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길을 걷던 중 동네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웬 서양인 노부부가 지도를 보며 지나가는 10대 아이들에게 뭔가를 묻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별 도움이 안되는 아이들이 금세 휑 지나가버리자 노부부는 다시 안절부절한 상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May I help you?"

 

동네에 있는 호텔(모텔)을 찾고 있었다. 음, 이런 곳을 찾는 외국인이 있다니, 내심 놀라며 스마트폰으로 지도 검색에 들어갔다. 우리 동네에 호텔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게 호텔 밀집 지역이 눈에 잡혔다. 가까운 거리였다. 20여 년 동안 이사 한번 안 다닌 우리였지만 동네 호텔은 낯설었다.

 

영어에서 손을 뗀지 몇 개월 되었더니 마침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알아낸 내용은 이렇다. 남자분은 69세, 여자분은 66세. 여자분의 전 직업은 영문학 교사. 한국 방문 목적은 뉴질랜드 검도팀 소속으로 있는 아들을 보기 위해서. 뉴질랜드 웰링턴 외곽의 주민이 많지 않은 동네에 살고 있다며 빼곡히 들어찬 상가와 아파트로 이루어진 우리 동네를 가리켜 어메이징하다며 놀라워했다. 몇 마디 나누다보니 금세 호텔에 도착했다. 너무나 고마워하는 이분들, 휴대폰을 꺼내며 기념사진을 찍잔다. 우리부부와 남자분을 여자분이 찍고, 이들 부부와 나를 남편이 카메라에 담았다. 후후훗. 절로 나오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후, 카카오톡으로 친구들에게 남편이 찍어준 사진과 메세지를 보냈다.

 

"외국같지?"

 

심심하던 친구들은 과한 반응을 보이며 재미있어했다.

 

다음 날 오후. 카카오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앗! 이 노부부 사이에 친구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4호선 전철안에서 우연히 이분들을 보았단다. 내가 보낸 사진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 말을 걸고 사진을 함께 찍었단다. 우연에 놀라워서 큰 소리로 말하다보니 전철안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더라는 말과 함께. "What a small city!" 라던 노부인의 말도 전했다. 세상이 이렇게 단번에 좁혀질 수 있구나 싶었다.

 

무료했던 일상에 이런 우연은 작은 설레임이 되었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 이 노부부와의 우연한 해후를 기대하며 남편과 길을 걸었다. 이번에 다시 만나면 밥이라도 함께 먹자며 이분들이 묵고 있는 호텔 주변을 바라보며 걷고, 혹시 호텔 근처에 있는 마트에 나타나지 않을까싶어 마트에 들러 바나나 따위를 사기도 했다.

 

이 노부부의 방한 목적으로 인해 '제17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된다는 사실과 이 대회가 열리는 체육관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육관은 걸어서 1시간이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어제 오후 세계검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곳을 찾았다. 평소에도 무슨 대회가 있거나 콘서트가 있는 날이면 체육관 주변은 온통 주차된 차량으로 넘쳐 흘렀는데 아니나 다를까. 겨우 차를 주차하고 살짝 뿌리는 빗속을 걸어 체육관으로 향했다. 자유석 5,000원 하는 입장료에 잠시 주춤하다가 그래도 우리 동네를 살리는데 협조하자며 표를 끊었다. 혹시 그 노부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잠시 있으려니 갑자기 관중석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검도의 'ㄱ'자도 모르니 왜들 환호성을 지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도복을 입고 결전(?)에 임한 선수들의 자태와 절제된 몸짓이 멋져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검도 대회를 보는 건 처음이어서 다소 흥분이 되기도 했다. 흠, 자고로 스포츠는 보는 게 아니라 직접 내 몸을 쓰는 게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이니라, 하던 내 평소의 지론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체육관에 입장한 지 5분도 안 되는데 어서 나가자며 출구로 향하는 남편.

 

무슨 얘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지?

 

단 한 번의 사소하고 우연한 만남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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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8-09-17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아름다운 우연이네요.

nama 2018-09-17 13:04   좋아요 0 | URL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신나면서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2018-09-17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7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8-09-17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어제 저 경기장 근처 갔었어요.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요. 고속도로에선 막히지 않더니 고속도로 벗어나 인천에 들어서서 예식장까지 꽤 막히더라고요.
뉴질랜드에서 한국까지, 정말 먼거리 여행을 오셨네요.

nama 2018-09-17 13:08   좋아요 0 | URL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셨을 수도 있었겠네요.^^
어제는 저 체육관 일대가 대단해서 더 했을 거예요. ‘세계..대회‘라는 게 실감났어요.
 

 

10대와 20대를 보낸 동네.

일찍이 피자가 시작된 곳.

골목 골목에 친구네 집이 있었다.

우리는 '국제도시'에서 살고 있노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어느 주차장에 있는 건물 뒷모습. 몇 년 전부터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곳.

 

 

 

 

 

 

고향 방문만큼이나 즐거운 스마트폰 앱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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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9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09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못가의 꿩은 열 걸음 가서 한 번 쪼아 먹고, 백 걸음 가서 한 번 물 마신다. 새장 안에 갇혀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록 왕 같은 대접을 받는다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192쪽)

 

 

 

 

 해설은 이렇다.

 

'모든 존재자는 각기 나름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중략)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고, 새는 창공을 날고 있을 때 자유롭다. 바로 그런 환경, 즉 자득지장에 거할 때에야 비로소 모든 존재자는 자신의 본성을 자유롭고 활달하게 실현하며 생명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세상에는 혼자 묵묵히 무언가를 연구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여러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사업을 도모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작더라도 '자기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넓은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물질적인 부를 누려야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인 부유함을 더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이 안쓰럽게 보인다고 해서 그 반대의 행복을 안겨주려 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되레 큰 고통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자신의 본성에 어울리는 곳, 자신의 마음이 편한 곳에 거해야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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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사진이 넘 멋져요~

nama 2018-09-07 06:5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산책하며 종종 보곤 하는데 사진으로 담기에는 역부족이랍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848503.html

 

 

영화 <남한산성>에 흐르던 음악을 작곡한 사람. 이 사실도 최근에 알았으니 이 분에 대해서 감히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거의 백지 상태에서 이 작곡가의 전시회를 보러갔다. 전시회? 이걸 전시회라고 해야 하나?

 

수조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파동으로 미세하게 퍼져나가는 물의 흐름, 천장에 매달린 수조에서 연출되는 현란하면서도 원초적인 빛과 물의 세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궁극의 사운드...이런 것들을 전시하고 있으니 전시회는 맞는데 단순하게 전시회라고 하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본의 가레산스이 양식의 정원이 내내 떠올랐다. 물을 사용하지 않고 모래와 돌 등으로 산수의 풍경을 표현하는 정원 양식으로, 대표적인 곳으로는 교토의 용안사가 있다.

 

 

 

물 없이 물을 상상하는 공간이 가레산스이 양식의 특징이다. 물은 없지만 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특이한 공간이다.

 

 

어제 본 류이치 사카모토의 어떤 작품에는 오롯이 물만 있었다. 캐고 또 캐어든다면 이 예술가의 물을 향햔 천착이 이 가레산스이 양식과 닿아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제약회사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피크닉'은....멋진 곳이다.

 

 

 

피크닉 입구

 

 

 

 

 

 

 

피크닉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

 

 

 

피크닉 옥상에서 바라본 남산 타워.

 

 

 

소리의 끝, 물의 끝, 그리고 빛. 잠시 속세를 벗어나 원초적인 세계에 젖어들다 온 것 같다.

 

 

하나 더.

점심 무렵이라 끼니를 해결하고자 이 동네에 있는 허술한 밥집에 들어갔다. 대부분 5,000원 내외의 저렴한 가격의 음식이지만 깔끔하고 맛도 좋았다. 15,000원 하는 전시회 입장권이 무섭다면 밥은 이곳에서 해결해도 좋을 듯하다. 회현역 4번 출구에서 피크닉이 있는 언덕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오른편에 있다. 동네분이 적극 추천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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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9-0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어제 류이치 사카모토 다큐멘터리 봤는데 좋더군요.
그거 보기 전에 전시회부터 가 보라는 사람도 있던데
전시회가 좀 특이한가 봅니다.

피크닉이 회현역이 있나 보죠?
가보고 싶긴 합니다...^^

nama 2018-09-06 15:50   좋아요 0 | URL
영화 보셨군요. 보고 싶긴한데 접근하기가 쉽지 않네요.
전시회가 좀 특이하긴 해요. 바닥에 앉아서 보기도 하고, 누워서 보기도 해요.
누워서 보다가 깜빡 잠이 들기도 하고요.^^
재밌습니다.
 

 

폭염이 한풀 꺾이고나니 이젠 좀 걸을 만하다. 걸을래? 책 읽을래? 묻는다면...일단 걷고본다.

 

 

 

 

 

일주일간 읽은 책 리스트 대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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