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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린고비
노인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9월
평점 :
"어려서부터 나는 가난과 한식구처럼 살고 있다.
나는 남들보다 잘하는 걸 일찍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나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작가가 그림에 재능이 있고 그걸 일찍 알아차린 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남들보다 잘하는 게 없는 혹은 잘하는 걸 찾지 못하고 어영부영 가난과 한몸처럼 살아야 했던 사람은, 무엇으로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하(했)는가 싶어져서 갑자기 내가 불쌍해지는 이런 생각의 흐름, 좋지 않다. "내 이름은 자린고비다."라는 첫문장에 이어지는 위 문단을 보면서 이 책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겠다는 느낌이 든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린고비란 무엇인가. 이 제목은 의도한 것인가? 원래 자린고비는 재물이 있음에도 지독하게 아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그림책 속 고비는 있는데 아끼는 게 아니라 없어서 못하고 못먹는 거... 안 해봐서 뭐가 좋은지 모르는 거... 그런데 자린고비라... 반어법? 물론 근검절약하는 사람을 가리켜 자린고비라고 하기는 하지만 부정적 의미가 강한 건 사실이다. (제목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 하고 있는 중.)
가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에게 가난의 기준이 같을 수 없는 법. 얼마나 돈이 없어야 가난한가. 어디까지 가난해봤나. 상징적/사회적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정녕 '돈'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가. 하긴, 이 말이 모순인 게 이미 나는 '돈이 없어야 가난'하다고 말해버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것이 부유한 것이라고, 가난의 반대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어제 취향에 대해 썼었는데 그것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어서 못하고 못해서 모르는 것. 경험하려면 돈이 필요한 세상. 경험하지 못해서 없는 취향을 발견하고 계발하려면 돈이 필요한 세상. 그럼 그까짓 취향이란 거, 무시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아마 계급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가능하겠지. ㅠㅠ
"나는 성실히 일하고 내 의견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마감일을 정확히 지킨다."
돈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규칙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 큰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 온몸으로 습득하는 생존전략. 투명인간처럼, 입이 없는 사람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닥치고 일하라'에 끼워맞춰지는 약자의 생존.
"김밥을 시키면 단무지, 김치, 국물을 준다.
모두 공짜지만 더 달라고 말하진 않는다.
왠지 다음번 나의 김밥에 재료를 덜 넣을 것 같아서다."
모두 공짜?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으로 받는 걸 그렇게 꺼려하는 화자가 단무지, 김치, 국물을 공짜라고 말하는 건 좀. 엄연히 음식 가격에 포함되어 있고 그걸 지불한 것인데. 그러나 소비자 중에서도 약자인 입장을 표현한 마지막 문장에는 공감을 할 수밖에 없다. 불이익. 당할까 봐 지레 움츠려드는 생활자세. 너무 익숙한 패턴.
화자에게 밥을 사주고 싶어하고 먹을것을 건네는 편집자. 십년을 알고 지낸 사이라 신뢰가 쌓였으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은 들지만 동시에 꼭 먹을것을 사서 건네는 것으로 선의를 표현해야 할까 싶은 못된 마음이 스물스물 기어오른다. 왜지. 돈이 아니면 아무것도 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 이런 거창한 이유 아닌데. 화자가 거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떨지도 짐작이 간다. 물론 매우 고맙지. 그러나 돌아서서 생각하면 비참하거나 자괴감이 따라올 수 있다. 돈이 없어서 자괴감을 갖는다는 건 참 슬픈 일이기도 하고 황당한 일이기도 한데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선의와 친절이 당사자에게는 선의와 친절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쉽게 잊곤 하니까. 너무 쉽게 돈으로 선의를 표현하려고 하곤 하니까.
"배 그림을 건네자 편집자가 물었다.
"또 그리고 싶은 거 있어요?"
"모르겠어요. 이유 없이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어서요." "
그림을 그리는데 이유 없이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는 사람. 돈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 생존과 여유 사이의 괴리.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들. 경계하고 주눅들고.
"다음 미팅이 끝나고 나는 편집자에게 물었다.
"따뜻한 고기는 어떤 맛일까요?" "
세상에, 다른 것에, 호기심이 생기는 화자. 다만, 그 호기심이 탐욕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동시에. 그럴 리 없겠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탐욕을 특히 여성들의 탐욕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극소수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호기심을 표현하는 저 문장에 걱정 반이 실린다. 지나친 기우다. 화자가 편집자에게 마음을 여는 이 순간. 그냥 그 순간.
김밥의 세계를 넘어 떡볶이의 세게로 나아간 화자. 거기에는 편집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한걸음을 떼기가 힘들 수도 있다. 어떤 가치이든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편집자는 화자의 소중한 친구이다. 서로 인정하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친구. 이 그림책은 가난을 말하고 있지 않다. 친구를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심으로 다가오고 말을 걸고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노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이다. 화자를 경험의 세계로 이끌어준 편집자 친구가 계속 화자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둘이 계속 친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옆에 접어두고. 화자가 자신의 그림에 좀더 가치를 부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화자가 가난한 것보다 친구가 없는 게 나는 더 슬프다. 그래서인지 점점 컬러로 바뀌어가는 따뜻한 그림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아도 풍경을 보아도 외롭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좀 삐딱하게 보면, 결국 '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화자는 돈의 힘을 깨달았다. 조금 더 주면 좀더 나은 것을 취할 수 있음을, 거기에 또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것은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해볼 문제다. 관계와 돈의 힘. 편집자가 계속 화자의 친구로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한켠에 마뜩찮은 불만과 불안이 끼어있는 이유이고, 이 그림책이 마냥 좋다고 말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돈이 만들어내고 유지하고 또 파괴하는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