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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라
줄스 다신 감독, 라프 발로네 외 출연 / 에이스필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줄스 다신 감독의 1962년작 [페드라]는 계모와 양아들의 금기시된 사랑과 치정의 파국을 그린 흑백 고전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테세우스와 그 아들 히폴리투스, 그리고 히폴리투스에게 구애를 거절당한 계모 페드라의 욕망과 간계, 파멸에 관한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사실 생물학적으론 서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지만 어쨌든 근친상간 금지라는 통념에 위배되는 소재인지라 제작된지 5년이 지나서야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내 경우 1996년 11월 재개봉 때 코아아트홀에서 본 뒤 20년만의 재감상이다.

그리스 조선업계 거부 타노스(라프 밸론)는 전처와의 사이에 둔 아들 알렉시스(앤서니 퍼킨스)를 유학 중인 영국에서 불러들여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의 부탁으로 양아들을 설득하러 영국으로 건너간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와 그녀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 알렉시스는 과거 어색했던 감정을 묻고 삽시간에 사랑에 빠진다. 허나 불꽃같은 정념이 각자 자리로 돌아간 뒤 현실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니, 페드라의 두려움 없는 격정, 질투, 집착도 그에 대한 알렉시스의 추스림과 도피도 모두 좌절되며 비운의 결말을 맞는다.

다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20년 전 스크린으로 처음 접했을 땐 마치 신화 속 두 인물을 현세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멜리나 메르쿠리와 안소니 퍼킨스, 두 주연 배우의 연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는데 이번엔 줄스 다신 감독의 연출을 비롯한 촬영, 미술 등 스탭들의 시선과 손길이 제대로 느껴졌다. 히폴리투스와 페드라의 비극을 테마로 한 석화 부조(浮彫) 작품을 찬찬히 훑으며 몽타주한 오프닝 크레딧으로 영화의 원전을 효과적으로 각인시킨 뒤 금단의 선을 넘은 아찔한 사랑과 그 종말의 비감을 차분한 흑백 톤 영상 및 그와 대비되는 강렬한 음악으로 훌륭히 재현했다.

특히 영화 속 세부적인 내용들을 재삼 확인, 그 뉘앙스를 되새기며 만감이 교차했다. 런던에서 처음 만난 날 페드라가 알렉시스에게 그리스의 바다 제물 전설을 언급하면서 템즈 강변에 던진 결혼 반지의 의미부터 검열 문제로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된 유리창 빗물로 인해 되려 격렬한 화염이 번지듯 기가 막히게 촬영된 두 사람의 정사씬, 타노스의 급전에 런던에서 파리로 건너가던 부분에서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전환되던 야경, 신화 속의 말(馬)을 대체하는 스포츠카를 '지상에서 가장 빠른 관(棺)'에 비유한 암시, 어찌 보면 [졸업]의 전신 격이라 해도 될 만큼 페드라가 로빈슨 부인과 닮아 있으며 알렉시스는 금지된 사랑의 대가를 치룰 뿐 아니라 기성새대의 몰이해와 이기심에 의한 희생양으로도 묘사되고 있다는 점, 페드라와 하녀 안나 사이에 형성되는 심상찮은 공기, 신화에선 페드라가 테세우스에게 거짓을 고함으로써 비극이 잉태되지만 영화에선 페드라가 타노스에게 진실을 폭로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차이 등등.

무엇보다 라스트 10분이 20년 전과 사뭇 다르게 와닿았다. '달리자. 추방당할 땐 음악이 필요해. 바흐를 들으며 호송되는 것만도 영광이지. 잘 있거라 등대여, 바다여. 페드라! 페드라!'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운명을 향해 돌진하던 알렉시스, 대기 중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릴 것만 같았던 앤서니 퍼킨스의 모습만이 뇌리에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엔 눈가리개를 쓰고 음독 자살을 기도하는 페드라의 반쯤 가려진 창백한 얼굴, 난파된 '페드라호' 선박에 타고 있었던 승무원들의 사망자 명단이 잔인하게 호명되던 병행 교차 편집 장면들이 그렇게 가슴을 휘저어 파고 드는 것이다. 바다 괴물에 의해 박살난 이륜마차는 벼랑으로 추락한 은색 에스턴마틴 자동차로,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의 영락은 그리스 선박왕 타노스의 파산으로, 그의 아들 히폴리투스는 유약하면서 치명적일 만치 처연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알렉시스로, 페드라는 페드라로. 그렇게 영화는 인습과 금기를 뚫고 나간 자리에 남겨진 폐허, 그 몰락의 끝자락을 음울하고도 장중하게 봉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