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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덥다. 무섭지만 빼꼼히 창문을 열었다. 나는 추위는 지독히도 많이 타지만, 그래서인지 더위에는 강한편이다. 요새도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계속 틀기 때문에 난 항상 긴팔 차림! 지하철 안도 나에겐 너무 춥다. 심지어 아직도 무릎담요를 갖고 다니니 말 다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덥다. 여름이 오긴 했나 보다. 정말 오랜만에 책에 빠져서 잠도 안 자고 밤 늦도록 책을 읽어대고 있다. 게다가 읽고 끝내던 습관에서 다시 학생시절처럼 한권 한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좋은 징조다.
이 책에는 엄청 다양한 여자들이 나온다. 일본이름은 왜 다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은지. 나는 단락이 바뀔 때마다 등장인물이 헷갈려서 앞을 넘겨 보고야 '아~ 이 사람!' 하고 그 다음을 읽어나갔다. 그 중 꽃집을 하고 있는 에미코는 수학의 교집합이랄까. 여러 사람들이 에미코의 꽃집에서 꽃을 구입한다. 부부싸움 후 아내와 화해하기 위해 꽃을 고르는 사람, 집안을 화사하게 꾸미고자 꽃을 고르는 사람, 매번 그냥 에미코가 주는 꽃을 선선히 사가며, 도통 자신의 의견으로 꽃을 고르지 않는 사람 등등 저마다 꽃을 사는 이유도, 취향도 다 다르다.
책의 제목인 장미, 비파, 레몬은 내 생각엔 그 꽃말에서 따온 듯 하다. 열렬한 사랑을 나타내는 장미와(물론 장미는 색깔별로 꽃말이 다 다르긴 하지만), 현명한 사랑을 의미하는 비파, 성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레몬.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만, 자녀는 원치 않아 갖고 있지 않으며, 육체적 사랑보단, 집안의 평화로움, 맛집 탐방 등을 추구하는(그러면서도 깊은 대화도 별로 없는) 미즈누마와 도우코의 사랑이 아마도 비파 인것 같고, 유능한 사진작가이나 이미 유부남인 츠치야를 향한 20대 초반 젊은 모델, 에리의 사랑과 무뚝뚝하고 밋밋하지만 성실한 수의사 남편 도모야를 두고, 요리학원에서 만난 젊은 학생을 향한 애정을 불테운 부인 미치코의 사랑은 장미인 것 같고, 꽃집을 함께 운영하는 에미코와 시노하라의 사랑(이혼 하기 전까지)과 유이치란 아들을 두고 살아가는 회사원 곤도와 전업주부 아내 아야의 사랑이 성실한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도우코와 곤도의 사랑은 아마도 장미일테고, 레이코와 츠치야의 부부관계는 비파일 것이다. 도우코의 동생 소우코의 형부가 될뻔한 도모야에 대한 마음은 장미지만, 결국 선을 본 후지오카란 성실한 사내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마 비파일 것이다. 소우코에 대한 후지오카의 마음은 레몬일 것이고.
결국 그런 것이다. 엄청 복잡해보이고, 얽혀있지만, 결국 어떤 관계도 장미, 비파, 레몬 중 하나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 어떤 만남이든 장미도 비파도 레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에쿠니가오리의 소설, 필력이나 분위기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번 책은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결국 마지막에 행복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소우코와 후지오카는 행복하게 잘 살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