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오늘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기사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426422.html 

오는 7월 13,14일 양일에 걸쳐 치러지는 소위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를 준비하는 일선 학교의 모습이다. 

이 시험을 대비한 일종의 모의고사가 5월에도 있었다. 이름하여 '2010년 중학교 양질의 평가문항 개발자료'라는 묘한 이름의 시험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70점 만점에 평균이 30점을 넘지 못했다. 시험이 끝난  어느날 교감이 인터폰을 했다. 70점 만점에 10점대인 학생이 백 몇명이라며 잘 좀 가르쳐달란다. 학년 전체가 480여 명이 되니까 1/4 정도가 되는 셈이다. 황당하고 화가 났지만, 그래도 나이 든 선생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차린 어투라는 것을 알고는 그냥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자체 학교 평가에 들어간다. 옆 학교들을 탐문하여 우열을 가리며 일희일비하며 국영수사과 선생들을 볶아치기 시작한다. 평수가 넓은 아파트 동네에 위치한 학교들의 점수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우리 같이 임대아파트 지역의 학교들은 점수가 떨어진다.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의고사의 수준은 한마디로 내가 가르치는 교과서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요구한다. 이건 중3짜리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의 선행학습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고등학생이 치러야 할 법한 문제들이다. 물론 전교 등수를 다투는 아이들은 도전해볼 만하다. 상위 1%를 위한 시험이랄까.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열패감만을 안겨주는 이런 시험을 치르게 하는 이유는 뭘까? 학습부진 학생을 가려내기 위해서? 학생들의 질좋은 실력 향상을 위해서? 좀 솔직히 말하면, 선생과 학생을 길들이기 위해서?

따질 틈도 없이 다시 7월에 치러질 시험을 위해 비상 체제에 들어간다. 6월 들어서자 교과서를 전폐하고 기출문제 풀이에 들어간다.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느냐, 는 아이들에게 해줄 말도 준비되어있다. '어차피 이 과목은 교과서 공부가 별 의미가 없다는 거 너희도 알지 않느냐. 그리고 몇 개월 후에 너희가 고등학생이 되면 다 알게 될거다. 중학교 때 어느 정도 수준 있는 걸 공부해놔야 고등학교 가서 덜 헤매게 된다. 그러니 미리 맛보기쯤으로 생각해라.'라고. 궁색한 변명이다. 

학교에서 지각생을 바로 잡는다고 반별로 지각생 명단을 만들고 벌점을 부과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행하면 - 심지어는 지각생의 많고 적음을 교사 성과급에 반영한다는 웃기는 말까지 나왔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교사와 학생에게 미치기 마련이다. 

매사 이런 식이다. 토끼 몰이에 길들여진 교사들은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 토끼 몰이에 나선다.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학교를 불신했다. 그런 내가 교사가 되어 나를 가르친 선생들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그저그런 선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번, 가수 웅산의 콘서트에 갔을 때, 그녀는 무대에 선 지 10년 되었다고 했다. 그 10년의 세월이 그녀의 노래에 담겨 있었다. 한가지 일에 10년을 바치면 쌓이는 게 있기 마련인데....교사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 참 쓸쓸해진다. 10년, 20년 지나면 뭐하나. 남는 거? 별로 없다. 험악해진 인상과 걸죽해진 목소리 뿐이다. 실력은 갈수록 바닥을 드러낸다. 교사는 소모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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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책을 구입할 때 나름대로의 원칙 같은 게 하나 생겼습니다.
<Thanks to>를 클릭하여 얼마간의 적립감을 쌓잖습니까?  그럴 때 <구매자>라고 표시된 서평에 더 신뢰감이 가게 되더군요. 특히 서평단의 글은 일단 배제하고 보는 거지요. 칭찬 일색의 글은 신뢰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짜로 받는 책 한 권에 대한 보답성 글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됩니다...이런 글 남겨서 득 될일은 별로 없겠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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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재즈 가수인 웅산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45명의 중3짜리 아이들을 데리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선 오늘 2년 마다 있는 맞춤장학이 있는 날이었다. 일종의 학교 평가 같은 건데 더불어 학부모 공개수업까지 있었다. 두 학급 콘서트 관람건을 제의한 옆 선생(20여년 지기)을 따라 이 공연 관람을 준비한 것은 지난 4월 부터였다. 물론 미리 구두로 교감한테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5월에는 일찌감치 예매까지 마쳤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학교의 큰 행사인 맞춤장학과 날짜가 겹쳤다. 맞춤장학 날짜가 발표된 것은 6월 초였다. 예술회관은 거기대로 사정이 있어서 환불은 불가능하다 하고, 학교에선 교감이 절대 불가하다고 끝까지 결재를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힘들게 다녀왔다. 

줄거리는 이렇게 단순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참 여러번 한숨을 토해내고 달갑잖은 회의에 빠져 들곤 했다. 학교 행사와 날짜가 겹친다는 이유로 절대 불가를 외친 교감은 내부결재를 낸 옆 선생을 몇번씩이나 오라가라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보다못해 아니 견디다못해 이번에는 교장한테 가서 사정을 말했다. 허락이 떨어졌다. 교장의 허락에도 불구하고 교감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또 오라가라 했다. 다시 교장한테 갔다. 역시 허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감은 우리가 기안한 출장 신청에 끝까지 사인을 하지 않았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지만 별 수 없다. 교감은 교감의 길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서로 인정할 뿐, 필요 이상의 감정 낭비는 없어야 하는데...글쎄 내가 교감이라면 어떨까? 앞으로 그럴 일이 전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왜 그런 불편한 길을 걸어가려고 아우성들인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녀온 콘서트는...훌륭했다. 아이들이 지불한 5,000원(학교에서 나오는 학급운영비로 개인당 2,000원을 쓸 수 있으니 합계 7,000원이 들어갔다.)이 절대 아깝지 않은 공연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언제 재즈 음악을 들어보길 했을까. 나 역시 그렇고.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일인가를 벌인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오늘도 그랬다. 주의를 그렇게 주어도 티켓을 분실하지 않나 교통 카드를 잃어버리질 않나. 그것도 교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절대로 뛰지 않는 게으른 녀석들을 다그쳐 겨우 도착하니 이미 공연은 시작되었다. 두 곡이 끝나 겨우 입장할 수 있게 되어 뒷좌석에 겨우 앉을 수 있었는데, 가수의 얼굴 윤곽만 겨우 보이는 거다. 

웅산의 노래에 빠져들다보니 눈물이 찔끔 나온다. 옆 자리에 앉은 우리반 녀석들 생각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할 수 있는 게 재즈구나, 싶었다. 긴장된 몸과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지만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남겨두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게 재즈구나, 싶었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우리반 남학생 녀석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행복합니다. 

 
   
   
  다음에 또 오죠.  
   
정이 없는 부부들이 흔히들 '자식 때문에 산다'라고 하듯 나는 '학생들 때문에' 선생질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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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박사 2010-06-16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힘내세요!~~
화이팅!!!~~~(^^)
 

지지난 월요일 아침(5월3일) 다른 식구들이 모두 먼저 나가고 나도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열쇠 꾸러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키 하나 없는 소박한 열쇠 꾸러미였다. 다른 열쇠는 둘째치고 당장 집을 나설 수가 없었다. 출근 시간은 시시각각 임박해오는데 문을 잠그고 나갈 수가 없었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가슴이 조여오면서 정신마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출근 시간을 넘기고야 말았다. 이미 출근한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나를 집에서 꺼내주기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와 역시 열쇠가 없어 집에서 나올 수 없는 경우(꼭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중 어떤 것이 더 힘들까? 집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열쇠공을 부르면 되겠지만, 나올 수 없을 때는 도움을 청할 데가 없다. 집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집을 대신 봐주지 않는 한 집에서 나갈 방법은 없다. 문만 열면 밖인데 밖으로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 악몽 같은 경험이었다. 

지난 월요일(5월10일). 며칠 전 집을 나갔던 한 녀석이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싸이월드에 글을 남겼다며 녀석의 친구가 담임인 내게로 달려온 것이다. 녀석의 친한 친구들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다급한 김에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한 친구녀석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녀석 찾기에 돌입했다. 자주 들락거린다는 피시방을 집중 공략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의 화장실까지 살펴보고 다니자니 입은 바싹 타오르고 가슴이 계속 조여왔다. 이 일을 어쩌나.... 

내가 녀석의 친구와 함께 있다는 걸 눈치 챈 녀석은 끝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돌아왔다. 얼마 후 학년 부장 교사와 총무를 맡은 교사가 나서서 찾아보았으나 역시 허탕을 쳤다. 학생 부장, 교감,교장 한테 보고가 되고 여러 대책 끝에 또 한 번 학년 부장과 총무 교사가 나섰다. 오후였다. 운전 면허조차 없는 내 초라함과 무능이 그대로 부각되었다. 

결국 녀석을 잡아왔다. 녀석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고 착잡했다....곧이어 부모가 왔고, 간단한 진술서를 쓰게한 후, 녀석을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눈물이 났다.

이틀을 쉬고 어제부터 등교하기 시작한 녀석은 아직도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 뿐 아니라 학교 자체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 듯하다. 녀석은 싸이월드에 미리 써놓은 유서에서 "낙이 없다"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녀석에겐 낙이 없어 보인다. 공부, 외모, 집안 형편...뭐 하나 신통한 구석이 없다. 존재감이 없는 녀석은 '보이지 않는 인간'처럼 그저 하루 하루를 별 의미없이 흘려보낼 뿐이다.  

훈계조 일색인 상담은 나도 하기 싫어서 못한다. 선생 앞에서 주눅들기 일쑤인 녀석을 상담 혹은 대화랍시고 앞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녀석은 내게는 자폐아와 다를 바 없다. 마음을 꽉 닫은 상태에서 내가 녀석에게 늘어놓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냥 눈치를 보며 기다릴 수 밖에.

열쇠를 잃어버려 집 안에 잠시 갇혔었던 열흘 전 일이 녀석과 자꾸 겹쳐진다. 녀석에겐 세상에 나올 열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에겐 '되는 게 하나도 없는' '포기'하고 싶은 세상이다. 녀석이 절감하는 절망감을 교사인 나는 도저히 알아내지 못한다. 절망감에 자살을 생각하는 녀석 앞에서 나는 무능하고 무력하다. 

성과급으로 선생을 농락하는 세상에서 나는 기꺼이 C급 선생임을 인정한다. 아이들 마음 하나 열지 못하는 나는 C급도 황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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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에 자식이 여럿 있으면 모두 같은 크기로 다가올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한다.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려서부터 그 점이 늘 궁금했다. 지금의 내게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뿐이어서 이 역시 알아볼 기회가 없다. 그러니 그저 생각을 할 뿐이다. 

해마다 담임을 맡고 있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같은 크기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몇 년은 커녕 일 년만 지나도 아이들 이름이 가물가물해진다. 심하게는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 되면 기억 속의 이름들을 불러내느라 명렬표를 보고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증세가 심해진다. 

그러나 첫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내게 영원한 아이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991년, (내게는 기구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교직이라는 직업을 내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처음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다. 어제 학교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그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어제. 하루 중 유일하게 빈 시간인 3교시 때. 약간 망설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1991년 1학년 13반 학생, 박...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기억하느냐고 물어온다. 일종의 통성명이 필요했다. "얼굴이 좀 넙데데하고, 혹시 부친이 안기부에 근무하시지 않았나...?"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와서 지금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간 키도 많이 자라서 183cm라고 한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전에 살던 동네에서 사신다고도 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얘기에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탠다. 누구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사춘기 소년 시절이라서 그랬을 거라며 뉘우치는 말을 하며 멋쩍어한다. 언제 그랬던가? 난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갈등이야 그건 그저그런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쑥스러워한다. 아, 어른이 되었구나!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거리라거나 식당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때 나는 당혹스럽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그저 학교에서만 불리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제자들 때문에 나는 계속 선생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게 난 정말 부담스럽고 황송하다. 

간혹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제자들 중에 나한테 꾸중을 많이 들었던 아이들을 만나게되면 나는 굉장히 부끄러워진다. 겉으로야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그땐 왜 그랬을까. 나이가 들면 제 몫을 잘 해내는 어른이 되는데... 

박...야, 미안한 마음 품지 말아라. 나도 너희들 보면 미안해진단다...는 말은 못했지만 너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는다. 너희가 내게 첫아이였듯 내가 너희들에게 첫 선생님으로 기억되어 이렇게 멀리서 전화 한 통 걸어주니, 너희들의 사랑이 내 사랑보다 훨씬 크단다. 고맙고 고맙다.  

어제는 정말 황홀한 하루였다. 첫사랑이 살아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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