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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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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니? 라고 누군가 물으면, 늘 대여섯 권의 책을 답했는데, 그 중 이 책도 꼭 들어갔다. <자기 앞의 생>. 아이러니한 점은,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 모모라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점. 주인공과 교감하는 할아버지가 한 분 있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말할 수 있을 뿐. 그런데도 늘 누가 좋아하는 책을 물으면 <자기 앞의 생>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뭔가 이 책에게도, 좋아하는 책을 물어주는 사람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제대로 줄거리를 기억할 수 있게끔 이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난 책의 첫 문장들을 좋아하는 데, 이 책의 시작은 이렇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 건물을 연이어 두 번이나 왕복할 일이 있었고, 그래서 위 구절을 더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과거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6층 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나는 그 중에서도 6층에 위치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체육시간이면 쉬는 시간 10분 만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집합해야 했고, 체육시간이 끝나면 10분 만에 교실로 돌아가서 교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해냈지, 싶다. 심지어 쉬는 시간이라고 운동장으로 놀러 나가는 위대한(?) 친구들도 있었다.

 모하메드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다하지만 너는 참 좋은 아이야네 아빠는 알제리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렴그건 훌륭한 일이란다독립의 영웅이지.”

하밀 할아버지나는 영웅 같은 것보다 그냥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아빠가 훌륭한 뚜쟁이여서 엄마를 잘 돌봐주면 좋을텐데 말예요.”(p.47)

널 보니 우리 아들 생각이 나는구나모모야방학이라서 엄마와 함께 니스 해변엘 갔는데내일 돌아오지녀석의 생일이거든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줄까 하는데우리 아들녀석하고 놀고 싶으면 우리집에 오도록 해라.”

엄마도 아빠도 자전거도 없이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이제 와서 이 작자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들다니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중략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나는 너무 열이 올랐다. (중략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p.62)

모모야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하지만 상관없어요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p.91)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p.93)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p.119)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기분이 별로였다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p.138)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p.164)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p.172-173)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가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너무 불공평하잖아요.(중략)

나도 크면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쓸 때면 늘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잖아요.(p.244)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와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p.276)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p.295-6)

  사람을 사귈 때, 좋아하는 책을 묻곤 하는데, 그럴 때 내가 알고 있는 책, 혹은 좋아하는 책을 답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책도 그랬다. 유독 <자기 앞의 생>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살면서 많이 만났고, 그들과는 늘 그 한가지만으로도 이미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곤 했었다. 

  책의 결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어쩌면 결말이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기억나는 결말의 내용도, 언젠가는 또 가물가물 해질 날이 올 것이고, 그러면 아마도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쳐보겠지. 그때의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남겨둔다. 


+ 이 책을 읽다가, 레미제라블이란 단어의 뜻이 "불쌍한 사람들"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 한번 잘 지었네. 레미제라블에는 정말 온통 불쌍한 사람들이 등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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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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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전부터 몇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던 책을 드디어 다 읽어 보았다. 장편인 줄 알았는데, 단편집이라 놀랐고, 한편, 한편 흡입력에 또 한번 놀랐다. 때로는 그의 다른 책인 <자기앞의생>이 떠올랐고, 때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p.12)

주인공 사내는 페루의 새들의 무덤에서 카페(바)를 경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우연히 파도에 휩쓸려 죽을뻔한(어쩌면 죽으려 한) 여자를 구해준다. 그런데 곧 그녀의 정부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그녀를 데리고 떠난다.


정말 페루에 그런 바닷가가 있나 싶어 검색해보았지만, 나의 검색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발견하지는 못했다. 


+류트

주인공 남자는 외교관으로 부와 명성을 쌓았지만, 예술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의 아내는 외교관의 아내가 꿈이었던 사람으로, 지금이라도 예술을 해보려는 그를 반대한다. 그러다 주인공은 류트라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의 부인은 잠재되어있던 욕망을 끄집어내어 몰래 류트를 연주한다. 


+ 어떤 휴머니스트

큰 사업체를 운영하며 혼자 살던 주인공은 유태인이란 이유로 생명이 위협받게 되자, 자신의 집안일을 봐주던 집사에게 모든 재산을 넘긴다는 서류를 작성하고(물론 가짜로) 자신은 몰래 지하실에서 칩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위해 음식과 바깥소식을 전해주는 그 집사 부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러나 오래전 이미 나치는 멸망했고, 바깥은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쓸쓸히 지하실에서 최후를 맡는다. 


+ 몰락

마이크라는 사내는 노동운동에 심취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단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시멘트틀에 부어 산채로 굳힌 다음 암매장하는 방식을 택한것. 그는 이 시대의 노동운동계에도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운다. 그런 그를 만나러 떠난 미국의 노동운동가들은 그가 이제는 자신이 가혹행위로 사용하던 시멘트 조각상에 푹 빠져 예술가가 되어 있자, 그런 그의 모습이 세간에 알려지면 노동계가 위태로워진다며, 그를 시멘트 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짜

미술감정에 능한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어느 부유한 상인이 위작을 비싼값에 구입한 뒤, 진품이라고 속이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자(경제적인 이득은 필요없이, 그저 자신이 진품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에) 단칼에 거절한다. 그러자, 그에게 어떤 사진이 배달되기 시작한다. 메부리코를 가진 못생긴 여자의 사진. 알고 보니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귀한 걸작이라 여기었던 어린 아내가 실은 그 사진속 여인이었던 것. 아내야 말로 성형수술로 탄생한 위작(?)이었던 것이다. 


+본능의 기쁨

난쟁이는 자신의 서커스단을 위해 거인을 납치하여 감금해두고 

거인은 옆 서커스단장 딸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생각하여 밤마다 소녀를 만나다가 감기에 걸린다.

소녀는 거인을 빼앗아 자신의 서커스단에서 일하게 할 심산으로 거인에게 잘해준다. 


+ 고상함과 위대함


+ 비둘기 시민

두 사내가 마차를 탔는데, 마부가 비둘기라는 설정. 그들은 비둘기 마부를 고발하러 경찰서에 가지만, 경찰은 오히려 비둘기 마부를 이상하게 여기는 둘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과연 마부는 비둘기인걸까. 아니면 두 사내가 술에 취해 환각을 본것일까. 


+역사의 한 페이지

처음에는 '이'가 그 옛날 머리속에 생기던 피 빨아먹는 그 벌레인줄 몰라서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되었었다. 각주가 달렸으면 이해가 쉬웠을 듯.

감옥안에 정치범과 단순살인범(돈때문에 모르는 노파를 살해)이 한방에 묶고 있다. 그들은 매일밤 몸에 있는 이 갯수를 세어 누가 더 많은 이를 갖고 있나 내기를 한다. 어느날밤, 정치범의 몸에는 이가 한개도 없다. 그는 자신의 사형선고일이 가까운 것 같다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날 정치범을 찾는 간수의 물음에 살인범은 자신이 정치범이라고 답하고 대신 죽으러 간다.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낀 지휘관은 스스로 자살을 택한다.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옆방에 사는 여인을 남몰래 짝사랑한다. 그런데 어느날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라 착각한 사내는 낙심하여 자살을 하고 만다. 허나, 알고 보니 그 소리는 옆방사는 여인이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며 고통속에 몸부림치는 소리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벌어진 가슴아픈 이야기


+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식품점 딸을 사랑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식품점 딸이 모험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 길로 사라져서, 오랜 세월 그녀 앞으로 세계 곳곳에서 엽서를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떠나고 얼마뒤, 이발사와 결혼하였고, 알고보니 그 사내도 진짜 모험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기저기 여행하는 이들에게 그녀에게 자신인 것처럼 엽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뿐. 


+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자신의 영웅담을 강연하는 강사가 있다. 그의 강연이 대부분 허풍임을 눈치챈 한 사내가 그에게 상어를 맨손으로 사냥할 기회를 선물한다. 강사는 두려움을 느끼며 바닷가에서 크게 망신을 당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영웅담을 강연한다.


+지상의 주민들

전쟁통에 군인들에게 몹쓸짓을 당해 눈이 먼 가여운 소녀가 있다. 그 소녀 곁에는 그녀를 지켜주는 노인이 한명 있다. 친족은 아니지만, 그녀를 가엾이 여겨서 큰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해줄 요량. 걷다가 지친 노인은 트럭을 한대 잡아타고, 그녀는 바로 곯아떨어진다. 트럭운전수에게 기구한 그녀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노인은 트럭에서 쫓겨나고, 가여운 소녀를 따라 트럭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다. 그러기를 한참만에 도로에 서있는 그녀를 다시 만난다. 가엽게도 소녀는 이번에도 남자에게 몹쓸짓을 당한 모양이다. 


+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돈만 외치는 도시생활에 염증으른 느낀 미술품 수집가 a는 외딴 섬에 한달간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원주민들의 순수한 삶에 감명을 받고, 폴 고갱의 잊혀진 작품을 과자봉투로 쓰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 크게 놀란다. 그는 그림을 모두 사는 대신,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을 전부 마을에 남기고 떠나는데, 알고 보니 지능적인 수법의 사기였음을 알게 되고 허탈해한다.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독일 수용소에 갇혀있다가 독일의 몰락과 함께 해방된 쇼넨바움은 그후 볼리비아로 망명하여 재봉사로 일하고 있다. 5대째 재봉일을 하는 지라 솜씨가 좋아 주문을 밀려드는데, 함께할만큼 솜씨좋은 일꾼을 발견하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그는 어느날 길에서 옛동료 글루쿠만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나치에서 해당된 현실을 부정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타일러서 함께 일을 시작하나, 매일밤 먹을 것을 들고 사라지는 글루쿠만을 미행한 쇼넨바움은 수용소에서 자신들을 무섭게 고문하던 간수에게 먹을 것을 바치는 글루쿠만을 보고 깜짝 놀란다. 왜 그랬냐는 쇼넨바움에게 글루쿠만은 말한다. "저자가 다음번에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고"


+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먼 미래. 방사능과 여러가지 오염물질로 인간들은 다시 금붕어나, 거북이 등으로 모습이 바뀌고 만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올까봐 읽으면서 내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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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
아녜스 르디그 지음, 장소미 옮김 / 푸른숲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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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대를 했던 걸까. 솔직히 결말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해피엔딩이 나쁜 건 아니지만 다들 너무나도 기적적으로 행복해졌으니까. 너무나도 신데렐라 같은 스토리. 가여운 여자가 부자에다가, 너그러운 남자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행복해 진다니. 그녀 스스로 행복해질 수는 없었던 걸까. 조금 많이 안타까웠던.

 

<스포일러 일지도>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는 줄리는 어느 날 상사에게 혼이 나고 울적한 맘으로 일하다가 눈물을 쏟고 만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침 폴의 물건들을 계산하고 있었고 그녀의 눈물에 동정심을 느낀 폴은 함께 식사를 할 것을 권유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녀가 폴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폴과 줄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폴의 제안으로 그녀는 폴의 아들 제롬과 폴과 셋이서 (정확히는 줄리의 세 살난 아들까지 넷이서) 휴가를 떠나게 된다. 그후 귀가하다가 음주운전자의 차량과 사고가 나고, 결국 이 사고로 줄리의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런데 전화위복일까? 줄리의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만난 물리치료사 로맹와 줄리는 사랑에 빠지고, 이 휴가를 위해 고용한 초보의사와 제롬은 사랑에 빠지며, 줄리를 위로하러 병원에 찾아왔던 줄리의 친구 마농과 폴이 사랑에 빠진다. 심지어 폴의 아들 제롬보다도 마농이 어린데 말이다.

 

물론 줄리에게 폴같은 남자가 나타난 게 기적의 시작이었지만, 줄리와 로맹이 그냥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줄리의 아들이 죽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이 새롭게 가정을 꾸릴 수는 없었을까. 그랬다면 줄리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없었을 테고, 어쩌면 계속해서 마트 계산원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줄리는 불행했을까.

 

 

 

"절대 두 손 들지 마라,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일 수도 있다. 이 아랍 속담을 마음속에 새기고 산 지 벌써 몇 년째예요. 하지만 이제 더는 들고 말고 할 손도 없어요."

"있어, 지금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분명히 있어."

(p.198)

 

프루스트의 마들렌느

-각주: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주인공이 차에 마들렌느 과자를 곁들여 먹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생히 상기하는 대목이 있다. 이후 작품과 함께 이 대목이 유명해지면서 '프루스트의 마들렌느'는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매개체를 뜻하게 되었다.

(p.224)

 

 

 

천사가 지나가고 또 지나간 15분.

-각주: 프랑스에서는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 때, 대화 도중 갑자기 말이 뚝 끊겼을 때, '천사가 지나간다'라는 표현을 쓴다(p.237)

 

"모든 상처는 아물어요, 그럭저럭 빠르게 그럭저럭 크게 흉 지지 않게. 하지만 피부가 딱딱해지죠. 흔적은 남지만 삶은 더욱 강해지는 거예요."(p.256)

 

 

침묵은 영혼의 거울인 눈이 대화할 수 있게 한다. 침묵할 때 우리는 저 깊은 곳의 이야기를 더 잘 들을 수 있다.(p.287)

 

 

"삶은 바다와 같아요. 파도가 해안에 밀려오면 물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가 파도가 물러가면 다시 고요해지죠. 이 두 움직임이 끝없이 교차하고 반복해요. 하나는 빠르고 거칠며, 다른 하나는 느리고 부드럽죠. 물살이 조용한 곳으로 몰래 떠나버리고 싶다고요? 그래서 완전히 잊히고 싶다고요? 하지만 거기도 머잖아 다른 파도가 밀려올 거예요. 이후엔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올 거고요. 계속해서, 영원히. 삶이란 그런 거니까요. 두 가지 움직임이 교차하고 규칙적으로 변화해요. 때론 폭풍우가 몰아치면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가 어느새 잦아들고 잔잔하게 찰랑거리죠. 잔잔해도 어쨌든 찰랑거리긴 해요. 바닷가는 절대 고요할 수가 없어요. 절대. 삶도 마찬가지죠. 당신이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삶이. 이 모든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모래알들이 있고 좀 더 위쪽에 있어서 젖지 않고 멀쩡한 모래알들도 있지요. 무얼 부러워해야 할까요? 생각해봐요. 뽀송뽀송하고 반짝이는 위쪽 모래알로는 모래성을 지을 수 없어요. 파도에 시달린 모래로 지어야죠. 이 모래가 점성이 좋으니까요. 당신은 인생의 모래성을 다시 지을 수 있을 거예요. 폭풍우에 단련됐으니까요. 그 모래성은 당신을 닮은 모래, 인생의 풍량을 겪은 모래로 지어야겠죠. 그래야 단단할 테니까."

(p.361~362)

 

 

"선택의 여지 없이 강해져야 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어느 정도까지 강한지 절대 알 수 없다. 밥 말리의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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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일요일들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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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팔월의 일요일이란 어떤 기분일지 팔월에 책을 읽으며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우물쭈물하다가 구월에야 비로소 책을 펼쳤다. 불과 한달전이지만 다시 맞으려면 꼬박 1년을 기다려야 하는 팔월을 벌써부터 그리워하는 맘으로.

 

첫단락에서는 '어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랑 너무 비슷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면, 이 책은 '실비아'란 여인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진행이 제법 빠른 편이라, 책장이 예상보다 휙휙 넘어가서 퇴근길 전철에서 한시간 여만에 다 읽어버렸다.

 

과연 실비아는 그때 그 차 안에 있었을까? 실비아와 '남십자성'은 어디로 가 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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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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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000을 좋아하세요?>란 제목의 소설, 영화, 책의 원조는 바로 이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사진, 글 등 다양한 것들에 <000을 좋아하세요?>란 제목을 붙이곤 했기에, 이 책은 언제고 꼭 한번은 읽어보고 싶었다.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39살, 폴이란 여주인공. 6년째 만나고 있는 동년배 남자친구 로제. 어느 날 폴이 남자친구 로제의 옛 애인이 살고 있는 집에 일 관계로 들렀다가, 그 집 아들 시몽을 만나게 되는데, 그만 시몽은 폴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즈음 항상 자신을 기다리게 하고, 어린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로제에게 조금 많이 지쳐있던 폴은, 시몽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는데…….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p.43-44)

 

 

이 책의 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시몽이 폴을 브람스의 음악회에 초대하고자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브람스도 스승 슈만의 부인인 연상의 여인 클라라를 사랑했었다고 하니, 아마도 시몽은 그 사실을 알고 폴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상은 프랑스 사람들은 브람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그 이유가 궁금하여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왜 브람스를 싫어하는 걸까?) 그의 음악회에 가려면 미리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물어본다고 한다. -

 

 

시몽의 사랑은 너무나도 철없고, 맹목적이지만 그런 그의 말과 행동에서 순간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고, 마음이 따스해지기도 했다.

 

"그럼 난 6시까지 뭘 해야 되지?" 시몽이 고집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도 모르지……. 일하러 갈 거잖아."

"그럴 순 없어. 그러기엔 너무 행복한 걸."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일을 못할 건 없잖아……!"

"난 그래. 게다가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어. 산책을 하면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생각하면서 혼자 점심을 먹고, 그런 다음 6시가 되기를 기다릴 거야. 알다시피 난 패기에 찬 젊은이는 아니거든."

"당신 상사는 뭐라고 할까?"

"모르지. 어째서 당신은 내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기를 바라는 거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내 현재뿐인데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p.106)

 

"사랑해"라고 말하며 시몽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박스 밖으로 나오면서 그녀는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기계적으로 머리에 빗질을 했다. 거울 속에는, 방금 누군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얼굴이 있었다.

(p.111)

 

 

"알다시피 나는 경솔한 사람이 아냐. 나는 스물다섯 살이야.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살진 않았지만, 앞으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 당신은 내 인생의 여인이고, 무엇보다도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나는 알아,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신과 결혼하겠어."

"난 서른아홉 살이야." 그녀가 말했다.

"삶은 여성지 같은 것도 아니고 낡은 경험 더미도 아니야.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 거야. 그뿐이야. 나는 당신이 자신을 천박한 수준, 이를테면 그 심술쟁이 할망구들의 수준으로 비하시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지금 우리의 문제는 로제뿐이야. 다른 건 문제되지 않아."

(p.133)

 

이 책을 쓸 당시 프랑수와즈 사강은 겨우 스물네살의 아가씨였다고 하는데, 어쩜 사랑에 대해 (시몽의 입술을 통해) 저런 표현들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이 책을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판으로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연애소설로 치부되었을 이 책을, 현대사회에서는 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100년, 200년 후 세계문학전집에는 과연 어떤 책들이 새로이 포함될까.

 

사강은 노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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