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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니? 라고 누군가 물으면, 늘 대여섯 권의 책을 답했는데, 그 중 이 책도 꼭 들어갔다. <자기 앞의 생>. 아이러니한 점은,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 모모라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점. 주인공과 교감하는 할아버지가 한 분 있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말할 수 있을 뿐. 그런데도 늘 누가 좋아하는 책을 물으면 <자기 앞의 생>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뭔가 이 책에게도, 좋아하는 책을 물어주는 사람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제대로 줄거리를 기억할 수 있게끔 이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난 책의 첫 문장들을 좋아하는 데, 이 책의 시작은 이렇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 건물을 연이어 두 번이나 왕복할 일이 있었고, 그래서 위 구절을 더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과거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6층 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나는 그 중에서도 6층에 위치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체육시간이면 쉬는 시간 10분 만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집합해야 했고, 체육시간이 끝나면 10분 만에 교실로 돌아가서 교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해냈지, 싶다. 심지어 쉬는 시간이라고 운동장으로 놀러 나가는 위대한(?) 친구들도 있었다.
“모하메드, 너를 낳아준 사람이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너 자신뿐이란다. 하지만 너는 참 좋은 아이야. 네 아빠는 알제리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렴. 그건 훌륭한 일이란다. 독립의 영웅이지.”
“하밀 할아버지, 나는 영웅 같은 것보다 그냥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빠가 훌륭한 뚜쟁이여서 엄마를 잘 돌봐주면 좋을텐데 말예요.”(p.47)
“널 보니 우리 아들 생각이 나는구나. 모모야. 방학이라서 엄마와 함께 니스 해변엘 갔는데, 내일 돌아오지. 녀석의 생일이거든.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줄까 하는데, 우리 아들녀석하고 놀고 싶으면 우리집에 오도록 해라.”
엄마도 아빠도 자전거도 없이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이제 와서 이 작자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들다니.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중략) 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 나는 너무 열이 올랐다. (중략)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p.62)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피난처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p.91)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p.93)
나는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들을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었다. 킹콩이든 프랑켄슈타인이든 상처 입은 붉은 새떼라도. 그러나 엄마만은 안 된다. 그러기에는 내 상상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p.119)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p.138)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잘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물주는 아무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도 한다. 꽃이며 새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칠층에서 내려가지도 못하는 유태인 노파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p.164)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 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p.172-173)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가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중략)
나도 크면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쓸 때면 늘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잖아요.(p.244)
나는 화가 났다. 늙고 병든 여자에게 나쁘게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니까. 하나의 자로 모든 것을 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마와 거북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듯이 말이다.(p.276)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 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은 셈이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p.295-6)
사람을 사귈 때, 좋아하는 책을 묻곤 하는데, 그럴 때 내가 알고 있는 책, 혹은 좋아하는 책을 답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책도 그랬다. 유독 <자기 앞의 생>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살면서 많이 만났고, 그들과는 늘 그 한가지만으로도 이미 끈끈한 유대감을 느끼곤 했었다.
책의 결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어쩌면 결말이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기억나는 결말의 내용도, 언젠가는 또 가물가물 해질 날이 올 것이고, 그러면 아마도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쳐보겠지. 그때의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남겨둔다.
+ 이 책을 읽다가, 레미제라블이란 단어의 뜻이 "불쌍한 사람들"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 한번 잘 지었네. 레미제라블에는 정말 온통 불쌍한 사람들이 등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