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사교생활
보부아르가 말하는 사교생활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다. 사교생활이란 무엇일까.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이 책이 씌여지기 전까지는 주로 여성들의 '살롱'에서 이루어지는, 만나야 하는 사람들과의 어울림, 필요에 의해, 의무에 의해, 여성이 할 일이라고 규정된 형식 안에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교생활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어떤 형식인가와는 상관없이 요즘도 의무와 필요에 의해 만나기 싫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니 딱히 지금과 다르다고 말하기도 어렵기는 하다. 난 정말 그 사람(들) 싫은데,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다시피 하니까.
"사춘기가 되면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생각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성적 대상이라는 사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녀는 기꺼이 자기 몸을 가꾸기 시작한다." (688)
요즘은 사춘기가 아니라 초등학생이 되면, 혹은 더 내려가서 유치원생이 되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여성성'이 직간접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뱃속에서부터이고,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지는 아이들에게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이 더 빨리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성적 대상이라는 사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 말은 슬픈 말이다.
"여자의 노출욕과 수치심 상의 타협을 규정하는 것은 풍습이다." (691)
"많은 여자들에게 화장이 그처럼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그녀들에게 이 세계와 자기들의 자아를 동시에 부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693)
"나르시시즘에도 타인의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697)
노출욕. 이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자발적' 결정이 얼마나 자유롭고 자발적인 것일 수 있는지 답을 찾지 못했다. 답이 있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수치심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려운 문제이다. 어제 잠깐 본 예능에서 남성 출연자의 바지가 어딘가에 걸려서 살갗이 조금 노출되었던지 아니면 옷이 당겨졌던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수치스럽다고 표현했다. 농담처럼 표현되기는 했으나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냥 조금 부끄러운 정도 아닌가. 그저 신체의 일부분과 얽힌 가벼운 에피소드인데 수치,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가볍게, 쉽게, 쓰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여자의 노출욕과 수치심 상의 타협을 규정하는 것"이 "풍습"이라면(전적으로 맞고요), 노출욕과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도 풍습일 것이다. 어렵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문화와 서구의 문화를 비교하여 전자를 부끄럼의 문화, 후자를 죄의 문화로 파악했다. 여기서는 부끄럼의 문화에서의 외면성의 중시와 죄의 문화에서의 내면성의 중시와 같은 대조, 또는 전자에서의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와 같은 수평성과 후자에서의 자기와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와 같은 수직성의 대조가 보인다. 그러나 수치라는 현상은 그와 같은 구별을 넘어선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다.
「수치와 수치감정에 대하여」[SGW 10. 65ff.]에서 셸러는 이 현상을 인간의 독특한 실존양식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정신과 인격성이 생명충동, 생명감정과 접촉하는 곳에서 수치감정이 발생한다. 따라서 동물이 부끄러워하는 것도 신이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닌바, 신체와 정신을 갖춘 인간에게 고유한 현상이라고 간주된다. 요컨대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선 내용과, 목표에 몰두하고 있던 정신적 지향은 이따금 주의가 신체로 향하는 것에서 스스로가 동물적 실존과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서 수치가 생겨나는 것이다. 셸러에 의하면 신체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방식과 연관하여 신체의 수치 또는 생명적 수치감정과 심적 수치 또는 정신적 수치감정이라는 두 개의 근본 형태가 생각된다. 전자는 타자의 지향과 자기의 지향과의, 개체화와 일반화를 둘러싼 불일치가 자기에로의 되돌아봄(Rückwendung)을 매개로 하여 감득될 때에 발생한다. 또한 후자는 저차적인 충동적 추구를 강하게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가치 선택하는 고차적인 의식기능이 미결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의식의 두 단계가 긴장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제3부 '대타존재'에서 타자와의 연관에서 수치를 다루는데, 수치란 타자 앞에서의 자기에 대한 수치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야비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타자가 없을 때에는 별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치를 느끼는 것은 그 야비한 행위를 타자가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꼈을 때이다. 그 경우 수치는 야비한 행위가 보였다는 것보다도 자신이 타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즉 나의 대타존재의 체험에서 유래한다. 수치는 내가 사물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는 근원적 실추의 감정이다."
-이케가미 데쓰지(池上哲司)
[네이버 지식백과] 수치 [羞恥, Scham, honte] (현상학사전, 2011. 12. 24., 노에 게이이치, 무라타 준이치, 와시다 기요카즈, 기다 겐, 이신철)
수치,를 검색해보았다. 이 개념 역시 단순하지 않다. 앞으로 만나게 될 생활의 장면들에서도 수치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생각해 볼 문장 :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여자라는 일반성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의 관계에는 곧 적대감이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707)
공감, 신뢰, 남자의 그늘, 과 같은 단어들. "태양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생 종 페르스의 시 인용, 709)
제4장 매춘부와 첩
이 장에서는 몇 문장만 가져오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한다.
"결혼은 곧 매음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낳는다." (720)
"화려한 궁전의 위생을 위해서는 하수설비가 필요하다고 교회 신부들은 말했다." (721)
"결혼한 여자에게든 창녀에게든 성행위는 하나의 의무이다. 전자는 단 한 남자와 종신계약을 하고, 후자는 자기에게 돈을 지불해 주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전자는 한 남성을 통해 다른 모든 남성들로부터 보호받고, 후자는 모든 남성들을 통해 한 남성의 배타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 (721)
"소극적·위선적 수단으로는 이런 상황(성적/경제적 억압, 빈곤, 질병과 임신, 경찰의 횡포 등등)을 바꿀 수 없다. 매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모든 여성들에게 정당한 직업이 보장되는 것과, 풍습이 연애의 자유를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매음의 필요성을 제거해야 비로소 매음을 폐지할 수 있다." (735 각주)
"여자가 자기 몸을 드러내는 모든 직업은 성적인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 (736)
생각해 볼 문장 :
"남자에게 돈을 지불하게 하는 것은 - 뒤에 보듯이 남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은 - 남자를 하나의 도구 또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자는 자신이 도구가 되는 것을 막는다. 아마 남자는 '그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성적 소유는 착각이다." (738)
제 5장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갱년기. 40이 넘으면 머리에 떠오르게 되는 단어. 최근 갱년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는 '갱년기'는 없는 게 아닐까? 어쩌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는 호르몬의 변화(완경에 따라오는)를 너무 부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을 조장해서 여자들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갱년기 '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호르몬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처방은 지나친 편견(&고정관념)은 아닐까? 삶에 대한 혼란과 어렴풋한 깨달음이 오는 이 시기를 갱년기라는 세 글자 속에 가두어두고 모든 현상을 '갱년기'라 그런 거라고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월경하니 예민한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갱년기라 그렇다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약 먹고 견디라고,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험한 연령(갱년기)'의 특징은 몇 가지 기관의 고장으로 나타난다. 이 일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상징적인 가치 때문이다. ... 폐경기에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병은 육체 그 자체보다 그것을 괴롭게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 내면의 드라마는 보통 신체적 반응들이 나타나기 전에 시작되었다가 그 반응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종결된다." (745)
"상징적 가치"에 밑줄을 긋는다. 다만 "기관의 고장"이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다.
노년에 이르러 젊은 시절 하지 못했던 일을 시작하는 것(748)은 아무런 깨달음 없이 목적의식 없이 무모하게 이것저것을 탐닉한다는 말인가? 그것조차 '에로틱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여자의 일생이 너무 슬프다. '평범하게' 산 여성이라면 죽을 때까지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끝까지 '자기자신'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사이비종교에 자꾸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여성의 경우가 가끔 미디어 상담코너에 보이는데 보부아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런 경우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다. "현실감각을 다소 상실한 이 위기의 기간에는 어떠한 영향도 받기 쉽다. 여자는 미심쩍어 보이는 권위라도 열렬히 매달린다. 여러 종파, 영매, 예언자, 병을 고친다는 사람, 모든 사기꾼들에게 그런 여자는 아주 알맞은 먹이가 된다. 이는 그녀가 현실세계와 접촉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비판적 감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진리를 갈망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750~751)
"의무에서 해방된 그녀는 그제서야 겨우 자유를 발견한다. 불행하게도 어느 여자에게서나 우리가 '여자의 역사 속에서' 확인한 사실이 반복된다. 즉 그녀는 이미 쓸모없게 되었을 때 이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자가 하는 모든 역할에 예속의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는 모든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에 비로소 노예상태에서 벗어난다." (754)
'쓸모없게 되었을 때'가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소용'의 가치가 있어야만 인간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여자가 내뱉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754)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766) 같은 말이야말로 '쓸모없는' 말이다. 이 말이쥬, 보부아르 언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 말은 자주 내뱉었는데 반성해야 겠다.)
이 장의 어머니-아들, 어머니-딸 의 관계 부분은 특히 주의깊게 읽게 된다. 아이의 나이가 적든 그렇지 않든 아이와의 관계가 힘들지 않은 어머니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사람, 대등한 인격체, 라는 생각을 어린 아이에게 적용할 능력(?)이 없으므로(경험 부족과 무지) 아이가 점점 자라 비슷한 키가 되었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 헤매게 되는 일이 잦다. "그녀가 아무리 그를 신뢰한다고 해도,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그녀와 아들 사이에 진정한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757) 같은 문장은 더더욱 와닿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기본적으로 아이를 신뢰한다 하더라도 사회의 상황 때문에 그 신뢰에 불안이 더해지지 않는 경우는 드물며 아이가 그렇게 자라기까지 알게 모르게 형성된 '사회적 마인드'와 나의 '기준'이 충돌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나름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해석한다." (758) 이것이 불화의 또 하나의 근원인 듯하다.
"만일 그녀들이 어머니에게 저항한다면 영원한 투쟁이 두 사람을 대립시켜 놓을 것이다. 그리고 버려진 어머니는 딸의 불손한 독립적 태도에 대한 분노를 대개 사위에게 터뜨린다." (760) 여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실제 예를 알고 있다. 한 치도 틀림이 없다. 투쟁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관계.
"어머니가 폭군도 되지 않고, 잔인한 인간으로도 변하는 일 없이 자식들의 생활에서 행복을 발견하려면, 관용과 무관심의 흔치 않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760) 이것이 얼마나 여려운 일인지... 관용과 무관심의 흔치 않은 조화, 표시나지 않게, 태연하게, 아아 또다시 의도치 않게 가면을 써야 하는 일. "경험만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767) 는 말은 옳다.
생각해 볼 문장 :
"문학은 기획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말을 건넬 때, 독자들이 보다 넓은 식견을 향하여 행동하도록 도울 때 그 의미와 품위를 지닌다. 여자도 인간행위의 움직임과 일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여자는 책과 예술작품을 삼켜서 그것을 자기 안에 깊이 묻어 버린다." (765) ( * 일반적인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제6장 여자의 상황과 성격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여자의 성격과 상황을 정리하는 장이다. 아래의 구절로 대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저기 사회에 숨어있는 화두를 건져올려 하나씩 건드려주는 보부아르 언니의 센스! (센스 아니고 사유의 깊이이겠지만 여기서는 센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여자'라는 성을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남자'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우수하다든가, 열등하다든가, 혹은 동등하다든가 하는 것을 결정하려는 모든 비교론이 어째서 무익한가에 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만일 이런 상황 자체를 비교해 본다면 남자 쪽이 무한히 유리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남자는 세계 속에 자기의 자유를 투사하는 훨씬 더 구체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남성의 자아 실현은 여성의 경우보다 훨씬 훌륭하게 나타난다. 여자들에게는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저마다의 한계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유를 행사하는지를 비교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은 그것을 저마다 자유로이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의에 찬 함정이나 성실을 가장한 기만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남녀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자유는 완전히 각자에게 있다. 다만 여자에게는 자유란 다만 추상적이며 공허한 것이므로 여자는 저항의 형태로밖에 자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떠한 가능성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저항만이 유일하게 열려진 길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한 상황의 한계를 거부하고 미래의 길을 여는 데 노력해야만 한다. 체념은 책임에 대한 포기이며 도피이다. 여자 스스로 자기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해결방법이 없다.
이런 해방은 오로지 집단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 쪽에서 경제적 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 (802)
생각해 볼 문장 :
"여자에게 시간은 새로운 차원을 갖지 않는다." (770)
"여자에게는 기생의 역할만이 할당되었다. 모든 기생하는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착취자가 된다." (787)
"그녀는 남자의 하인이지만 자기를 남자의 우상이라고 믿는다. 자기의 육체로는 굴욕을 겪으면서 그녀는 '사랑'을 찬양한다." (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