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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나라들
토니 휠러 지음, 김문주 옮김 / 컬처그라퍼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론리 플래닛의 창시자 토니 휠러는 역시 다르다. 베테랑답다. 누가 뭐래도 그는 여행계의 제왕이다.
그의 책은 대단히 압축적이다. 한 달 정도 여행을 다녀와서 책 한 권을 뚝딱 써내는 요즘의 세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론리 플래닛 스토리>라는 책만해도 그렇다. 그의 전생애를 기술한 듯한 그 책을 읽노라면 호흠이 가빠지고 머리도 묵직해지는 것이 골치아픈 숙제를 하고 있거나 좀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를 안고 끙끙거리는 듯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원서도 아닌 번역서를 읽는데도 원서 만큼이나 머리가 지끈거리고 힘겨웠던 기억이 난다. 자세하게 풀어 쓴다면 5권 이상은 족히 나올 분량을 한 권에 담았으니 지식과 경험이 짧은 독자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든 책이었다.
그래서 이 <나쁜 나라들>이란 책이 나왔을 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지만 겁도 났다. 토니 휠러의 책은 만만하게 읽는 책이 여행서라는 나의 기본 관념에 정면으로 맞서기 때문이다. 여행서가 만만치 않다는 건 사실 괴로운 일이다. 너무 만만해서 내용, 사진, 글 등이 하나도 건질 게 없는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여행서도 그 가벼움에 치가 떨리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은 여행서도 약이 올라서 혈액 순환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다.
다행이었다. 이 책은 약간 숨이 찰 정도의 긴장감만 유지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리비아, 버마,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이라크, 이란, 쿠바.(한 나라에 한 권씩 할애한다면 9권의 책이다. 역시 토니 휠러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이다. 대단히 흥미진진한 대리 여행 경험이다. 각 나라의 현대사가 간략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고 기타 흥미로운 이야기도 적절하게 풀어놓아 모처럼 뿌듯한 책읽기가 되었다. 때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순간 한숨과 탄식으로 변하긴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나니 당분간 여행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여행이 너무 안일하고 소비적이고 보잘것 없고 무엇보다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읽은 <Children of Jihad>에서도 내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는데 이 책은 거기에 덧붙여 확실한 확인사살을 하고 있다. 제길...왜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지...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나쁜 나라들'을 읽다보면 또 하나의 거대한 나쁜 나라가 든든하게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은연 중 깨닫게 되는 기쁨이랄까 발견이랄까, 하는 경험을 하게된다. 바로 미국. 그 원인의 한 부분에 미국이 자리잡고 있음을 이 책은 확실하게 보여주고있다.
p.300 ..CI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각국의 지도자를 전복시키고 미국 편에 서 있는 인사를 끌어다 앉히는 일에 두각을 드러냈다. 1960년에는 콩고의 파트리체 루뭄바가, 1973년에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차례로 낙마했다. 또한 1966년에는 CIA의 주도 아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해임된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분노를 토했다. 이런 이유로 이란 국민들은 그간 숱한 정치적 음모의 방패막이 되어준 미국 대사관이 혹여 혐오스러운 샤를 또 다시 끌어들이려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여간 악의 축 중심에는 늘 미국이 있다.
보통의 뉴스와 정보만으로는 그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세계 정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부러움과 절망감으로 여행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하지만.....
그러나 이 두 곳만은 꼭 가보고 싶다. 국민 4명당 1개 꼴로 지어졌다는 버섯모양의 벙커가 널려있는 '안으로 나쁜 나라'인 알바니아와 이라크의 알 라시드 호텔이 그곳이다. 미군의 크루즈 미사일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이 호텔이 조지 부시 초상화를 로비 바닥에 깔아서 이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만들었는데, 미국은 이 모자이크 초상화의 책임자였던 레일라 알아타르의 거주지를 두 번이나 폭격해서 끝내 보복을 했다한다. 이미 이 초상화 또한 미국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그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