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무대 위의 신, 무대 아래 인간에게 내려오다

 빠듯한 시간을 쪼개서 파르나소스 산으로 뮤즈 9자매를 찾아갔다. 물론 보다 권위 있는 음악의 신은 아폴론이지만 그에게 음악을 청하기에는 부족함 점이 많기에 일단은 9명의 미녀 선생님들에게 예술의 기본을 전수 받기 위해서였다. 포근한 서늘함을 드러내는 초가을 달빛을 타고 내려오는 곡을 들으니 낯이 익었다. 바로크 시기 작곡가인 파헬벨의 『캐논 D장조』다. 두드리는 악기의 강렬함이 없이 그저 몇 가닥 줄을 따라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그 선율이 언제까지라도 내 귀와 마음을 적셔주겠다는 듯 쉬지 않고 변한다. 3대의 바이올린이 저마다 다른 성부(聲部)로 같은 주제의 선율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연주하는 음악 속에는 그들, 그리스 신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자리할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지상에서의 영속성을 부정할 때가 많지만, 달빛에 실려오는 영원함에의 자신감이 그리 싫지 않다. 그 선율 뒤에 자신들의 무궁(無窮)한 영광을 뽐내는 그리스 신들의 변주곡이 숨어있으니 말이다. 같은 듯 하면서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선율을 지탱시키는 너무도 정교해서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질서는 바로 그리스 신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주제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용. 신들의 왕 제우스도 이상적인 남성의 결정체인 아폴론도 그리고 사랑의 기억을 흩뿌리며 날아다니는 에로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분명 올림포스에 머물던 고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숨어있다. 우리가 그들을 찾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이 사라졌다고 단정하는 이유도 그들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재주 탓이다. 때로는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러한 변신에도 분명 하나의 주제는 있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라는 주제 말이다. 신으로써의 권능에 상관없이,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이상의 인간다움을 추구했다. 신이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닌 존재인 이상, 신성(神性)의 소유는 결국 인간에게도 개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신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강림하는 신들의 모습보다도 그런 신들을 대신해 신들의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인간의 절대성이었다.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 그리고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영웅 헤라클레스까지 그들이 바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의 극치를 저마다 대표하고 있었다. 인간을 초월해야 할 신들에게 인간의 성품을 부여한 이유는, 결국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그 자신뿐이라는 드높은 자부심의 발현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올라오는 인간을 대신해서 그리스의 신들이 땅 위에 현현했기에 중세이래 전 서양을 지배한 기독교 아래서도 인간의 정신은 닫히지 않았으며, 천년의 시간을 보내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온전히 부활할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음으로 해서 예술은 외롭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주어진 예술의 자유 속에서 소재의 빈곤에 고민하던 예술가들을 도와준 이는 하늘로 오르는 인간이 아니라 이 지상의 삶과 예술을 즐기는 그리스의 신들이었다. 로마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의 벨베데레 궁에는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미 고전이 된 미남자의 표상, 아폴론 상이 있다. 항상 지상에 그 시대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그는, 같은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르네상스 시대의 자신의 분신을 만들었다.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그 마지막 날을 주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뜻밖의 행운으로 찾아간 로마에서 아폴론 상과 최후의 심판을 보았을 때, 책이 들려준 두 절대자의 하나 됨을 수긍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느꼈다. 천년 동안 하늘에 군림하던 신을 인간에게로 모셔 온 르네상스의 힘과 그 시대를 만들어 간 인간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빌려준 그리스 신들의 인간미를 말이다.

 구석구석 빛이 들어오는 시대가 되어 버린 이제는 그리스 신들이 머물 환상의 공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에게 이 책은 미처 알지 못했던 환상의 신대륙으로 향하는 지도와 같았다. 가벼운 산보를 하듯 찾아간 신대륙에서는 고대에 그랬듯, 저마다 주연이 되는 수많은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배우와 각본만은 변치 않는 그 연극과 함께 여름을 보냈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무대 위에 올라간다면 누구라도 배우가 된다. 관객들 역시 이 지상에 신들과 함께 발 딛고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2001년 여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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