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책동네>코너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고 구입했다. 미국 문화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미국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읽고자 했다. 미국을 통해 우리 모습을 제대로 볼 수도 있으니까.
리뷰를 쓰기엔 역부족이어서 그냥 마음에 드는 부분을 옮겨 본다.
p.173....미디어의 영향력이 강화되기 시작한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회 공적인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과 참여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휴식이나 오락에 치중함으로써 시민들을 사회적 이슈로부터 고립시켜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락'이란 흥미위주의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보도 프로그램조차 '쇼'의 한 형태로 오락화하고 있으며...무거운 사회적 이슈보다는 가벼운 오락을 다루기 좋아하는 것은...돈 때문이다.
p. 184...정치권력보다 상업권력이 현대 민주주의를 더 크게 위협한다.
이 당연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tv에 정신줄을 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tv를 보면서 그 숨은 의도를 끊임없이 찾느니 차라리 tv를 꺼버리는 게 낫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p. 222..."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 이 주장을 서구 사회에서는 감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무엄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인재'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밥벌레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터전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 '인재'들이 속한 교육기관에 물적, 인적 토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사주고 투자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공급해 주고 있다. 오히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수사학이 차원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기업과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이 사회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그들의 얻은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되돌려주어야 할 빚을 갚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민들이 한 달만 물건을 사주지 않아도 도산할 기업들이 도리어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고 주장하거나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육기관들이 지역 주민들을 이방인 취급해오지 않았던가. 감사의 주제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상식이 되다시피 한 말이다. 아이들 입에서도 나오는 너무나 귀에 익은 구호다. '소수의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주문을 건다. 비판 능력을 기르기 전부터 우리는 "소수의 인재'에게 고마움을 먼저 배운다. 그들을 동경하며 우상화한다.
p. 227...'엘리트주의'란,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위계로 착각하는 오류이자 감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감사를 요구하는 무례함에 지나지 않는다.
p.229.. 미국의 학교와 기업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베풀고 헌신하는 것은 마음이 관대해서가 아니다. 그들 자신이야말로 사회의 가장 큰 수헤자임을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귀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과 이른바 '엘리트'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언제나 이런 세상이 올까마는.
또 하나. 유대계 미국인들의 정치성향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있는데, 미국 내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혐오한 이유도 그들의 종교와 개혁성향이었다고 한다.
p. 170...히틀러의 주요 정책기조는 '반유대주의' '반공' 그리고 '우익'이었다. 이런 나치 지도자의 눈에 유대인들은 이념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빨갱이'로 보였다. 미국에서도 파시스트적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유대인들의 진보성은 반유대주의적 차별의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관한 내용.
p.191...미국의 기독교인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전쟁에 더 큰 지지를 보내고, 미국의 군사력 확대를 더 선호하며, 환경보호정책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비종교적 부분까지도 우익 정치인들과 성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기독교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인용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피곤한 일이다.
p. 196...한국 교회 대다수의 관심사는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초대형 건물을 짓고 교인 수를 늘리는가다. (마이클 메커티어, '아시아에서 가장 기독교가 번성한 나라')
이런저런 내용을 옮기다보니 우리 나라의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참으로 뻔뻔하고 몰염치한 사람들이라는 '뻔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서 읽은 글이 떠오른다.
'때때로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민을 권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예를 들어, 대통령 관저 대신에 작은 농가에서 기거하며 손수 요리와 청소를 하고, 가난한 국민 다수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고집하는 철저한 공화주의자 호세 무히카 대통령이 있는 우루과이 같은 나라로 말이다.'( 김종철 <정치의 실패, 아이들의 죽음>에서, 2014, 5.7 한겨레신문)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511/pimg_7872701831009889.jpg)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사진으로 만든 부시의 몽타주)
(호세 무히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