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마음이 들떴다. 아이들에게는 악몽같은 시간이지만 교사에게는 모처럼 한가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평일에 꽉 묶여서 사는 건 재미없는 인생이다. 병원이나 은행 용무를 보는 것도 일일이 결재를 받아야하니, 시험기간에 일찍 퇴근해서 카페 같은 데라도 앉아 있으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 시간에 그 공간에서 여유를 즐기는 뭇 무리들을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곤 한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 시간에 이곳에 와있나 하는 의문과 함께.

 

작은 일탈의 즐거움을 주던 시험기간이 이제는 거의 악몽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전년도와 같은 문제를 출제해도 안 되고, 문제집을 베껴도 안 되는 출제시 준수사항을 시작으로 혹시나 출제실수를 한 경우에는 마음고생이 육체적인 고생으로 이어진다. 교실마다 다니며 문제수정을 해야 하는데 그 민망함이란...채점을 하고 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채점기준표에는 미리 아이들의 답을 예상해서 이러저러한 답을 인정하는 기준을 마련하는데 그게 절대로 각본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기발하다고 해야 할 지, 기가 차다고 해야 할 지, 늘 변수가 화려하게 난무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문제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는 녀석이 있었다. 교사 3명의 공동출제와 검토를 거치고 가족에게도 협조를 구해 오류를 잡아내고, 그러고도 문제가 있어서 다 끝낸 인쇄를 다시 수정해서 인쇄를 하는 등 나름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거의 완벽하다고 내심 의기양양했는데 어떤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를 제기한 아이는 상위권 학생이 아니었다. 이 아이가 지적한 것은 자연스러운 대화의 순서를 정하는 문제였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럴 듯도 했다. 마지막 두 문장을 바꿔 써도 말은 통하는 듯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하는 대화라서 이 아이의 말대로라면 제안을 하는 사람이나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 되어버린다. 이 아이는 이 문제로 삼 일 동안이나 끙끙 앓았다. 나도 처음에는 채점에 생활기록부 기록에 정신이 없어서 대충 설명했는데 이 아이는 끝까지 납득할 수 없다며 내 설명을 요구해왔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는지 옆에는 늘 친구를 대동하면서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다. 평소에도 자기 표현을 별로 하지 않는 얌전한 아이라서 이 당찬 모습에 좀 놀라기도 했다.

 

자신이 납득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이 아이의 단호한 태도에 나도 차츰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당황스러운 반응을 귀신같이 눈치 챈 이 녀석은 순간적으로 탄력을 받으며 나의 목을 점점 더 죄어오는 듯 싶었는데...<미생>에 나오는 세기의 대결 바둑판이 떠오르면서 나도 게임에 빠져들었다. 이 난국을 어찌 헤쳐나간다...이 뻔한 문제를 이해 못하는 녀석이나 이 뻔한 문제를 이해 시키지 못하는 나나...결국은 게임이군.

 

결국은 논리적으로 아이를 납득시켰다. 물론 아이는 결과에 승복하면서도 문제에 문제가 있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뒤돌아서며 가는 얼굴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미 뒷모습을 보인 녀석에게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끝까지 따지는 건 잘 했다."

 

승리자의 기쁨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평소 나약하고 순응적으로만 보였던 아이에게서 이런 당찬 모습을 발견한 기쁨이기도 했다. 비록 너는 이 문제에는 틀렸지만 인생살이에서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당차게 살아라, 민주야. 이름처럼 살거라. (우리 반에는 성을 달리한 '민주'가 세 명이나 있다. 그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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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12-2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요하게 따질수 있도록 들어주는 선생님께도 저는 박수를 보냅니다 ^^
이런 아량과 관용과 인내가 절실한 요즘이라서 더욱 큰 박수를요.

nama 2014-12-20 14:52   좋아요 0 | URL
통합진보당 뉴스에 답답해서 써보았습니다.
오늘 어떤 책을 읽는 중인데 `별을 모두 본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는 없을까.`하는 구절이 내내 머릿속에 남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4-12-20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생은 다른학생과는 달리 그 문제를 다음에는 틀리지 않을 것 같구요, 좋은 기억으로 두분께 남았으면 좋겠네요,

nama 2014-12-20 14:57   좋아요 1 | URL
이런 과정을 겪는다고 해서 달리 나빠지지도 않아요. 제가 이 아이를 인정하듯 이 아이도 저를 인정하리라고 봐요.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이런 일이 불편하지만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 뿐, 이런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세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요.

수이 2014-12-20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끝까지 따지는 건 잘 했다_ 맞아요. 멋진 학생이네요. 그리고 그 학생이 커서 어른이 되면 더 멋진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nama 2014-12-20 18:59   좋아요 0 | URL
이런 경우 요즘엔 부모들이 극성스럽게 전화를 걸거나 찾아오거나 하는데 이 학생은 끝까지 자기 목소리로 주장했어요.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이 아이가 더 기특해요.

qualia 2014-12-2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아~ 멋지네요.
학생 아이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왔다면
서투르고 좀 어설픈 논리라 해도 정말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nama 님은 아이가 주장한 논리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고칠 점도 가르쳐주고 격려도 해주시고
오와, 정말 멋진 장면인데요~ ^^
그 학생 아이한테 기를 살려주는
nama 님의 따뜻한 격려 말씀 정말 훈훈하네요~

nama 2014-12-20 19:06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저도 좀 윽박지르는 쪽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그렇게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사도 학생과 더불어 성장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