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정당화 1~3장 


여자는 사랑을(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에 대한 부분이다. 나르시시즘의 여자 / 사랑에 빠진 여자 / 신비주의의 여성.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남자' 자체가 아니라 환영(환상), 비현실적 존재이며, 그 '사랑'은 자기 소외/자기 소멸이다. "명백히 말하면 나르시시즘은 자기소외의 한 과정이다. 즉 자아는 절대목표가 되고 주체는 그 속으로 도피해 버린다."(803) "'사랑'이란 말은 남자와 여자에게 서로 전혀 다른 의미이다.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는 중대한 오해의 원천이 바로 거기에 있다. '사랑이란 남자의 생활에서는 일시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지만, 여자에게는 인생 그 자체이다'라고 한 바이런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822) "여자는 자기를 주고, 남자는 여자를 이용하여 자신을 풍요롭게 한다."(844) 세 가지 유형의 여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는 않았지만 이해는 간다. 아마 더 많은 유형이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현실적 존재와 더불어 비현실적 관계를 창조"(867)한다는 구절은 너무 알맞은 표현 아닌가 했다.ㅠㅠ 사랑과 연애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옆지기와 '연애' 관련 예능을 같이 보고 있다.(요즘 어찌나 넘쳐나는지.@@) 보부아르의 이야기 속에 예능의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오호라 싶은 부분들이 많았다. 가스라이팅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쉬웠다. 또 뭐가 빠졌지?


제4편 해방 


아. 이 부분은 895페이지부터 모조리 밑줄을 그어야 할 판이라서 페이지마다 아래로 화살표를 그려두었다. 






"여자가 실존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하여 붓이나 펜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은 갱년기 이후가 많다. 그러나 이때는 너무 늦다. 제대로 훈련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아마추어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895) 네??? 보부아르님, 정녕 그런가요? 너무 늦나요? ㅠㅠ "그러므로 문학과 예술을 취미로 해 보려는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끈질기게 지속하는 여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첫 장애를 극복한 여자들도 대개는 나르시시즘과 열등감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머뭇거리고 있다."(898) '나르시시즘과 열등감 사이'라는 말은 정말 가슴을 콕콕 찌른다. 그러니까 보부아르님, 문학과 예술로 도피하지 말라는 말이죠? 그거는 생활이잖아요. 이미 생활이야. 


어찌나 강렬하던지. 진짜 매년 아니면 2년에 한번씩 다시 읽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책 전체를 다시 못 읽는다면 이 '해방' 부분만이라도. 프랑스에서는 이 부분을 따로 책으로 만들어두었다. 첨에 모르고 산 거지만 이렇게 만든 이유가 다 있었구나 싶다.








"불행히도 자발성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평범한 사고의 모순 - 《타르브의 꽃》에서 폴랑이 설명하듯이 - 은 그것이 흔히 주관적 인상의 직접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다른 사람은 계산에 넣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가장 개성적인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실은 평범하고 상식적인 문구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점을 지적당하면 그녀는 놀라 화를 내고 펜을 던져 버린다. 그녀는 일반 독자들이 자기 나름의 안목과 생각으로 읽는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참신한 표현이라도 독자들의 오랜 기억들을 일깨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물론 자기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강렬한 인상을 끌어내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귀중한 재능이다. 우리는 어떤 남성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자발성을 콜레트의 작품에서 보고 감탄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 다음의 두 말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 그녀의 내부에서 깊이 반성된 자발성이다. 그녀는 자기가 만들어낸 것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만을 충분히 숙고하여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린다. 여자 아마추어작가는 말을 개인 서로간의 관계나 타인에 대한 호소로 파악하지 않고, 자기 감수성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본다. 그래서 말을 선택하고 삭제하는 것이 자기의 일부를 거부하는 듯 생각된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자기의 어느 부분도 희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녀의 메마른 허영심은 자기를 쌓아 올릴 생각 없이 너무 아끼기만 하는 데에서 온다." (897) 




결론 


결론 부분의 밑줄을 몇 개 뽑아온다. 희망을 놓지 않는 보부아르님. 그러나 이 책을 쓰고도 계속 변하지 않는 현실, 지금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릴 수는 없잖아. 그러니 앞으로 전진. 계속. 


"여자의 가치하락은 인류 발전 과정에 필요한 한 단계였다."(912) 

"남녀는 서로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자기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쪽의 잘못이 다른 쪽에 무죄를 선고하지는 않는다."(914) 

"불행은 개인의 부도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 자기기만은 저마다 상대에게 책임을 미룰 때 시작되지만 - 개별적인 행동이 무력해지는 상황에서 온다."(917) 

"그렇다고 여자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여자의 경제적 조건을 수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경제적 요인은 여자가 변화하는데 제1의 요인이었으며, 현재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 요인이 예고하고 요구하는 정신적·사회적·문화적성과가 수반되지 않는 한, 새로운 여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919)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은, 인간적 존재들을 서로 구별하는 어떠한 특이성보다도 중요하다. 우월성은 결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다. 예전 사람들이 '덕'이라고 불렀던 것은 '우리 상황에 맞춰 결정되는' 표준에 따라 규정된다. 남녀 양성 속에서는 육체와 정신, 유한과 초월의 연극이 똑같이 연출된다. 남녀는 다 같이 시간에 침식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타자에 대하여 똑같은 본질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자유로부터 똑같은 영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영광을 누릴 수 있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가짜 특권을 가지고 다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둘 사이에 우정도 싹틀 것이다."(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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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0-30 0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페이지 남겨두고 이제 잠자리로...ㅠ
내일 다 읽을 수 있겠죠^^
결론
이글자가 눈에 확 들어오네요
부럽습니다

난티나무 2021-10-30 03:59   좋아요 2 | URL
저는 동서문화사 판 뒷부분 해설이 아직 좀 남아있어요.^^;;
본문은 다 읽었어요, 그래도. 시원섭섭하네요?ㅎㅎㅎㅎ
그레이스님도 금방 읽으시겠어요. 화이팅~!!!^^

미미 2021-10-3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이지 전체가 좋았던 일이 너무 많아서 표시를 따로 해두었어요!! 온통 강렬하고 전율!! 난티나무님 글 읽고나니 해마다 읽을까 고민됩니다. 완독 수고하셨어요😍 👍👍

난티나무 2021-10-30 18:21   좋아요 1 | URL
밑줄을 긋기 시작하면 다 그어야 할 거 같은 부분들이 ㅎㅎㅎㅎ 조금 시간이 지나면 에이 또 뭐 해마다 읽어 싶기도 하겠죠?^^;;;; 제가 쫌 그래요.ㅎㅎㅎ
😻😻😻😻😻

라로 2021-10-30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열하게 읽으신 느낌이 퐉!!! 저는 제2의 성 읽기 전에 난티님 정리하신 페이퍼 먼저 읽고 읽어야겠어요. 이렇게 정리를 잘 하시니 저처럼 뒤 따라가는 사람이 좋네요.^^;; (너무 얇밉나??ㅋㅋ) 근데 저도 책 곱게 보다가 어느 순간 연필로 막 밑줄 긋고 글 쓰고 하다가 플래그 붙였는데 책을 읽는 건지 플래그를 붙이기 위한 건지 몰라서(막 줄 맞춰서 붙이고 색깔 정리하고;;;ㅋㅋ) 결국엔 플래그는 정말 전체 내용일 좋을 경우가 아니면 안 붙여요. 역시 연필이 최고. 근데 난티님도 한 터프하신듯!!ㅎㅎㅎ

난티나무 2021-10-30 18:25   좋아요 1 | URL
저 정리 못 해요.ㅠㅠ 일주일에 적어도 하나씩 글을 쓰기로 같이 읽는 친구들과 약속한 터라 쓰긴 써야 겠고 써지진 않고 ㅋㅋㅋ 🤣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분 좋지요~^^
저도 책에 밑줄이라니 오우노우 파였는데 🤣 최근에 막 긋기 시작했어요. 책 접는 건 여전히 싫어하고요.^^ 이런 책 같이 제가 계속 갖고 있을 책에는 밑줄 막 긋는 걸로 ㅎㅎㅎ 연필로 ㅎㅎㅎ

다락방 2021-10-3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지마다 화살표 너무 멋져요. 저도 저 기분 알아요. 제 경우에는 그냥 괄호로 단락을 묶어버려요! 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10-31 15:22   좋아요 0 | URL
오호! 다락방님도 괄호! 진짜 전체가 밑줄인 책 왤케 많죠?!^^;;;
 















제3장 사교생활

보부아르가 말하는 사교생활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다. 사교생활이란 무엇일까.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이 책이 씌여지기 전까지는 주로 여성들의 '살롱'에서 이루어지는, 만나야 하는 사람들과의 어울림, 필요에 의해, 의무에 의해, 여성이 할 일이라고 규정된 형식 안에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교생활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어떤 형식인가와는 상관없이 요즘도 의무와 필요에 의해 만나기 싫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니 딱히 지금과 다르다고 말하기도 어렵기는 하다. 난 정말 그 사람(들) 싫은데,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다시피 하니까.

"사춘기가 되면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생각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성적 대상이라는 사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녀는 기꺼이 자기 몸을 가꾸기 시작한다." (688)

요즘은 사춘기가 아니라 초등학생이 되면, 혹은 더 내려가서 유치원생이 되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여성성'이 직간접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뱃속에서부터이고,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지는 아이들에게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더 빨리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성적 대상이라는 사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 말은 슬픈 말이다.

"여자의 노출욕과 수치심 상의 타협을 규정하는 것은 풍습이다." (691)

"많은 여자들에게 화장이 그처럼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그녀들에게 이 세계와 자기들의 자아를 동시에 부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693)

"나르시시즘에도 타인의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697)

노출욕. 이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자발적' 결정이 얼마나 자유롭고 자발적인 것일 수 있는지 답을 찾지 못했다. 답이 있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수치심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려운 문제이다. 어제 잠깐 본 예능에서 남성 출연자의 바지가 어딘가에 걸려서 살갗이 조금 노출되었던지 아니면 옷이 당겨졌던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수치스럽다고 표현했다. 농담처럼 표현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냥 조금 부끄러운 정도 아닌가. 그저 신체의 일부분과 얽힌 가벼운 에피소드인데 수치,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가볍게, 쉽게, 쓰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여자의 노출욕과 수치심 상의 타협을 규정하는 것"이 "풍습"이라면(전적으로 맞고요), 노출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도 풍습일 것이다. 어렵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문화와 서구의 문화를 비교하여 전자를 부끄럼의 문화, 후자를 죄의 문화로 파악했다. 여기서는 부끄럼의 문화에서의 외면성의 중시와 죄의 문화에서의 내면성의 중시와 같은 대조, 또는 전자에서의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와 같은 수평성과 후자에서의 자기와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와 같은 수직성의 대조가 보인다. 그러나 수치라는 현상은 그와 같은 구별을 넘어선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다.

「수치와 수치감정에 대하여」[SGW 10. 65ff.]에서 셸러는 이 현상을 인간의 독특한 실존양식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정신과 인격성이 생명충동, 생명감정과 접촉하는 곳에서 수치감정이 발생한다. 따라서 동물이 부끄러워하는 것도 신이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닌바, 신체와 정신을 갖춘 인간에게 고유한 현상이라고 간주된다. 요컨대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선 내용과, 목표에 몰두하고 있던 정신적 지향은 이따금 주의가 신체로 향하는 것에서 스스로가 동물적 실존과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서 수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셸러에 의하면 신체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방식과 연관하여 신체의 수치 또는 생명적 수치감정과 심적 수치 또는 정신적 수치감정이라는 두 개의 근본 형태가 생각된다. 전자는 타자의 지향과 자기의 지향과의, 개체화와 일반화를 둘러싼 불일치가 자기에로의 되돌아봄(Rückwendung)을 매개로 하여 감득될 때에 발생한다. 또한 후자는 저차적인 충동적 추구를 강하게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가치 선택하는 고차적인 의식기능이 미결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의식의 두 단계가 긴장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사르트르『존재와 무』 제3부 '대타존재'에서 타자와의 연관에서 수치를 다루는데, 수치란 타자 앞에서의 자기에 대한 수치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야비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타자가 없을 때에는 별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치를 느끼는 것은 그 야비한 행위를 타자가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꼈을 때이다. 그 경우 수치는 야비한 행위가 보였다는 것보다도 자신이 타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즉 나의 대타존재의 체험에서 유래한다. 수치는 내가 사물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는 근원적 실추의 감정이다."

-이케가미 데쓰지(池上哲司)

[네이버 지식백과] 수치 [羞恥, Scham, honte] (현상학사전, 2011. 12. 24., 노에 게이이치, 무라타 준이치, 와시다 기요카즈, 기다 겐, 이신철)

수치,를 검색해보았다. 이 개념 역시 단순하지 않다. 앞으로 만나게 될 생활의 장면들에서도 수치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생각해 볼 문장 :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여자라는 일반성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의 관계에는 곧 적대감이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707)

공감, 신뢰, 남자의 그늘, 과 같은 단어들. "태양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생 종 페르스의 시 인용, 709)

제4장 매춘부와 첩

이 장에서는 몇 문장만 가져오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한다.

"결혼은 곧 매음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 (720)

"화려한 궁전의 위생을 위해서는 하수설비가 필요하다고 교회 신부들은 말했다." (721)

"결혼한 여자에게든 창녀에게든 성행위는 하나의 의무이다. 전자는 단 한 남자와 종신계약을 하고, 후자는 자기에게 돈을 지불해 주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전자는 한 남성을 통해 다른 모든 남성들로부터 보호받고, 후자는 모든 남성들을 통해 한 남성의 배타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721)

"소극적·위선적 수단으로는 이런 상황(성적/경제적 억압, 빈곤, 질병과 임신, 경찰의 횡포 등등)을 바꿀 수 없다. 매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모든 여성들에게 정당한 직업이 보장되는 것과, 풍습이 연애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매음의 필요성을 제거해야 비로소 매음을 폐지할 수 있다." (735 각주)

"여자가 자기 몸을 드러내는 모든 직업은 성적인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736)

생각해 볼 문장 :

"남자에게 돈을 지불하게 하는 것은 - 뒤에 보듯이 남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은 - 남자를 하나의 도구 또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자는 자신이 도구가 되는 것을 막는다. 아마 남자는 '그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성적 소유는 착각이다." (738)

제 5장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갱년기. 40이 넘으면 머리에 떠오르게 되는 단어. 최근 갱년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는 '갱년기'는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는 호르몬의 변화(완경에 따라오는)를 너무 부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을 조장해서 여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갱년기 '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호르몬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처방은 지나친 편견(&고정관념)은 아닐까? 삶에 대한 혼란과 어렴풋한 깨달음이 오는 이 시기를 갱년기라는 세 글자 속에 가두어두고 모든 현상을 '갱년기'라 그런 거라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월경하니 예민한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갱년기라 그렇다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약 먹고 견디라고,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험한 연령(갱년기)'의 특징은 몇 가지 기관의 고장으로 나타난다. 이 일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상징적인 가치 때문이다. ... 폐경기에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병은 육체 그 자체보다 그것을 괴롭게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 내면의 드라마는 보통 신체적 반응들이 나타나기 전에 시작되었다가 그 반응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종결된다." (745)

"상징적 가치"에 밑줄을 긋는다. 다만 "기관의 고장"이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

노년에 이르러 젊은 시절 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것(748)은 아무런 깨달음 없이 목적의식 없이 무모하게 이것저것을 탐닉한다는 말인가? 그것조차 '에로틱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여자의 일생이 너무 슬프다. '평범하게' 산 여성이라면 죽을 때까지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끝까지 '자기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사이비종교에 자꾸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여성의 경우가 가끔 미디어 상담코너에 보이는데 보부아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런 경우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현실감각을 다소 상실한 이 위기의 기간에는 어떠한 영향도 받기 쉽다. 여자는 미심쩍어 보이는 권위라도 열렬히 매달린다. 여러 종파, 영매, 예언자, 병을 고친다는 사람, 모든 사기꾼들에게 그런 여자는 아주 알맞은 먹이가 된다. 이는 그녀가 현실세계와 접촉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비판적 감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진리를 갈망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750~751)

"의무에서 해방된 그녀는 그제서야 겨우 자유를 발견한다. 불행하게도 어느 여자에게서나 우리가 '여자의 역사 속에서' 확인한 사실이 반복된다. 즉 그녀는 이미 쓸모없게 되었을 때 이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자가 하는 모든 역할에 예속의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모든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에 비로소 노예상태에서 벗어난다." (754)

'쓸모없게 되었을 때'가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소용'의 가치가 있어야만 인간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여자가 내뱉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754)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766) 같은 말이야말로 '쓸모없는' 말이다. 이 말이쥬, 보부아르 언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 말은 자주 내뱉었는데 반성해야 겠다.)

이 장의 어머니-아들, 어머니-딸 의 관계 부분은 특히 주의깊게 읽게 된다. 아이의 나이가 적든 그렇지 않든 아이와의 관계가 힘들지 않은 어머니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사람, 대등한 인격체, 라는 생각을 어린 아이에게 적용할 능력(?)이 없으므로(경험 부족과 무지) 아이가 점점 자라 비슷한 키가 되었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헤매게 되는 일이 잦다. "그녀가 아무리 그를 신뢰한다고 해도,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그녀와 아들 사이에 진정한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757) 같은 문장은 더더욱 와닿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기본적으로 아이를 신뢰한다 하더라도 사회의 상황 때문에 그 신뢰에 불안이 더해지지 않는 경우는 드물며 아이가 그렇게 자라기까지 알게 모르게 형성된 '사회적 마인드'와 나의 '기준'이 충돌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나름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해석한다." (758) 이것이 불화의 또 하나의 근원인 듯하다.

"만일 그녀들이 어머니에게 저항한다면 영원한 투쟁이 두 사람을 대립시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버려진 어머니는 딸의 불손한 독립적 태도에 대한 분노를 대개 사위에게 터뜨린다." (760) 여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실제 예를 알고 있다. 한 치도 틀림이 없다. 투쟁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관계.

"어머니가 폭군도 되지 않고, 잔인한 인간으로도 변하는 일 없이 자식들의 생활에서 행복을 발견하려면, 관용과 무관심의 흔치 않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760) 이것이 얼마나 여려운 일인지... 관용과 무관심의 흔치 않은 조화, 표시나지 않게, 태연하게, 아아 또다시 의도치 않게 가면을 써야 하는 일. "경험만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767) 는 말은 옳다.

생각해 볼 문장 :

"문학은 기획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말을 건넬 때, 독자들이 보다 넓은 식견을 향하여 행동하도록 도울 때 그 의미와 품위를 지닌다. 여자도 인간행위의 움직임과 일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여자는 책과 예술작품을 삼켜서 그것을 자기 안에 깊이 묻어 버린다." (765) ( * 일반적인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제6장 여자의 상황과 성격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여자의 성격과 상황을 정리하는 장이다. 아래의 구절로 대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저기 사회에 숨어있는 화두를 건져올려 하나씩 건드려주는 보부아르 언니의 센스! (센스 아니고 사유의 깊이이겠지만 여기서는 센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성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자'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우수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든가 하는 것을 결정하려는 모든 비교론이 어째서 무익한가에 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만일 이런 상황 자체를 비교해 본다면 남자 쪽이 무한히 유리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남자는 세계 속에 자기의 자유를 투사하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남성의 자아 실현은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타난다. 여자들에게는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저마다의 한계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지를 비교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은 그것을 저마다 자유로이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의에 찬 함정이나 성실을 가장한 기만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남녀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여자에게는 자유란 다만 추상적이며 공허한 것이므로 여자는 저항의 형태로밖에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가능성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저항만이 유일하게 열려진 길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여는 데 노력해야만 한다. 체념은 책임에 대한 포기이며 도피이다. 여자 스스로 자기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해결방법이 없다.

이런 해방은 오로지 집단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 쪽에서 경제적 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 (802)

생각해 볼 문장 :

"여자에게 시간은 새로운 차원을 갖지 않는다." (770)

"여자에게는 기생의 역할만이 할당되었다. 모든 기생하는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착취자가 된다." (787)

"그녀는 남자의 하인이지만 자기를 남자의 우상이라고 믿는다. 자기의 육체로는 굴욕을 겪으면서 그녀는 '사랑'을 찬양한다." (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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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10-24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막 2권을 마쳤습니다.
이제 정리해서 쓰기만 하면 2권은 끝나고, 읽지 않고 지나쳐온 1권이 남아있네요.
난티나무님 글 읽으니까 인용해주신 문장들 중에 제가 줄친 부분이랑 겹치기도 해서 쫘악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잘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난티나무 2021-10-25 06:14   좋아요 0 | URL
오 2권 끝까지 읽으셨군요.^^ 저는 아직 좀 남았습니다.
월요일이 25일이네요. 어이쿠. ㅎㅎㅎ 🤣
뭔가 다정하고 슬기로운(?) 댓글을 달고 싶은데, 능력 부족…^^;;;; 자주 말주변이 없는 저는 감사하다는 말만 놓고 자러 가겠습니다…ㅠㅠ

라로 2021-10-2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문장들이 난해합니다요. 왜 이렇게 어렵지??ㅎㅎㅎ 저는 일단 보부아르의 전기부터 읽고,,, 이 책은 언젠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은 하는데,,, 전 읽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네요,, 여성들 사이의 적대감에 대한 글도 갸우뚱 하고요..^^;;(제 머리가 나쁜 걸 왜 책 탓을 하고 그러는지;;;)

난티나무 2021-10-26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앞뒤 자르고 문장만 똭 갖고 와서 그렇게 느끼실 수 있을 거 같아요.^^;;
문장들마다 쏙쏙들이 이해되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것 같더라고요. 거기에 해당하는 상황과 경우들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라로님 무리(?) 없이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남자인 제 옆지기도 읽고 있는데요?ㅎㅎㅎㅎ

라로 2021-10-27 02:16   좋아요 0 | URL
네, 저 어제 긴스버그 다큐 봤는데요 넘 좋았어요!!!!!!! 페미니즘 공부라고는 그렇고 관련된 책을 이제 슬슬 찾아 읽고 싶어져요. 일단 공부하시는 난티님이 추천해 주시는 책부터 읽을까요?? 그전에 제2의 성 읽어야죠??😅😅😅

난티나무 2021-10-27 04:05   좋아요 0 | URL
오! 긴스버그~ 저는 책도 한 개도 못 읽었네요.^^;;;;
지금 보부아르에 관한 책을 읽고 계시니 제 2의 성 시작하셔도 괜찮지 않을...까요???ㅎㅎ
단 1부와 2부 중 1부가 좀 지루(?)한 면이 있어요. 2부는 흥미진진하게 읽혀요.^^
제가 책을 추천하기에는 지식이 얕아서...ㅠㅠ 뭐가 좋을까요? 덕분에 생각해 봐야 겠어요~^^

라로 2021-10-27 15:51   좋아요 0 | URL
공부하시면서 천천히 알려주세요.^^ 저 이제 보부아르 전기 시작했고, 어렵다는 제2의 성도 읽어야 하니 시간 많으세요.ㅎㅎㅎㅎ 난티님이 이리 좋아해 주시니 저도 막 좋아요. 먼저 공부하신 난티님 덕분에 제가 쉽게 좋은 책을 만날 것 같아서도 그렇고요.(좀 얄미운가요??ㅠㅠ)

난티나무 2021-10-27 18: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ㅎㅎ 읽은 책과 읽을 책들을 제 나름대로 선별하는 작업은 늘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지금 잘 안 되기는 하지만 ㅎㅎㅎ 해야 할 것 같아요. 실제로 옆지기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제가 권한 책들이 다 실패였거든요. 남자이고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있는 상태였어서 더 그렇기는 했지만 아무튼 책을 권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제2부 제2편 제2장 어머니


임신, 입덧, 출산.

나는 어땠나. [어머니] 부분을 읽으면서 시간을 거슬러 돌이켜본다. 많은 것이(어쩌면 모든 것이) 심리적 요인에 좌우된다는 말은 옳은 듯하다. 살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몸 안에 또다른 몸을 만들고 그 몸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나.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몸도 마음도 불안하다. 걱정하지 마라, 누구나 다 한다, 는 말은 1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겪는 사람은 '누구'가 아니라 '나'다. 누구나 한다고 해서 그것이 마땅한 것도 아니다.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첫 출산이 훨씬 더 힘들었다. 처음엔 다 그래, 둘째는 훨씬 수월하다? 같은 말을 들었다(나도 한 적 있다.ㅠㅠ). 처음이라 힘든 것은 맞다. 그러나 원인은 몸의 고통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것들은 '무지'에서 온다. 이런 마음 때문에 입덧이 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으레 하는 줄로만 알았지. 몸이 거부하는 것이라니. 그러고 보면 임신한 이후 희한하게도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를 단칼에 싫어하게 된 것도 심리적인 이유였겠다. 몸에 좋지 않은 것 = 아기에게 좋지 않은 것, 이라는 의식이 작용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 같은 게 당기는 것은 반대로 나의 욕구를 위한 몸부림이겠지. 카오스. 카오스.


*** 그녀는 신비의 법칙을 부과하는 종()의 먹이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런 소외는 그를 두렵게 한다. 그 두려움은 입덧으로 나타난다. (655) ***





첫 출산 후 병원에서의 사흘이 생각난다. 아무것도 모르는(세상에 알려진 딱 그만큼의 정보만 가진) 초보는 우는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울음을 터트렸다. 함께 방을 쓰던 옆침대의 낯선 여자는 말을 걸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처음 내가 먼저 말을 건넸을 때 그녀는 세번째 출산이라 했다.) 한밤에 벨을 눌러 간호사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싸늘하게 대하는 눈빛과 몸짓은 나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병원의 규칙에 따라 함께 잘 수 없었던 남편도, 첫 출산이라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엄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밤새 아기 옆을 지키는 건 내 몫이었다. 아기가 밤에 잠을 주욱 잘 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간호사들의 아침 인사는 잘 잤어요?다. 아니요... 아니 (도대체) 왜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간호사들 중 단 한 명만이 따뜻한 말을 건넸고 용기를 북돋아주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우는 아이를 어쩌지 못하는(않는) 건 마찬가지. 너의 일이야, 네가 알아서 어떻게 잘 좀 해 봐.

그래, 지금 생각하니 나 참 용감했다. 한밤의 눈물과 지침이 불안과 두려움이었다는 건, 이제 더 확실히 알겠다. 두번째 임신은 입덧도 가벼웠고 출산에 걸린 시간도 엄청 빨랐으며 회복 역시 빨랐다. 눈 내리는 병실 창가에 서서 혼자(아기가 쌕쌕 잠들어 옆에 있지만 나랑 놀아줄 건 아니니까) 무료하고 심심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 출산 이틀째였다. 어렴풋하게나마 좌충우돌로 겪어낸 첫번째 임신과 출산 경험이 그런 나를 만들었다. 기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부아르는, "임신의 시련을 가장 쉽게 겪어 내는 여자는 출산 기능에 완전히 헌신하는 모성형이며, 한편은 자기 육체에 일어나는 이변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을 쉽게 극복해 나가는 용기 있는 남성적 여성"(655)이라고 말했다. 나는 전자('출산 기능'!!)에 가까웠나? 아니면 후자?





*** 보통, 모성이라는 것은 나르시시즘·이타주의·몽상·성실·기만·헌신·쾌락·멸시의 기묘한 혼합이다. (670)


이제까지 서술해 온 내용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두 가지 편견은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 명백하다. 우선 모성애라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여자를 충분히 만족시킨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680~681)

첫번째 편견에 직접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또 다른 편견은,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확실한 행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모성애에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모성본능이 없는' 어머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런 까닭으로 나쁜 어머니도 있을 수가 있다. (중략) 세상에서 여자에게 주는 경멸과 어머니에게 주는 존경심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은 괴상한 아이러니이다. (683) ***


감정의 기묘한 혼합. 보부아르는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 하다. 첫 출산 이후의 힘듦 이후로 아이가 2살일 때, 4살일 때, 7살일 때, 그렇게 자라기까지 또 무수한 이야기들, 감정들이 있다. 아이들이 어른의 외형에 가깝게 큰 지금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도 한 인간을 감독·지도하는 것, 오로지 거기에 반항함으로써만 자기를 확립할 수 있는 한 미지의 자유로운 주체에게 개입하는 어려움을."(675)  그 어려움, 요즘 만끽(!)하는 중이다. 어렵다. 






*** 오늘날 여자를 가정 밖에 몇 시간씩 묶어놓는 직업과 아이의 이익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육아를 양립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은, 여자의 일이 아직도 노예 노동이기 때문이며, 또한 가정 밖에서 아이의 시중과 교육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의 무능이 원인이다. 하늘이나 땅속에 기록되어 있는 법에 따라 어머니와 아이는 오로지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사회의 무능을 두둔하는 것은 궤변이다. 이런 서로간의 구속이라는 관계는 실제로 이중의 해로운 압박을 낳을 뿐이다.

여자는 어머니가 됨으로써 사실상 남자와 동등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이다. (685) ***


궤변이다. 기만이다. 그렇게 외치는 보부아르 님. 궤변이다. 기만이다. 나도 외쳐본다. 나를 기만하지 말아라! 너희의 그 궤변덩어리들 다 깨부숴주겠숴~ (라고 해놓고 머리아프다. ㅠㅠ)





*** 여자는 가사로는 결코 자기를 구제할 수 없다. 이 일은 그녀의 시간을 빼앗지만, 그녀의 삶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정당화는 자기 밖에 있는 자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정에 갇혀 있는 여자는 스스로 실존을 만들어 나갈 수 없다. 그녀는 개별성 속에서 자기를 확립할 수단이 없다. 따라서 그 개별성이 그녀에게는 인정되지 않는다. (686) ***






이렇게 제2장 [어머니] 부분이 끝났다. 할 말이 많은 듯 했는데 결국 경험의 부분적 나열에 불과하다. 단순히 경험만을 나열하는 것만도 오래 걸릴 것 같다. 아직도 머릿속에 장면들이 어른거린다. 그 장면들은 나에게 어떤 또다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계속 곱씹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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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10-18 22: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간추리신 내용과 경험담을 읽는것만으로도 다시 한번 숙연해지고 빚진 마음같은게 느껴지네요! 왠지 저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저 사회제도라는 장벽에 벽돌 한장쯤은 쌓은것 같고, 그 장벽이 무너지지 않게 일정부분 공헌했던것도 같고, 무의식의 영역에선 그 장벽이 주는 직접적 및 반사적 이익이라는 과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장벽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싶어 왔던지도 모르겠네요!ㅠ 완독까지 힘내시구요!

난티나무 2021-10-18 22:56   좋아요 4 | URL
막시무스님, 댓글 읽는데 마음 한켠이 살짝 무거우면서 또 뿌듯(?)한 마음이 동시에 드네요.^^ 뜬금 박수를 쳐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헤헷. 막시무스님 글 보면서 저도 많이 공부합니다. 댓글은 잘 안 달지만서두... 반성반성...ㅎㅎㅎ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10-18 2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요된 모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티나무님 글로 읽으니 끄덕끄덕, 공감입니다.
저도 이 책 읽기로 했으니 분발해야하는데...

난티나무 2021-10-19 04:58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화이팅입니다!^^
문장들에 밑줄 그으며 멈칫멈칫합니다.^^

단발머리 2021-10-23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머니,라는 과정을 비교적 편안하게 지나쳐 온 사람인데, 난티나무님 글 읽는데 막 맘이 뭉클하네요. 외국의 어느 병원에서 달래주는 사람 하나 없이 신생아와 씨름하는 순간들이 막 그려지고요.
애 많이 쓰셨어요, 난티나무님! 우리 모두 그 길을 이렇게 저렇게 잘 지나왔네요ㅠㅠ

난티나무 2021-10-24 03:32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고마워요~^^
그러네요, 지나와서 지금 여기에~
여전히 어렵지만 ㅎㅎㅎ 앞으로도 잘 지나갈 수 있겠지요?^^;;;; 현재진행형...ㅎㅎㅎ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계속 불릴 테니까요.^^


공쟝쟝 2021-10-2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읽으면서 제 엄마와 동시에 내 유자녀 기혼 서재 이웃들이 많이 생각났었어요. 이 부분 읽을 때는 정말 만감이 교차하겠구나... 하구.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엄마들이 다 겪는다, 가 아니라 바로 ‘내‘가 겪는 다는 말이 와닿아요. 내가 가진 고유의 경험과 감상들을 다 그런거야~ 하면서 흘려보내지 않으셨음 해요! ^^ 우리 그렇게 스스로를 독려해나가자요!

난티나무 2021-10-26 23:31   좋아요 1 | URL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경험담을 늘어놓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고 하던데(아 진짜 맞는 말 ㅠㅠ) 많이 찔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다른 경험들을 모조리 풀어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만 어떻게,라는 질문이 남아있을 뿐. 공쟝쟝님의 글 뿐만 아니라 댓글한테도 팬이라고 전해 줘요~
 

좀전까지 읽고 있던 책 : <세미나책> 


그전까지 읽고 있던 책 : <Une jeunesse sexuellement libérée (ou presque)> 


이번주 읽어야 할 분량이 있어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는 책 : <제2의 성 2>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우에노 지즈코) <학교의 슬픔> 


대출해놓고 앞부분만 읽은 책 : <억척의 기원>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대출해놓고 시작도 못하고 연장만 해놓은 책 : <쌀 재난 국가> 


그러고도 또 대출한 책 : <두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 


읽으려고 책상에 쌓아둔 책 : <마이너 필링스> <이토록 두려운 사랑> 


밀린 책들이 있는데 펼치고 싶은 책 : <혁명의 영점> 


이 와중에 소설을 좀 읽어야 겠다고 부릉부릉. 생각만 부릉부릉. 하면서 삼일을 내리 놀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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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10-14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그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님 문어발 독서 완전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1-10-15 00:25   좋아요 0 | URL
태그 뭐라고 썼지 @@ 암튼 문어발은 생각납니다.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10-25 13:16   좋아요 0 | URL
황정은 에세이에서 자기의 독서는 선형적 독서가 아니라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는 방사형 독서라고 ㅋㅋ 저도 읽다가 손 번쩍 들었음. 작가님도? 나도!!!!! 나도요!!!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초보독서중독자로서 서재 돌아다니다 남의 책탑이나 문어발 보면서 언제나 이 생각을 해요. 난 아직 멀었다...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1-10-26 23:27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서로의 독서를 보면서 서로 난 아직 멀었다...를 생각한다니 우리 너무 겸손한 거 아니예요? 겸손은 지나치면 안 된다고 했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나는 겸손해야 함.ㅠㅠ ㅋㅋㅋㅋㅋ)
 











제2부 현대 여성의 삶 제2편 상황 제1장 기혼 여성

나, 기혼 여성. 23년차.

책을 읽다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결혼하기 전에 내가 이 책들을 읽었다면 나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가끔 옆지기도 묻는다. 그랬을 거 같냐고. 아마도 그랬겠지. 알고서도 감행한다는 건 모르고 하는 것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일 테니까. 아니, 알 수 없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해두자. 어쨌든 인간관계나 '연애'의 실상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제도에 대해서도 더 고민했을 것이다. 음 장담할 수는 없겠다. 지금의 나라고 크게 다를까. 앞으로는... 역시 장담할 수 없겠다.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 지금을 살기도 벅차니까. 일단 지금 잘 살고 생각하자. 뭐라니.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결혼을 결정하는 요인은 사랑이 아니다. '남편이란 말하자면 사랑하는 남자의 대용이지, 결코 그 사랑하는 남자는 아니다‘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런 분리는 조금도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결혼제도의 본질적 성격에서 유래한다. 결혼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성적인 결합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에서는 회교도 공동체에서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부모의 권위에 따라 선택된 약혼자들은 결혼 당일까지 서로 얼굴도 모르는 경우조차 있었다. 사회적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 개개인이 감정이나 변덕스러운 사랑을 이유로 자기의 삶을 설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별 있는 계약에서 욕망은 그렇게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침울하고 무디다. 사랑의 신은 사랑 이외의 장소에 머물기를 싫어한다. 결혼처럼 다른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관계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 결혼에서는 친족관계나 재산이, 우아함이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시된다. 이는 마땅하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그 이상으로 자손이나 가족을 생각해서 결혼한다.' (《수상록》 제3편 제5장) " 545

"결혼과 사랑의 조화는 대단히 힘든 일이어서 성공하려면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우여곡절 끝에 이른 결론이다. 그는 결혼의 모순을 고발하기를 좋아했다.

결혼이란 얼마나 기이한 제도인가! 결혼을 더욱더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어떤 행위도 그처럼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이처럼 결정적인 행위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랑이나 좋아하는 기분은 자발적인 것이지만 결혼은 하나의 결정이다. 더구나 사랑의 감정이 결혼 혹은 결혼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즉 가장 자발적인 것이 동시에 가장 자유스러운 결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발성이란 대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신성하고 신중한 판단을 통해 결정되어야 함을 뜻한다. 또한 하나가 다른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결정은 천천히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 대단원을 맞이해야 한다." 552


오 우리는 얼마나 착각을 했던가. 사랑하면(좋아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째서 변함없이 드글드글한가 말이다. 왜 나(너)와 결혼했냐고 묻는다. 사랑하니까. 정말, 그 이유 뿐이라고? 아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서 오로지 상대방을 생각했을 리가 없다. 솔직해지자. 나도 그랬다. 단순히 같이 살고 싶어서 말고, 이러저러한 조건들을 끼워맞춰보지 않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결혼은 그런 것이다. "결혼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의 경제적·성적인 결합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들의 개인적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악. 어렴풋하게나마 결혼이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우리는 결혼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 하는 것일까? 왜 계속 속고 있는 것일까.




"산업사회는 생산의 영역이든 재생산의 영역이든 모두 '자유방임'이란 이름의 동일한 통제 매커니즘 아래 놓여 있다. ¹


¹ 재생산 영역의 통제 매커니즘은 혼인규칙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근대의 연애결혼이란 이데올로기는 '누구나 자유롭게' 결혼해도 좋다는 원리 아래 이제까지의 규제적인 혼인규칙을 타파했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결혼시장은, 실은 '자유'로운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통해서 재생산이 자동적으로 통제되는 또 하나의 '혼인 틀'이었다."

우에노 지즈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p.30

함께 읽고 있는 우에노 지즈코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 밑줄을 그었다. 자유로운 결혼시장. 자유로운 상품시장. 자유라는 이름 아래 나도 모르게 통제되는 사회. 나는 자유롭다, 나의 결정은 자발적 결정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 좀 많이 괴로운 일이다. 다들 하는 거라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고 하니까, 사랑 다음엔 '자연'스럽게 결혼이지, 이랬던 내 생각이 다 틀려먹은 것이었다는 충격, 은연 중에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배신감, 그런 와중에 내 결정은 100퍼 자발적인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이미 알고 있던 당혹감까지.





"하지만 주부가 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는 한 여성이 이 역할을 준비하고 아이와 남편이 자신의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 무임금상태의 어머니가 시키는 일상적인 훈련과 사회화를 거치며 최소한 20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 경우도 성공은 쉽지 않다. 아무리 훈련을 잘 받는다 하더라도 신혼생활이 끝나고 설거지거리가 쌓인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속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여성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사랑 때문에 결혼한다는 환상을 품고 있는 여성들이 많고, 돈과 안전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사랑이나 돈은 결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힐 때가 이제는 되었다. (몇 줄 생략)

우리는 자본이 우리의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데 대단히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여성을 희생하여 진정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지불을 거부하고 가사노동을 사랑의 행위로 바꿔 놓음으로써 일거다득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먼저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획득했고, 여성들이 이에 거부하는 투쟁을 일으키기는커녕 인생 최고의 일로 가사노동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다(마법과도 같은 말 : "그래, 여보, 당신은 천생 여자야"). 동시에 자본은 여성이 남성노동자의 노동과 임금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남성노동자 역시 통제했다. 그리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뒤 집에 가면 부릴 수 있는 하녀를 붙여줌으로써 이 통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여성의 역할은 임금을 받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노동계급"의 하녀가 되는 것이다."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39~40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이 도착해 급히 앞부분을 읽는다. 한없이 인용해야 할 것 같다. 가까스로 인용을 멈춘다.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말들. 오 내 지나버린 가사노동의 시간들이여. 페데리치의 말처럼 가사노동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아무도 돌봄노동이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과 분배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조금씩 감이 잡히는 듯하다. 속았다는 기분. 너무 잘 알지. 알면서 애써 숨기고 살려는 감정.





"육체적 사랑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목적도 단순한 수단도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다른 것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없다. 즉 육체적 사랑은 인간의 모든 삶 속에 삽화처럼 끼어들면서도, 또한 자주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그것은 자유로워야 한다." 567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보부아르가 말하는 것처럼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이다. 육체적 사랑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도대체 우리가 배운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냅다 세상에 집어던져버리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 아니냐. 너네 알아서 해. 뭘 알아야 알아서 하지. 지금도 여전히 여자들은 교육 비스무리한 것조차 받지 못한 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늙어간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 몸도 제대로 모르고 평생을 산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말이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알아야 내 몸 내가 지키고 내 몸 내가 느끼고 보부아르의 말처럼 '자주적인 사랑'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번지르르하게 성을 대상화하는 미디어에서 말해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섹슈얼리티의 힘은 마치 그동안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묻어둔 비밀처럼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강력한 힘이 지닌 영향력에 대해 과연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거기까지다. 두려움을 가져라. 그런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네게서 ‘그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해라. 지나치게 쾌락을 탐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선을 넘고 말 것이고 우리는 너를 도울 길이 없을 것이다. 남자를 믿지 마라. 너에게 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는 누구든 믿지 마라. 우리는 너에게 그걸 설명해줄 수 없으니 그냥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자.

대화 섹스를 화두로 삼지 않는 한 당신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없고, 당신의 여정을 오롯이 혼자서 헤쳐나가야만 한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그냥 사적인 비밀로 간직하고 말자는 마음속의 암시를 우리는 모두 극복해야 한다. 파트너 또는 연인에게만 하는 한이 있어도 당신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섹스에 관한 대화를 할수록 그러한 수치심이 점점 줄어든다."

에이미 조 고다드 <섹스하는 삶>


그러게 말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기본적인 성교육조차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판국에 몸이니 클리토리스니 하면 기절들 하겠지. 한숨. 일단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수치심부터 버리자. 대화를 하면 할수록 수치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위의 말은 옳더라.



"그런데 떠맡다, 사랑한다는 이 두 말은 곧잘 혼동된다. 바로 거기에서 속임수가 나온다. 사람은 자기가 맡은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기의 육체, 자기의 과거, 자기의 현재 상황을 책임지고 맡는다. 그러나 사랑은 타자를 향한, 자기의 존재와 분리된 생명, 목적, 미래를 향한 움직임이다. 무거운 짐 같은 억압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관계는 직접성만으로 추구된다면 가치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의식 안에서 성찰되어야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의 자유를 해치는 (관계의) 직접성에 빠지는 것을 찬탄할 수는 없다. 부부애라 불리는 애착·원한·증오·구속.체념·대만·위선 등으로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사람들이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 변명이나 핑계로 쓰이기 때문이다. 우정도 육체적 사랑과 마찬가지이다. 참된 우정이 되려면 먼저 자유를 전제로 해야 한다. " 617


"결혼의 비극은 결혼이 약속한 행복을 여자에게 보증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 그렇다고 결혼이 완전한 행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결혼이 여자를 불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결혼은 여자를 반복과 매너리즘에 떨어뜨려버린다. 여자 일생의 첫 20년은 놀랄만큼 풍요롭다. 여자는 월경·성감(性感)·결혼·모성이라는 경험을 통과한다. 세계와 자기의 운명을 발견한다. 그러나 20세에 가정주부가 되어, 일생 동안 한 남자에게 매이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 이것으로써 그녀의 삶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위, 진정한 일은 남자의 특권이다. 여자에게는 그날그날의 살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종종 몸을 녹초로 만들지언정, 결코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체념과 헌신의 덕을 사람들은 극찬한다. 그러나 여자는 ‘생애 마지막까지 부부 두 사람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덕이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장 나쁜 점은, 이런 여자의 헌신 자체가 귀찮은 것처럼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눈에는 아내의 헌신이 압박처럼 보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아내의 유일한 정당성의 근거로 그녀에게 밀어붙인 것은 남편이다.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그는 그녀에게 전면적으로 헌신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서로의 의무를 승낙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살고 있으므로, 같은 것을 그에게 요구한다‘는 소피아 톨스토이의 말은 확실히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실제로 아내가 자기를 위해, 자기에 의해 살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그렇게 함으로써만 긍정할 수 있는 태도이다.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어 놓고, 그녀의 불행에 자기가 희생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남편의 이중성이다. 침대에서 아내에게 뜨거운 동시에 차갑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가 전적으로 자기를 바치되, 그 무게로 남편을 누르지 않기를 요구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를 지상에 안정시키면서도 자유로이 놓아 둘 것, 날마다 단조로운 반복을 거듭하면서도 권태롭지 않게 할 것, 늘 곁에 있으면서도 귀찮은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는 그녀를 전적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면서, 자기는 그녀의 소유가 되기를 거절한다. 둘이서 살아가면서 혼자이기를 원한다. 이렇게 남자는 여자와 결혼할 때부터 그녀를 속인다. 여자는 삶을 이어가면서 이런 배신감을 점점 더 크게 느낀다. " 628


속임, 이중성, 배신감. 여성성의 신화. 인용이 너무 길지만 어디서 끊기도 애매하고.







"사랑과 결혼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같은 사기는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가사노동이 완전히 자연화되고 성적인 문제가 되면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이 여성의 속성을 띠게 되면 여성 모두는 거기에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모든 여성은 그 일을 하면서 심지어는 좋아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기대 속에 놓이게 된다. 남편이 가사도우미를 두고 정신과 상담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고 다양한 형태의 휴식과 오락을 즐길 수 있다는 사회적 지위 덕분에 가사노동의 일부 또는 전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해서도 이 같은 기대가 예외는 아니다. 여성이 한 남성에게 봉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여성 모두가 전체 남성사회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불리는 것이 비하이고 무시인 것이다. 남편이든 당신의 기차표를 끊어준 사람이든 직장 상사든 간에 모든 남성들은 당신에게 "웃어봐, 자기야, 무슨 일 있어?"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42~43


'사랑과 결혼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같은 사기'. '여성 모두가 전체 남성사회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음'. 틀린 말 하나 없다.

인용구들을 옮기며 다시 읽으니 보부아르는 정말 끝없이 안으로 파고들어갔구나 싶다. 그래서 오히려 거시적 관점이 조금 부족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 다음 챕터는 '어머니'이다. 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겠다. 신화 팍팍 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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