

플라시보 2010-01-29 12:07   좋아요 0 | URL
흐흐 그러게요. 센스있는 편집장이신가봐요.
 

 

내가 친하게 지내는 여성지 기자 언니가 요즘 책을 준비 중이다. 자신의 로망에 대한 글을 쓰는데 가제는 로망백서이다. 언니는 원고가 완성될 때마다 조금씩 내게 보여준다. 아직 완성된 글은 아니지만 꽤 재미있다. 언니의 글을 읽다 보니 요즘 나도 부쩍 나의 로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때로는 말 못할 로망도 있고 (로망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가끔은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다면 실현 가능한 로망들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로망이 있기에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꿈 혹은 희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모자라는 것들. 일상에서 한번쯤은 해 보고 싶은 것들. 그런 작은 로망들을 하나씩 실현 해 나간다면 인생은 아마도 지금보다 조금은 더 재미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오래 전부터 꿈꿔온 로망이 하나 있다. 바로 남자가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여자가 좋다거나 혹은 애초부터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잠깐씩 그냥 남자가 되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사내아이로 태어나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는 과정 없이 그냥 지금의 내 나이쯤의 어른 남자가 되고 싶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에 종사하며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있는 남자. 차는 그렇게 좋을 필요 없고, 차가 있되 걷는 걸 좋아해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남자. 주말이면 늘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혼자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사는 집이지만 남성 특유의 채취가 아닌 좋은 향이 나도록 신경 쓰는 남자.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남자. 그리고 과하지 않게 헬스나 수영 정도로 건강을 챙기는 남자. 육식도 채식도 모두 잘 먹는 남자.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는 남자. 주변에 여자가 들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날 여자 하나 없지는 않은 남자. 사랑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남자. 딱 그런 남자가 되어보고 싶다.

남자가 되고 싶을 때는 주로 남성 잡지를 보고 있을 때 강하게 든다. 비록 나는 여성 패션지 일을 많이 하지만 사실 그런 잡지들은 도착해도 잘 보지 않는다. 보면 전부 무슨 화장품이 좋다. 올 트렌드는 바로 이것. 헐리웃 스타들이 선택한 가장 핫 한 아이템 등 도무지 와 닿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것들만 잔뜩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훌륭한 글발을 갖고 있는 피처 에디터들이 있는 잡지들은 그럭저럭 읽을 만하지만 여성 패션지라는게 대게 그런 읽을거리 보다는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할 것만 같은 마음만 잔뜩 들게 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남성 잡지는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 좋다. 이상하게 나는 남자들의 물건이 너무 좋다. 아주 클레식한 면도기 세트 (거품 솔이 함께 있는) 를 보거나 이건 하나의 예술 작품이구나 싶은 라이터를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남자 옷들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가 되어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인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옷은 딱 떨어지는 정장 스타일이 아닌 CP 컴퍼니 같은 편안한 이지웨어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축축 늘어지지도 않는, 야외 활동을 하건 미팅을 하건 일을 하건 성의 없어 보이지도 또 너무 애쓴 것 같지도 않은 그런 옷들을 사랑한다. (여자 옷은 보면 사고 싶다 혹은 별로다 라는 생각이 전부이지 사랑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남자들의 가방, 크고 아무거나 다 들어갈 것 같은 가방이건 각진 가방이건 다 좋다. 일단 사이즈가 크고 가방에 무언가 장식하려고 들지 않아서 좋다. (큰 가방은 여성인 나도 쓸 수 있지만 난 워낙 작고 마른 편이라 큰 가방을 들면 가방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 같다.) 게다가 구두는 어떤가. 앞코가 너무 날렵하지도 그렇다고 둔해 보일 만큼 뭉툭하게 빠지지도 않은 평범하지만 좋은 가죽을 써서 튼튼해 보이는 구두는 어쩐지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고 싶게 만들 것 같다. (여자 구두는 어그부츠 빼고는 그런 거 없다.)

간혹 출장길에 짐을 싸다가 보면 정말 남자가 되고 싶어진다. 호텔이건 모텔이건 아무튼 숙박업소에 비치된 모든 용품 쓰기를 꺼려하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짐이 이민 가방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비누까지 챙겨가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결벽증이네 뭐네 하지만 꼭 결벽증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나는 어디를 머물건 간에, 그리고 얼마를 머물건 간에 그 공간을 완전한 내 공간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샴푸부터 시작해서 칫솔, 바디 클렌저, 목욕 타월부터 이루 셀 수도 없이 많은 스킨케어와 메이컵 제품을 챙기고 있노라면 내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진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 수많은 샘플 화장품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들을 골라야 함은 물론이고 집에서 쓰는 것들과 최대한 비슷한 샘플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만약 짐의 무거움 혹은 이동해야 한다는 부담감만 없다면 나는 그냥 내 화장대와 욕실에 있는 늘 쓰던 것들을 챙겨가고 싶다. 그러나 내가 남자라면? 클레식한 면도기 세트와 스킨로션. 그게 전부일 것이다. (남자가 되면 그냥 비치된 샴푸와 비누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 속옷도 우리에 비해 하나 덜 챙겨도 되고 말이다.

나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벌써 6년째 쓰고 있는 카메라는 가끔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길 때마다 ‘많이 쓰셨나봐요.’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낡고 닳아있다. (내가 기계를 좀 험하게 쓰기도 한다만) 그런데 아직도 길에서 그냥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 게 어색하다. 어쩐지 내게는 잘 어울리지 않은 행동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내가 남자라고 생각하면 그 행동에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을 것 같다. 남자가 카메라를 가지고 길에서 사진 찍는 모습은 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반면 카페에서 사진을 찍는 건 여자들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카메라에 대한 욕심이 있다. 바디는 좀 덜한데 렌즈 욕심은 다들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보급형으로 나온 바디에 그냥 딸린 렌즈를 그대로 쓰고 있다. 줌이 되는 큰 렌즈를 사고 싶지만 카메라가 너무 크면 갖고 다니기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꺼내서 찍는 행동이 조금 더 불편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남자라면 다소 큰 바디와 렌즈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가 너무 작은 똑닥이를 들고 찍으면 안 어울린다.)

혼자 훌쩍 여행을 가고 싶을 때도 나는 남자가 되기를 로망 한다. 어디든 가서 어떻게든 지낼 수 있는 남자. 다소 거친 잠자리와 거친 음식도 좀 참을 수 있는 남자. 하지만 나는 거친 음식 까지는 참아도 거친 잠자리는 참지 못한다. 거기다 길을 걷다 쉬고 싶어도 털썩 주저앉는 것조차 편하게 하지 못한다. 혼자 여행하는 남자는 그냥 그러나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자가 혼자 여행하면 반드시 실연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여태 혼자 여행을 갔을 때 단 한번도 ‘왜 혼자 다녀요?’ 라는 질문을 받지 않은 적이 없다. 남자친구를 끼고 하지 않는 여행이라면 매번 그렇다. 그리고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만 다녀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물론 남자도 깡패와 마약상과 좀도둑이 득실거리는 곳을 가는 건 꺼려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만큼 안전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 여행을 가는 여자는 첫째도 안전한가 둘째도 안전한가를 따지게 된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는 어딘가로 팔려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느라 여행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영화관 까지는 괜찮은데 연극을 보거나 전시회를 갈 때도 혼자 가는 건 조금 어색하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는걸 아니지만 내 얘기는 가느냐 가지 않느냐, 혹은 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뭐가 좀 더 자연스럽고 편하냐에 대한 문제이다. 남자 혼자 전시회장을 다니거나 작품 감상을 하고 있으면 그다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는? 어쩐지 친구 하나도 없을 것 같고 애인은 언제 헤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잘 차려입으면 이 전시회를 감상하고 곧 다른 약속이 있는 여자처럼 보이겠지만)

남자가 되어본다면 정말 근사하게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 가늘고 긴 섬세한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끼우고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주뼛대지 않고, 마치 담배를 피우지 않는 듯 무심하게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 그러나 내 경우는 아무래도 여성 흡연자다 보니 흡연을 할 수 있는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 때 등이 너무 많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지는 않지만 같은 흡연 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남자의 그것은 여자의 그것보다 자연스럽다. 또 시가를 좋아하는데 여자가 시가를 피우는 건 어지간한 포스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어울리기 힘들다. 가뜩이나 작은 손을 가진 내가 굵은 시가를 피우고 있으면 마치 초등학생이 아빠 몰래 담배를 꺼내 피우는 것 같은 형상이 된다. 그런 시가를 피우면서 포커를 한다면 더 멋질 것이다. 작년 연말 루이비통에서 선물로 받은 트럼프 카드가 있는데 여태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물론 여자 친구들끼리 모여서 포커를 해도 좋겠지만 그런 게임은 남자가 해야 제 맛이다. 위스키나 코냑을 온더락에 부어놓고 조금씩 홀짝이면서 시가를 물고 포커를 하는 남자들.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여자는 화투와 조금 어울리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난 화투를 칠 줄 모른다.)

남자가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미용실에 가서 어떤 머리를 해야 할지 혹은 이거 잘못 했다가 머리 망치면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거 아니야? 하는 공포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남자들은 좀 잘 못 자른다 하더라도 머리는 금방 기는 거고 남자의 헤어스타일이라는 것이 연예인이 아닌 이상 대충 그 머리가 그 머리이므로 선택의 폭이 좁아서 좋다. (선택의 폭이 너무 넓으면 오히려 머리만 아프다.)

게다가 샤워하는 과정도 남자는 간편하다. 드라이기가 없다면 그저 수건으로 툭툭 털어서 말리면 그만이다. 샴푸를 들이붓지 않아도 충분히 거품이 이는 머리. 때로는 비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을 수 있는 간편함. 샤워가 끝난 후 스킨로션만으로 이어지는 간단한 스킨케어. 내가 남자라면 아마 지금보다 외출할 때 걸리는 시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급한 약속이 잡혔을 때 혼자 시간을 쪼개어가며 샤워 몇 분, 메이컵 몇 분, 옷 입고 액세서리와 가방 고르는데 몇 분, 그 가방에 들어갈 잡다한 것들을 챙기는 시간 등등 하면서 시간을 분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자라면 그냥 가방 없이 지갑, 라이터, 담배, 핸드폰 등속을 옷에 달린 주머니에 대충 분산하면 끝날 테니까.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 나는 반드시 남성복 매장이나 남자들 물건만 있는 듀퐁 같은 매장을 들른다. 비록 살 것도 없고 살 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남자들의 물건을 보고 있는 게 좋다. 내 남자가 생기면 이것도 사주고 저것도 사줘야지 하는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런 물건들을 가질 수 있는 남자가 부럽다. 그래서 꿈꾼다. 아주 잠시라 하더라도 남자가 되기를 로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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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1-2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좋아요, 어쩜 좋아.
나 플라시보 님이 로망으로 삼은 그런 남자, 딱 그 남자를 알고 있어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저의 벗이지요. 저 플라시보 님이 그 친구 이야기 하는 줄 알았어요.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주드 로를 닮았어요. 잘생기고 돈 많고 능력 있고 성격 좋고 패셔너블해요. (딱 한가지 다른 점---머리모양에 좀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 소개시켜 드려요?

플라시보 2010-01-2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저런 남자가 되고 싶다는 로망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건 생각 안해봤어요. ㅋㅋㅋ 근데 말을 들으니 솔깃하군요. 므하하하. 근데 주드 로를 닮고 멀리 있다니 아마도 잉글리쉬를 모국어로 쓸 듯 한데...음...과연...ㅋㅋ

BRINY 2010-01-29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거 책으로 써보세요~

플라시보 2010-01-29 15:00   좋아요 0 | URL
벌써 아는 기자 언니가 쓰고 있어요. 로망백서라고..자신의 갖은 로망을 쓴 책이죠.^^ (워낙 글빨이 출중한 언니라 경쟁해서 이길 자신 전혀 없음. 하하)
 

비가 오는줄도 몰랐다. 

어제는 하루종일 놀았으니까 나도 양심이 있는 인간이면 일을 해야겠기에. 

아침 열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잠깐 베이글을 데우고 카푸치노를 만든것 이외에는 

정말 직장인처럼 지금까지 꼼짝않고 책상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젠장... 비가 온다. 

난 비만 오면 미쳐버린다. 

스무살때 그러다가 서른 즈음에 시들했었는데 요즘 또 다시 그런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기는 하지만 

내 안은 점점 더 젊어지고 싶다고 믿고 싶은 요즘이다. 

궁뎅이 한번 안 떼고 열심히 일한 결과 

무려 연재를 미리 써 두는 기염을 토했다. 

너무 토해서 그런지 잠온다. 

초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다시 일해야겠다. 

잠깐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고 비를 맞을까도 생각했지만 

부디 내일까지 그렇게 비가 오길 바랄밖에...(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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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왠지 밖에 돌아다니고 싶은 날이었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것도 그렇다고 집안일을 하는것도 내키지 않는 날. 

가만히 앉아 책을 읽기에는 너무도 좀이 쑤시는.. 

그렇다고 TV를 켜고 멍하게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음... 생각해보니 원래 약속이 잡혀 있긴 했었구나. (친구들과 아바타를 2번째 관람하기로 했었다.) 

아무튼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 아바타를 보고 늦은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내가 가끔 글이 써지지 않을때 노트북을 들고 나가서 일을 하는 illy로 향했다. 

내가 그 illy를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 커피 맛이 괜찮다. (일리나 라바짜는 다른 커피 체인점보다 커피맛이 확실히 좋은것 같다. 아마도 커피 전문점 브랜드가 아니라 원두 브랜드라서 그런가보다.) 

둘째, 흡연실이 몹시 쾌적하다. (원래 그 장소는 그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간단한 다과와 함께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아무도 회의를 하러 오지 않아서 그냥 흡연 가능 구역이 되어버렸다.)  

셋째, 교보문고가 바로 앞에 있다. 

넷째. 국민은행 CD기가 있다. (집 근처에는 하나은행 뿐인데 나는 원고료 통장이 국민은행이라 돈 확인은 되지만 어디서 얼마가 입금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이런 나를 두고 다들 인터넷 뱅킹을 하라고 하지만..글쎄다. 한때는 했었는데 안하니까 또 안하게 된다.) 

다섯째, 스타벅스가 바로 위에 있다. (가끔은 일리 커피가 아닌 스타벅스 커피가 땡길때가 있다. 스타벅스는 흡연실도 없고 사람들이 너무 북적거려서 카푸치노 벤티 사이즈를 시킨 다음 우유를 조금 더 넣고 마시다가 일리에서 에스프레소를 시켜서 섞어 먹으면 내 입에 잘 맞다.) 

여섯째, 스템프가 있다. (그냥 들르는것 이외에도 교보 협찬을 받을때면 늘 가야하기 때문에 스템프가 있는게 좋다. 다 찍은 다음 공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은 최고다. 게다가 당일 교보 영수증을 들고가면 10% 인가 15% 인가 할인도 해 준다.) 

illy 에 도착해서 우리들은 각자 좋아하는 커피를 시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부드러운 티라미스를 시켜서 먹었다. (일리 티라미스는 케잌 형태가 아니라 컵에 푸딩처럼 담겨서 나오기 때문에 그 부드럽기가 케잌류와는 비교 불가능이다.) 

온갖 얘기들이 오갔다. 

사는 얘기, 일 얘기, 그리고 요즘 어떤 것들을 느끼고 생각하고 바라는지에 대해. 

대부분 미혼인 우리들은, 그러나 결혼에 대한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건 뭐랄까 각자 알아서 할 일이고 때가 찾아오면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자 얘기도 잘 하지 않는다. (내 남자 얘기 같은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나는 그 자리 만큼은 연애카운슬러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너무 편하고 좋다.) 

영화나 책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각자 재밌게 봤던 영화나 책을 서로에게 소개 해 준다. 

물론 가장 많이 책 소개를 하는 사람은 나다. 

나는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도 많은데 그런 책들에서 왕왕 보석같은 작품들을 찾아 

내니까. (그래서 이들의 집에 가 보면 내 서재의 미니 버전같다. 내가 권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걸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한 사람은 바이올린 레슨을 하러 나가고 

나는 라디오 방송이 있어 나갔다.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계속 얘기를 하고, 얼마 후 레슨이 끝난 아이와 내가 거의 동시에 다시 도착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우리가 가려는 곳은 너무 맛있고 가격도 저렴한 곳이라 예약 없이는 

거기서 뭘 먹는게 불가능한 곳이었다. 다른 곳에서 먹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나와 또 한 친구가 그 

곳에 가 본적이 없어서 가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예약을 잡으니 8시 30분 이후에나 자리가 난다 

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했다. 

차 따위로 물배를 채울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고픔을 극한으로 몰아 붙여서 밥이 나왔을때 정말 맛있게 먹자고. 

그리하여 노래방을 갔다. 

보통 노래방을 가면 

사람들은 남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호응해 주는 척 하면서 자신이 부를 노래를 찾는다. 

그리고 노래방에서는 노래가 끊기는 일이 잘 없다.  

끊임없이 예약 번호들이 밀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래방을 가면 좀 다르다. 

우린 일단 앉아서 얘기를 한다. 

주로 실없는 얘기를 하다가 누군가가 '야, 그래도 노래방인데 노래 좀 불러야하지 않냐?' 하고 말 

하면 그제야 노래를 부른다. 

노래도 자주자주 끊긴다. 

그리고 남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자신이 부를 노래를 찾지 않기 때문에 

한곡 한곡 호응이 장난이 아니다. 

어제 최고의 곡은 박진영의 '허니' 였다. 

어쩜 그 오래된 노래의 율동을 우리는 그다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단체로 가서 이거 꼭 한번 불러보기 바란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허니의 춤 동작들이 다 생각나서 일제히 군무를 추게 될 것이다. 당시 워낙에 유명한 곡인데다 안무도 어렵지 않아 모르는 사람 거의 없다.) 

그 다음은 방송하는 친구와 디자인하는 친구가 두엣으로 부른 아브라카다브라. 

그들의 춤도 춤이었지만 그 야시시한 눈빛이란... 아... 여자인 내가 봐도 죽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극도로 굶주린 상태가 되어 8시 20분쯤 노래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모든 매뉴는 균일가. (균일가 세일도 아니고 나참 레스토랑 매뉴가 균일가라니 재밌지 않은가.) 

보통 하나를 시키면 2~3인분 용으로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많은 양이 나온다. 

고기를 못 먹는 나를 배려해서, 그리고 서른 넘어서는 밀가루가 아닌 쌀을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 

의 주장에 따라 새우 볶음밥과 연어 샐러드를 시켰다.  

새우 볶음밥의 새우는 굵직하니 컸으며 연어 샐러드의 야채들은 아삭하니 싱싱했다.  

접시를 싹 비운 다음 우리는 누가 뭐랄것도 없이 일제히 거울을 꺼내 얼굴을 봤다. 

이빨에 뭐가 끼지는 않았는지, 앞머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얼굴은 번들거리지 않는지. 

끝으로 각자의 립스틱과 립글로스를 꺼내 입술 화장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그리고 레몬 맥주를 한잔씩 시켜서 마셨다. 

이제 그만 헤어져도 괜찮았지만, 그럴만큼 이미 충분하게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어쩐지 우리는 아쉬웠다. 

그렇다고 어디가서 차를 마시기도 싫고 술을 많이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 한명이 새로 뚫었다는 레스토랑겸 술집에 가서  

샹그리아를 마셨다. 

사실 바이올린 하는 친구와 나는 와인을 마셔도 드라이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샹그리아가 그다지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달달한 술을 좋아하는 나머지 친구들은 연신 맛있다를 외치며 먹었다. (그 안에 과일까지 싹 다 건져먹었다.) 

그리고 술이 한잔씩 들어가자 드디어 우리의 주 특기인 야한 얘기가 등장했다. 

그 중에 우리가 야동꼬마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데 

아... 그녀를 통해 나는 진정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였고 

새삼 내가 쓴 첫번째 연애 책이 부끄러웠다. (너무 착하고 얌전했던거지..) 

이날 최고의 어록은 절륜JJ. (이거 뜻은 차마 못 밝히겠다.) 

내 이름의 이니셜인 JJ가 들어가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아비가 내 이름을 그리 지은것을.. 

여자들이 하는 야한 얘기들은 너무 재밌다. 

그러나 남자가 야한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나는 모욕감 같은게 든다. 

나를 모욕하려고 하는 얘기도 아닌데, 남자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 너무 불편하다.  

우리가 센트로 펠리스 보살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야한 얘기가 아닌 뭔가를 맞추는 것에 도통한 친구다. 

그는 얼굴만 척 보면 그 사람의 스타일을 맞춰낸다. (성격 말고 성 적으로..) 

우리는 그녀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다 얘기했다. 

얘는 어때? 쟤는 어때? 

그러다 마침내 아는 남자들이 다 떨어지자 

이번에는 누구나 알법한 연예인들이 등장했다. 

그녀는 매우 디테일하게 그리고 꽤 신빙성있게 그 연예인들의 스타일을 맞춰냈다. (사실 맞춘건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우리들 중 누구도 그날 등장한 연예인들과 불타는 하룻밤을 보낼 가능성은 제로이므로) 

그 레스토랑은 입구에 8명 이상 단체손님 불가, 너무 크게 얘기하거나 웃고 떠들면 퇴장당한다는  

문구가 적혀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부모들 몰래 다락방에 올라가서 각자 마음에 드는 남학생을 고백하는 소녀들처럼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중간중간 이건 좀 쓰러지며 웃어야 하는거 아닌가 싶은 대목들이 등장했으나 

애써 참으며 옆사람을 치면서 웃거나 테이블 위에 조용히 엎어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샹그리아를 다 마시니 시간은 밤 12시 

생각해보니 낮에 만난 시간이 그쯤이었다. 

물론 바이올린 하는 친구와 나는 중간에 일을 하러 다녀오긴 했지만 

무려 12시간을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남들 같으면 서로 쳐다만 봐도 징그러울만도 한데 

그래도 우리는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울때 떠나라 라는 말을 주억거리며 (박수칠때 떠나라였던가?) 

각자 택시를 잡고 헤어졌다. 

누가 누구를 바래다 주지도 않고 누가 누굴 기다려주지도 않고 

그냥 줄을 서서 순서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헤어졌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오늘 정말 재밌었어 다음에 또 봐' 따위의 문자는 서로에게 보내지 않았다.

한 달에 두 번. 

나와 내 친구들은 그렇게 논다.  

각자 따로 따로도 만나지만 모두 모이는건 한달에 두 번. 적으면 한 번. 

그러나 그냥 넘어가는 달이 있으면 섭섭하다.  

가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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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맹맹한 소리로 노래 처음 나오는 "우웅~ 허어니이~" 이건 제가 잘하는 편입니다.(우엑!)

플라시보 2010-01-27 16:2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육성으로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원래 그 부분은 코메디언 정선희씨가 했던거 맞죠? (맞나?) 아무튼 그 뮤직 비디오에서 고소영이 놀랍도록 아름답고 섹시하게 나왔다는 기억이 나는군요^^

토토랑 2010-01-28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그 야한 이야기에 끼어보고 싶어요 ㅜ.ㅜ 너무너무 궁금해요~~

플라시보 2010-01-29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토랑님. 흐흐흐. 완전 재밌어요. 저도 끼워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